소설리스트

기적의 피아노-30화 (30/177)

[30] Ep.5 : 좋은 사람. (3)

* * *

“이래도 정말 몰라?”

나를 불러 세운 여자아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흘러내린 자신의 앞머리를 뒤로 확 제껴보였다.

그러자 그제서야 어렴풋이 내가 알고 있는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안나 누나?”

“그래! 어떻게 나를 한 번에 못 알아볼 수 있어?”

“아니, 그게 어제랑 느낌이 너무 달라서…”

“그거야 어제는 화장을 했었으니까 그렇지.”

어제는 정말 인형같이 커다란 눈에 발그스레한 볼 덕분에 굉장히 인상이 강해 보였는데, 오늘의 안나는 굉장히 수수해보였다.

작고 둥글게 말아 올렸던 머리를 풀어 헤친 그녀는 윤기가 흐르는 긴 생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이렇게 보니 사람이 확 달라지네. 여자들에게 화장이란 어마어마한 것이구나.

그렇다면 설마 진아와 소희도?

문득 그런 생각에 고개를 돌려 진아를 바라보자,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진아가 따지듯 입을 열었다.

“뭐, 왜, 뭐, 왜 그런 눈으로 날 보는 건데?”

… 진아에게 예쁘장함을 기대하느니, 차라리 그녀의 이마에 눈을 하나 더 그려 넣는 게 어울릴 거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때 우리를 바라보던 누나가 허리춤에 손을 올리며 나에게 물었다.

“학교 끝났지? 이제 레슨 받으러 가니?”

“무슨 레슨?”

“그야, 당연히 피아노 레슨이지.”

“나 따로 피아노 레슨 같은 거 안 받는데…?”

그러자 그녀는 뒤통수라도 한 대 얻어맞은 듯 멍한 표정으로 나에게 되물었다.

“선생님이 없다고? 거짓말…”

그러자 내 옆에 있던 민석이가 나를 대신해 누나에게 대답해주었다.

“진짠데, 민준이네 집 엄청 가난해서 피아노 학원 같은데 다닐 돈 없어요~”

음, 그 말이 사실이긴 한데, 썩 기분이 좋진 않네…?

다행히 분위기를 파악한 승우가 나 대신 민석이의 옆구리를 쿡 찔러 주었다.

“넌 진짜. 눈치 좀 있어라.”

“내가 뭐~ 맞는 말이잖아. 아악!! 왜 또 찔러!!”

결국 승우한테 입을 틀어 막힌 민석이가 무리에서 조금 떨어지자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좋아. 믿어줄게. 그래도 개인적으로 연습은 하겠지? 그래. 연습실은 어디야?”

“연습실도 따로 없는데?”

“뭐? 그럼 너희 지금 어디 가는데?”

“배고파서 떡볶이 먹으러 분식집 가는 길인데?”

“떡볶이라면? 설마 빨간 고추장 국물에 새하얀 떡을 풀어서 오뎅이랑 같이 포크로 찍어 먹는 그 마성의 음식을 말하는 거야?”

그냥 떡볶이를 떡볶이라고 하면 되지. 뭐 저리 디테일하게 설명을 다하지?

근상이랑 진아도 뭔가 수상한 기운을 느꼈는지. 자연스럽게 내 곁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좋아. 그럼. 나도 같이 가.”

“응? 누나도 같이?”

“왜? 안 돼?”

아니, 뭐 안 될 건 없지만…

결국 우리는 새로운 멤버(?)로 영지 국민학교의 안나 누나를 포함해 학교 근처 분식집으로 향했다.

낡고 허름한 분식집 앞에서 검은 양복을 입은 아저씨와 잠시 실랑이를 벌이던 누나는 잠시 후 가게 안으로 들어와 호기롭게 아주머니에게 외쳤다.

“아주머니. 여기 메뉴판에 있는 거 처음부터 끝까지 다 주세요.”

“어머, 이걸 다?”

누나의 주문이 떨어지자 밖에서 대기 중이던 검은 양복을 입은 아저씨가 대신 결제를 해주었다.

잠시 후. 좁은 테이블 위에 떡볶이 5인분을 비롯해 오뎅과 야끼만두. 못난이 만두까지 분식집 메뉴에 전품목이 올라오자, 민석이는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탄성을 내질렀다.

“젠장.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이야.”

&

약 30분가량. 각자 포크를 들고 전투적인 식사를 마치고 나자, 다들 입 주변에 새빨간 떡볶이 소스를 묻어나있었다.

안나 누나는 고상한 손놀림으로 벽에 걸려있던 두루마리에서 휴지 몇 조각을 뜯어내 입가를 닦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여기 진짜 맛있다. 아, 살찌면 어쩌지…”

전생에 떡볶이 못 먹은 귀신이라도 붙은 것일까? 바닥에 있는 소스까지 싹싹 긁어 먹었으면서 살찔까 걱정하는 누나의 모습에 모두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럼 이제 배도 채웠겠다. 이제 연습하러 가는 거야?”

“아니. 이제 집에 가서 숙제해야지.”

“뭐? 그럼 피아노 연습은?”

“오늘은 연습 안 할 건데? 애초에 본선 진출이 결정 난 것도 아니고.”

“무슨 소리야. 너라면 분명 본선 확정이라고!!”

“그걸 누나가 어떻게 알아?”

“아, 아무튼 그런 게 있어. 여자의 감이랄까?”

하러가고 싶어도 이렇게 찰거머리처럼 붙어 있으니 갈 수가 있나.

안 그래도 오늘은 수잔 누나의 연주회가 있는 날이라 서둘러 가봐야 하는데…

“아, 뭐야. 잔뜩 기대했는데, 헛수고 했네.”

“대체 뭘 기대한 거야?”

“너의 피아노 선생님. 대체 누구한테 레슨 받는지 엄청 궁금했었는데…”

분한 마음에 새하얀 손을 움켜쥐는 그녀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레슨 선생님에 대해 알려주고 싶어도 내 선생님이 베토벤이라면 믿어주지도 않겠지만…

결국 나에 대해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누나는 돌아갈 시간이 되었는지 분식집 앞에 검은색 승용차 한대가 마중 나와 있었다.

“나중에 본선 발표나면 또 보자.”

그 말을 끝으로 누나는 차에 올랐다.

“와~ 역시 사립학교 다니는 사람들은 뭔가 다르긴 다르구나. 분식집 메뉴를 고민 할 필요도 없이 1초 만에 결정해 버리네.”

승우의 말에 민석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 쳤다.

“그래. 무얼 먹을까 망설일 때는 그냥 다 시키면 되는 거였구나. 나 오늘 뭔가 깨달음을 얻은 것만 같아.”

… 뭔가 대화의 주제가 살짝 어긋난듯한 이 느낌은 뭐지?

* * *

“꼬맹이는 아직인가?”

“네. 그게 아직 올 기미가 안 보이는 데요?”

한스의 대답에 베토벤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차를 대기 시킨지 벌써 10분이 지났건만, 가장 중요한 녀석이 아직 도착을 안했으니…

베토벤은 애꿎은 회중시계 경첩을 딸각 거리며 이를 악물었다.

그때였다.

“주인님~!! 옵니다! 민준이가 와요~!!”

“이 자식이 지가 무슨 소설 속 주인공이라도 되는 줄 아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베토벤은 서둘러 자신의 모자와 망토를 두르고 집을 나섰다.

“죄송해요. 선생님.”

“마음 같아선 마차 뒤에 묶어서 질질 끌고 가고 싶다만, 일단 그건 나중에 하고.”

아니, 잠깐만 나중에 하신다구요?

어린 민준이는 베토벤 선생이 내뱉은 말에 기겁하며 서둘러 그의 뒤를 따랐다.

“한스. 넌 마부석에 타.”

“네? 저는 왜요?”

“채찍이 모자르잖아. 너도 같이 휘둘러. 연주회가 열리는 저택까지 전속력으로 간다.”

잠시 후. 횃불이 밝혀진 빈의 대로에 검은 마차 한 대가 미친 속력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작은 돌멩이 하나에도 요란하게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베토벤은 태연한 목소리로 민준에게 말했다.

“따로 합을 맞춰볼 시간은 없을 거다. 도착하자마자 피아노 앞에 앉을 준비 해.”

“괜찮아요. 수잔 아가씨라면 분명히 잘해낼 수 있을 거예요.”

“네 좁쌀만한 실력은 걱정이 안 되냐? 아무튼 배포가 큰 건지, 말귀를 못 알아먹는 건지. 종잡을 수가 없군.”

“하하… 물론 저도 잘해야죠. 그런데 선생님 귀는 괜찮으세요? 전에 보니 많이 아파하시는 것 같던데…”

“당연하지. 아주 멀쩡해. 그러니 더 이상 내 귀에 대해선 일절 입도 뻥끗하지 말도록. 안 그러면 돌아오는 길에 마차 바퀴에 사지를 꽁꽁 묶어 버릴 테니까.”

베토벤의 말에 잠시나마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 민준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격렬하게 흔들리는 마차의 창밖으로 저 멀리 거대한 성이 모습을 드러내자, 민준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어두운 밤하늘 아래 홀로 고고히 빛나고 있는 모습은 마치 동화 속에 등장하는 고성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우와… 저기는 어딘 가요?”

“어디긴 어디야. 너는 폐하가 기거하시는 궁전도 모르냐?”

“아, 어쩐지 엄청 화려하다 싶더라니.”

오스트리아 빈의 쉔브룬 궁전.

1696년에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전을 본따 건축한 이 성에서는 오늘 밤 수많은 음악가들의 연주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민준은 마차의 목적지가 쉔브룬 궁전이라는 베토벤의 말에 깜짝 놀라 다시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와~ 저기서 오늘밤 연주회가 열리는 것이었구나.”

베토벤은 어린 제자가 비명을 지르든 말든 손에 들린 회중시계로 계속해서 시간을 체크하고 있었다.

“이봐 한스. 더 빨리는 안 되나?”

“지금도 전속력인데요. 주인님!!”

“그럼 할 수 없지. 네가 내리면 더 빨라지겠네?”

“······.”

“······.”

“이랴!! 이랴!! 이놈들아!! 더 빨리 달리지 못할까!!”

한스의 피나는 노력 덕분일까?

간신히 베토벤이 예상한 시각에 정문을 도착한 마차는 경비원에게 초대장을 보여주기 위해 잠시 바퀴를 멈추었다.

흥분한 말의 거친 숨소리와 함께 한스의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우욱… 토 할거 같아.”

쉔부른 궁전은 정문을 지났음에도 본 성에 다다를 때까지 거대한 정원을 지나야 했는데, 그 정원을 일직선으로 통과하는데 만 해도 10분가량이 소요가 되었다.

실로 어마어마한 크게 어린 민준의 입은 쉽게 다물어지지 못했다.

“대충 시간은 맞췄군.”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기품 있게 모자를 눌러쓰는 베토벤과는 다르게 마부석에서 내린 한스는 그새 10년은 늙어보였다. 마차의 격렬한 흔들림에 멀미를 호소하던 그는 경비원의 안내에 따라 서둘러 화장실로 달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베토벤이 고개를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어린 녀석이나 다 큰 어른이나. 내 속을 썩히려고 작정들을 하셨군.”

착잡한 표정으로 자신의 은색 회중시계를 들여다보던 베토벤에게 어디선가 수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

불안한 마음에서일까?

궁전의 정문 앞에서 민준이와 베토벤을 기다리고 있던 수잔은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그들에게 달려왔다.

“안녕하십니까. 아가씨.”

“하도 안오시길래. 혹시나 무슨 일이 난건 아닌지 걱정 했어요.”

그러자, 베토벤은 어린 민준을 살짝 흘겨보며 입을 열었다.

“분명히 말해두지만, 저의 잘못은 아닙니다.”

“죄송해요. 아가씨. 제가 늦는 바람에…”

“괜찮아. 이렇게 와준 것만 해도 고맙지. 헌데 시간이 조금 촉박한데 괜찮겠어?”

“문제없어요. 여기로 오는 동안 마차 안에서 수도 없이 연습했으니까요.”

“마차 안에서? 어떻게?”

그러자 수잔의 물음에 민준은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대답했다.

“여기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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