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Ep.5 : 좋은 사람. (1)
조그만 아이의 입가에 장난끼 어린 미소가 드리워진 순간.
관객들은 어린 민준이를 중심으로 무대 위를 비추던 조명이 한 단계 내려간 듯 한 착각이 들었다.
“뭐지…?”
갑자기 시야가 흐릿해지는 느낌에 객석에 앉아 있던 석동철은 두 눈을 부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마치 자신의 심장에 직격타를 날리는 듯 한 아이의 연주에 감았던 그의 눈이 부릅 떠졌다.
그리고 그것은 무대 안쪽에 앉아 있던 심사 위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석동철보다 가까이 앉아 있던 그들은 11살 소년의 심장을 파고드는 연주에 한순간이나마 아득히 정신이 멀어져가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어린 민준이 이번 예선에서 선택한 템포는 베토벤이 민준에게 직접 들려주었던 비창이었다.
덕분에 지금 민준의 머릿속에는 자신을 충격에 빠뜨렸던 그의 연주만이 가득했다.
그 때 자신이 받았던 충격적인 느낌을 가능하다면 생생하게 강당 안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이게 11살 아이가 치는 피아노 연주라고!? 빌어먹을 베토벤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정도잖아?’
인정하기 싫지만 석동철은 누군가가 지금 아이가 치고 있는 베토벤의 비창을 똑같이 카피해보라고 한다면 억만금을 준다 해도 자신이 없었다.
그만큼 지금 무대 위에서 연주 중인 아이는 오랫동안 피아노를 쳐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절대 영역을 넘어서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놀란 가운데, 민준이는 그저 순수하게 피아노를 즐기고 있었다.
심사위원의 평가?
관객의 관심?
그런 것 따위는 아무 상관없었다.
어린 민준의 피아노는 단지 천천히 노래할 뿐이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아다지오 칸타빌레’(adagio cantabile)였다.
‘여기서 베토벤 선생님이 오른팔을 높게 튕기셨지.’
그때 자신이 본 베토벤의 작은 버릇조차 그대로 따라하던 민준의 머릿속에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의 피아노를 그대로 카피해내고 있는 지금의 자신을 베토벤 선생님이 보시면 뭐라고 하실까?
‘그게 내가 보여주었던 진짜 비창이라고? 웃기는군. 넌 그저 또 다시 내 흉내만 내고 있을 뿐이다. 그게 무슨 자랑거리나 된다고 실실 웃고 있는 것이냐.’
상상 속에서 베토벤 선생님의 따끔한 일침이 울려 퍼졌지만, 민준은 기죽지 않았다.
‘알고 있어요. 선생님. 이건 저의 피아노가 아닌 선생님의 피아노라는 걸. 하지만 저 혼자만 듣기엔 너무 아까운 연주인 걸요. 저만의 연주는 본선에 진출할 수 있다면 그곳에서 보여드릴게요.’
다시 처음의 주제로 돌아오는 3부의 클라이막스에서 민준의 피아노는 강당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을 매료시켰다.
자기 자식 자랑에 끊임없이 재잘 거리던 아주머니들조차 민준이의 피아노에 벙찐 표정을 지어 보였을 정도니까…
2부의 마지막부터 벅차오르는 감동에 숨 쉬는 것조차 잊고 있던 석동철은 아이의 연주가 끝나자마자 크게 한 숨을 내쉬었다.
‘잠깐만? 오전에 진행했던 심사 중에서 하나의 곡을 끝까지 들었던 적이 있었던가?’
아니, 기억을 되짚어 보았지만, 분명 그의 기억 속에는 단 한 차례도 없었다.
마치 유명 피아니스트의 내한 공연을 방불케 하는 고요함 속에 무대 위에 아이는 건반에서 손을 떼었다.
* * *
‘끝났다….’
뭔가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베토벤 선생님이 직접 보셨다면 무척 화를 내셨겠지만 말이지.
그래도 후회는 없었다.
그런데 왜 다들 아무 말도 없지? 아까 오전 심사에선 보통 연주 중간에 심사 위원 아저씨들이 끊어 주시던데?
‘아, 설마 내가 너무 연주에 몰입하느라 듣지 못했던 건가?’
그때 정적이 찾아온 무대 위에서 사회자 아저씨가 심사 위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기 참가번호 97번 어린이. 연주가 끝났는데요?”
“아, 그게…”
“하, 학생. 내려가 봐도 좋아요.”
심사위원 아저씨들의 말에 의자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온 나는 아저씨들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인 뒤 무대에서 내려왔다.
이제 어디로 가야할지 한참 망설이고 있는데, 어디선가 오수정 선생님의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준아, 여기야~”
나를 바라보며 작게 손을 흔들어 보이던 선생님은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와락 품에 나를 안으셨다.
“잘했어. 민준아. 정말 최고였어…”
오른쪽 귓가에 선생님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 왜 울어요?”
“그냥. 민준이의 피아노가 너무 좋아서… 선생님 너무 기쁘다.”
사실 방금 전 연주는 온전히 나만의 피아노는 아니었는데? 하지만 한편으론 내가 베토벤에게 느꼈던 충격과 감동이 선생님에게 그대로 전해진 것만 같아 으쓱한 기분도 들었다.
그때였다.
“야. 너.”
앙칼진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인형 같이 이쁘장한 여자 아이가 허리춤에 손을 올린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학교 학생은 아닌 것 같은데, 누구지…?
“방금 나 부른 거야?”
“그래. 너. 이름이 뭐야?”
“내 이름은 왜?”
“기억해두려고.”
고운 빛깔의 보라색 원피스에 머릿카락 한 올까지 세심하게 빗어 넘겨 둥글게 말아 올린 헤어스타일. 아까부터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뚫어지게 나를 바라보는 게 왠지 엄청 기가 셀 것만 같았다.
나를 안고 있던 오수정 선생님조차 여자아이의 당돌함에 가만히 바라만 보고 계셨다.
“차민준.”
“나는 안나. 송 안나. 네 이름을 기억할 테니, 앞으로 내 이름도 꼭 기억해줘.”
안나? 굉장히 독특한 이름이라 쉽게 잊기도 힘들 것 같다.
그때 무대 위에서 사회자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참가번호 98번 허용석 어린이. 무대 위로 올라와 주세요.”
반장의 이름이 호명 되자, 오수정 선생님이 벌떡 일어나 무대 쪽을 바라보았다.
“참가 번호 98번 어린이? 대기실에 없나요?”
어라? 내가 무대에 오르기 전까지 분명 대기실에 있었는데?
“민준아 선생님. 잠깐 다녀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아, 네.”
나를 두고 서둘러 대기실 쪽으로 달려가는 선생님을 바라보던 중 안나가 나에게 말했다.
“나라면 이해가 가.”
“응? 뭐가…?”
“너 뒤에 연주해야하는 부담감. 아마 지금쯤 대기실에 있는 아이들 모두 그렇게 느끼고 있을 걸? 이것 봐~”
안나는 나를 향해 가느다란 팔뚝을 내밀어 보였다.
새하얀 그녀의 팔 안쪽에는 올록볼록 닭살이 잔뜩 돋아나 있었다.
“누군가의 연주를 듣고 이렇게까지 닭살이 올라보긴 처음이거든? 그게 내가 너의 이름을 기억하려는 이유야. 너 연서 국민학교에서 왔지? 몇 학년이야?”
“4학년.”
“거기다 나보다 어리기까지…?”
“넌 몇 학년인데?”
“누나한테 ‘넌’이라니. 이래봬도 6학년이거든?”
그때 안나의 등 뒤로 검은 양복을 입은 아저씨가 다가와 그녀에게 말했다.
“아가씨. 슬슬 준비하셔야 합니다.”
“응. 알았어. 곧 갈게.”
“치~ 자긴 어른한테 반말하면서…”
“뭐!?”
“아무것도 아냐.”
“아무튼 곧 내 차례가 다가오니까. 여기서 딱 기다려.”
그 말을 남긴 안나는 자신을 데리러온 아저씨와 함께 어디론가 사라졌다.
“참가 번호 98번 학생. 제한 시간 초과로 실격 처리 되었습니다. 다음 학생 준비해주세요.”
아, 결국 용석이는 무대에 오르지 않았구나. 그렇다면 다음 차례는…?
‘소희다.’
그 생각이 들자마자 대기실 문이 열리며 오수정 선생님과 함께 소희가 걸어 나왔다.
무대에 오르기 전 한 차례 나를 바라본 소희는 조그만 입술을 깨문 채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 * *
‘이거 안 좋은데?’
참가번호 99번 윤소희. 석동철은 무대를 오르는 자신의 제자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방금 전 남자 아이의 연주가 너무나 훌륭했기에 소희의 실력이 심사위원들에게 상대적으로 낮은 평가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98번 학생이라도 무대에 올랐다면 모르겠지만, 그 아이는 심사 자체를 포기했으니…
‘이렇게 된 이상. 네 모든 걸 쏟아 붓는 수밖에 없구나 소희야….’
석동철은 제자를 응원하는 마음을 담아 깍지 낀 손에 불끈 힘을 주었다.
“참가번호 99번 학생. 준비한 곡은 쇼팽의 즉흥 환상곡입니다. 준비가 되었으면 시작해 주세요.”
“어라?”
사회자의 멘트에 무대 밑에서 소희를 바라보던 민준은 고개를 갸웃 거렸다.
불과 며칠 전까지 자신과 같은 베토벤의 비창을 연습 중이었던 걸로 알고 있었는데?
‘선곡을… 바꾼 건가?’
새하얀 건반 위에 손을 올린 소희는 방금 전 민준이의 피아노를 잊기 위해 두 눈을 꼭 감았다.
‘지금은 선생님의 말씀만 믿고 배운 대로 치는 거야.’
최근에까지 소희는 피아노에 감정을 실으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몰랐다.
민준이라는 아이를 만나기 전까진…
처음 그 아이의 피아노를 들었을 때. 소희는 어렴풋이나마 그동안 선생님이 한 말을 이해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그 아이와 같아지기 위해 같은 곡을 수도 없이 연습했다.
그러나 방금 전 민준이가 들려준 비창은 전보다 훨씬 더 성장해 있었다.
“참가번호 99번 학생…? 5초 안에 연주를 시작하지 못하면 실격입니다.”
피아노에 앞에 앉아 두 눈을 감고 있는 여자아이의 모습에 사회자는 또 다시 5초의 카운트를 셀 준비를 했다.
‘어떻게 하면 너와 같은 피아노를 칠 수 있을까? 나에게도 너와 같은 재능이 있을까?’
그때. 소희의 머릿속에 민준이의 또렷한 목소리가 울려 펴졌다.
‘소희야. 힘내!!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너만의 피아노를 보여줘.’
마치 옆에서 들린 것처럼 또렷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무대 끝자락에 턱을 괴인 채 자신을 바라보는 민준이가 보였다.
그 순간. 마치 무언가에 꽁꽁 묶인 채 움직이지 않았던 그녀의 손가락 마디가 탁하고 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쇼팽. Op.66 즉흥 환상곡.
5초 카운트를 헤아이려던 사회자의 입이 즉흥 환상곡의 웅장한 전조와 함께 단번에 틀어 막혔다.
그리고 이어서 아름답고 현란한 기교가 돋보이는 빠른 연주가 시작되자, 사회자는 얼이 나간 표정으로 생각했다.
‘아니, 대체 이 꼬마 녀석들이 하나 같이 왜들 이러는 거야? 내가 너무 준비 시간을 짧게 줬나? 카운트만 세면 아주 기가 막힌 연주를 하네….’
쉴세 없이 건반을 오가는 아이의 손가락이 마치 여러 개로 겹쳐 보이는 만큼 빠르고 정교한 연주. 심사 위원 중 하나가 옆 사람에게 소곤 거렸다.
‘오후 심사는 제법 경쟁이 치열하겠는데요?’
‘그러게 말입니다. 오후 심사는 시작이 좋군요. 대회 수준이 확 올라간 느낌입니다.’
‘이 정도라면 주최자인 그 분도 만족해하실 듯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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