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피아노-27화 (27/177)

[27] Ep.4 : 천재의 도전. (5) (1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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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백화점과 교육청이 합동으로 주관하는 어린이 피아노 대회의 예선전에는 연서와 영지 국민학교 뿐만 아니라 타 지역 학생들까지도 제법 모여들었다.

그러다보니 거대한 대강당 안은 약 200명 가량의 아이들이 웅성대는 소리로 귀가 멍멍해질 지경이었다.

“아~ 아아~ 주최측에서 알립니다. 곧 예선전이 시작될 예정이오니, 각 학교의 인솔 교사님들께서는 학생들을 조용히 시켜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곧 예선전이 시작될 예정이오니…”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주최자의 목소리에 인솔교사들은 서둘러 아이들의 입을 막았다.

이윽고 웅성거림이 잦아들자, 무대 위에 심사 위원을 비롯한 정장 차림의 남자들이 사회자의 소개와 함께 차례차례 올라왔다.

모든 심사 위원이 자리에 착석하자 으레 그렇듯이 대회를 주최하는 백화점 측의 소개가 덧붙여졌다.

비록 공식적인 클래식 대회가 아니었기에 입상을 하더라도 큰 이력이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상금 수준은 백화점 스폰답게 제법 큰 편이었다.

대상에겐 무려 300만원의 상금이 수여될 예정이었으니까.

1990년대 직장인 평균 월급이 100만원 근처에 아슬아슬 걸쳤던 것을 감안하면 나쁘지 않은 금액이었다.

‘300만원이면 대체 라면이 몇 박스지?’

사회자의 상금 설명에 손가락으로 라면 박스를 세어 보던 민준은 기겁할만한 숫자에 눈이 번쩍 뜨였다.

자신이 상상할 수 없는 금액에 대해선 차라리 라면 개수로 금액을 환산하는 게 더 쉬운 아이였다.

예선을 치루는 방식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마친 뒤, 곧장 박수와 함께 어린이 피아노 대회의 예선전이 시작되었다.

‘와~ 동상만 타도 할머니랑 1년 동안 끼니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

소소한 행복에 젖어 황홀한 미소를 짓고 있던 민준이의 눈앞에 첫 번째 참가자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시작이다.’

어느 학교 출신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스를 잔뜩 발라 뒤로 넘긴 아이의 머릿결은 조명 빛에 반짝거려 멀리서 보면 마치 오토바이 헬멧을 쓴 듯한 우스꽝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아무리 예선이라지만, 수많은 참가자들 중에 가장 먼저 무대에 오른다는 중압감은 보통 아이가 소화하기엔 너무나 거대한 것이었다.

로봇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린 어깨와 잘 떨어지지 않은 발걸음을 억지로 옮기는 소년에겐 무대 한가운데에 놓여진 피아노가 잔뜩 몸을 웅크린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괴물처럼 보였다.

“참가자 1번 학생. 시작하세요.”

어떻게든 피아노 앞에 앉기는 했지만, 이미 아이 머릿속은 새하얀 백지 상태였다.

‘내가… 무얼 치려고 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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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예선 참가자들과 정 반대편 사이드에 앉아있던 석동철은 생각보다 큰 대회 규모에 새삼 놀라고 있었다.

‘단순히 백화점 홍보를 위한 대회인 줄 알았더니, 분위기는 제법 그럴싸하게 꾸며 놓았군.’

무대 위에 설치된 고급 그랜드 피아노만 해도 돈 꽤나 들인 행사라는 점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석동철의 눈에는 바로 이 점이 이번 예선의 가장 큰 변수가 될 것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가정집이나 피아노 학원에선 부피 문제로 업라이트 피아노를 이용할 텐데, 소희야 문제없겠지만, 이곳에서 갑자기 그랜드 피아노에 적응 할 수 있는 참가자가 몇이나 될까?’

석동철의 생각대로 업라이트 피아노와 그랜드 피아노는 같은 피아노라 하더라도 구조자체가 완전히 달랐다.

단적인 예로 현을 때리는 해머가 전진 운동인 업라이트 피아노와는 달리 그랜드 피아노는 현이 누워있기에 해머가 상하로 움직이는 수직 운동이었다.

이 단순한 차이에서 생겨나는 건반의 묵직함이 아직 경험이 부족한 아이들에게는 엄청난 차이를 낳게 하였다.

실제로 두려움을 떨치고 겨우 연주를 시작한 첫 번째 아이의 곡은 도저히 들어줄만한 수준이 못되었다.

긴장한 탓에 첫 소절부터 실수를 연발하여 결국 준비한 곡을 완주하지 못하고, 무대에서 내려와야만 했다.

얼핏봐도 예선 참가자 수만 200명이 넘기에 이 후로도 심사 위원들의 평가는 상당히 빠른 템포로 진행되었다.

건반의 미스터치가 잦을 경우엔 중간에 연주를 멈추게 하였고, 긴장한 탓에 제대로 피아노를 치지 못하는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벼운 마음으로 대회에 출전한 아이들의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지기 시작했다.

‘대체 이게 뭐하는 짓이지?’

타 지역 학생들의 무대를 지켜보던 오수정 선생 역시 석동철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협조 공문에서는 분명 아이들의 재능 개발을 위한 협력 사업이라고 명시 되어 있었지만, 실상은 콩쿨을 방불케 하는 엄격한 심사가 계속되고 있었다.

‘이래선 참가한 아이들한테 상처밖에 되지 않을 텐데….’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보이지 못한 채 울고 있는 아이를 다독여 주는 주변 선생님들의 모습에 그녀는 자신이 가르치는 4학년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모두가 긴장한 가운데 굳은 표정으로 무대를 지켜보는 가운데, 민준이 만은 두 눈을 반짝이며 웃고 있었다.

* * *

길었던 오전 심사가 끝나고 슬슬 배가 고파질 때 즈음, 사회자가 무대 위로 올라와 식사 시간을 알렸다.

“아~ 드디어 식사 시간이구나.”

늦잠을 잔 탓에 아침을 걸러서일까?

아니면 2교시 쉬는 시간에 몰래 까먹는 도시락을 걸러서 일까?

어제 영지 국민학교의 급식 시스템을 부러워하던 민석를 속으로 흉 본 것이 부끄러워 질 만큼 아무튼 지금 나는 너무나 배가 고팠다.

“소희야. 반장이랑 같이 밥 먹으러 가자.”

“응? 아, 난 별로 생각이 없는데…”

“왜? 점심인데, 배안고파?”

“그냥 입맛이 없어서…”

하지만 타 학교에서 개인행동은 금지 되어 있기에 결국 소희는 선생님의 인솔하에 다 같이 식당에 올 수밖에 없었다.

식판을 들고 자기가 먹고 싶은 만큼 반찬을 담아가는 신기한 시스템에 눈이 휘둥그레진 나는 맛있어 보이는 반찬을 식판에 쓸어 담기 시작했다.

“야, 야. 쟤 좀 봐.”

어디선가 들려오는 누군가의 속삭임에 고개를 돌리자, 영지 국민학교 아이들이 나를 바라보며 키득거리고 있었다.

아마도 식판에 산처럼 쌓아 올린 돈까스와 고기반찬을 보고 웃고 있는 모양이었다.

‘음? 내가 생각해도 너무 많이 담았나?’

그렇다고 이미 식판에 담은 반찬을 다시 반찬통에 되돌리기에도 좀 그런데…

그때 소희가 나를 구해 주었다.

“곤란 하면 내 식판에 옮겨 담아. 난 별로 밥 생각이 없어서.”

“아, 고마워~ 사실 너무 욕심 부린 거 같아서 곤란했었거든.”

소희의 도움으로 무사히 반찬을 식탁까지 옮긴 나는 허겁지겁 포크를 이용해 돈까스부터 입에 우겨 넣었다.

“배 많이 고팠나보구나? 천천히 먹어. 배탈 나면 어쩌려고?”

“괜찮아. 태어나서 아직까지 한 번도 배탈 난 적이 없거든. 근데 너 진짜 아무 것도 안 먹게?”

“응. 어제부터 물만 마셔도 헛구역질이 올라와서…”

“그럼 물도 한 모금 못 마신거야? 그래서 건반 칠 힘이 나겠어?”

“괜찮아. 예선 끝나고 집에 돌아가서 먹으면 돼.”

“흐음…”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니 비단 소희뿐만이 아니라 다들 식판에는 소량의 밥만 올려져 있었다. 용석이도 도저히 안 되겠는지 수저를 내려놓고 아까부터 연신 물만 마셔대고 있었다.

‘이거 나만 너무 태평한가…?’

결국 소희의 식판에 있던 고기반찬까지 모두 해치운 나는 세상 부러울 것 없는 표정으로 디저트로 나온 요구르트에 빨대를 꽂았다.

“민준아.”

“응?”

“아까 무대 위에 있던 커다란 피아노 말인데.”

“피아노가 왜?”

“그 피아노는 아마 네가 지금까지 쳐봤던 피아노랑은 다르게 건반이 좀 무겁거든. 그러니 우리집 피아노를 쳤을 때보다 손가락에 더 힘을 실어야 할 거야.”

“응, 맞아. 그렇더라.”

그러자, 나의 대답에 소희가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민준이 너 이미 그랜드 피아노를 쳐본 적이 있구나?”

“아, 뭐 우연한 기회가 있어서 최근에 몇 번 쳐봤어.”

“진짜? 다행이다. 그럼 연주 하는데, 별 문제 없겠네?”

“이따 오후에 올라가 봐야지.”

그렇게 오후 식사 시간이 끝나고 강당으로 돌아온 우리는 오수성 선생님께 번호가 쓰여진 명찰을 하나씩 건네받았다.

“받은 명찰은 왼쪽 가슴에 채우고~ 다들 밥은 맛있게들 먹었니?”

“네~”

라고 나 혼자만 대답했다.

조금 창피하다.

* * *

간단하게 빵으로 점심을 때운 석동철은 늦기 전에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오전 때와는 달리 오후엔 강당의 주인인 영지 국민학교 아이들의 연주가 많이 잡혀 있는지 학부모들로 보이는 이들이 제법 객석을 채우고 있었다.

“어머~ 송이 엄마도 왔구나.”

“민수도 이번 대회에 참가해요?”

아주머니들의 재잘 거리는 수다를 뒤로 하고 시간이 되자, 예선전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석동철 자신이 보기에 오전에 예선을 통과한 학생은 불과 2~3명 정도 오후엔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춘 아이들이 나올지 모르겠지만, 본선에 오르는 것은 기껏해야 10명 내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안에는 물론 그의 제자인 윤소희도 포함되어 있었다.

잠시 후. 사회자의 간단한 멘트가 끝난 뒤. 무대 위로 똘망똘망한 인상의 남자아이가 올라왔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석동철은 다신도 모르게 꼬고 있던 다리를 풀며 상체를 무대쪽으로 향했다.

‘그 아이다. 틀림없어.’

오후 예선의 첫 번째 참가자는 다름 아닌 차민준이었다.

‘으음~ 역시 점심을 너무 많이 먹었나?’

소희 말대로 적당히 먹을 걸. 너무 과식 했어.

대기실을 빠져나온 민준의 눈앞에 거대한 피아노가 모습을 드러냈다.

구교사의 오래된 피아노와는 달리 밝은 조명아래 홀로 고고한 척하는 모습이 얄밉기까지 해보였다.

‘그럼 소화도 시킬 겸. 너랑 신나게 놀아볼까?’

사뿐한 걸음으로 무대 위로 올라온 민준은 피아노 앞에 앉았다.

“참가번호 97번. 준비한 곡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의 2악장. 준비 되었으면 시작하세요.”

“흐음.. 뭘로 하지.”

피아노와 정면으로 마주한 민준의 머릿속에 수많은 베토벤의 비창이 스쳐 지났다.

처음 오래된 피아노에서 쳤던 아다지오 칸타빌레의 템포.

과거로 시간의 문을 열었던 오리지널 템포.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잔 누나의 레슨실에서 베토벤이 직접 들려준 템포.

“참가 번호 97번 학생? 5초 이내로 시작하지 않으면 실격입니다.”

하지만 사회자의 목소리는 이미 민준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5.”

‘그것도 좋지만, 너무 평범한 느낌이고….’

“4.”

‘그러고 보니 전에 소희네 선생님이 들려준 비창도 있었지. 그것도 나쁘지 않던데?’

“3.”

‘아냐, 그래도 역시 내가 많이 쳐본 템포가 좋겠지?’

“2.”

‘아~ 젠장 치고 싶은 템포가 너무 많아! 어쩌란 말이냐….’

“1.”

‘좋아. 결정했어. 이걸로 하자.’

조그만 아이의 입가에 장난끼 어린 미소가 드리워진 순간.

무대 분위기가 한 순간에 급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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