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피아노-24화 (24/177)

[24] Ep.4 : 천재의 도전. (2)

“베토벤 아저씨의 피아노. 죽을 때까지 머릿속에 똑똑히 기억해 두겠어요. 그러니 이번엔 제 차례입니다.”

석동철의 피아노를 듣고 단숨에 그의 연주법을 간파한 민준은 흥분에 가득 차 있었다.

잠시 후. 구교사의 음악실에서 엷은 피아노 소리가 울려 퍼지자, 수위실에 앉아 있던 노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녀석도 참… 성격도 급하군.”

굳은 손도 풀 겸 아이가 선택한 곡은 쇼팽의 강아지 왈츠였다.

비바체 몰토. (vivace molto)

‘아주 빠르고 생기 있게’라는 뜻의 템포답게 민준의 손가락은 그야말로 날아갈 듯이 가볍게 건반 위를 춤추기 시작했다.

강아지 왈츠의 본래 제목은 왈츠 제 6번 내림라장조 Op 64. No.1.

쇼팽의 애인이었던 조르주 상드의 강아지가 자기 꼬리를 잡기 위해 빙빙도는 모습에서 영감을 얻은 곡으로 덕분에 ‘강아지 왈츠’라는 이름을 얻었다.

실로 굉장한 빠르기와 정확도를 요구하는 이 곡은 유럽권에서는 ‘1분 왈츠’라고도 불렸는데, 한때는 피아니스트 사이에서는 이 곡을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칠 수 있느냐를 걸고 자주 내기를 즐겼다곤 한다.

보통 어느 정도 정확도를 유지 하면서 칠 경우, 숙련자 같은 경우엔 1분 40초 정도 걸리지만, 오늘의 민준이는 그보다 훨씬 더 빨랐다.

좁은 수위실 안에서 민준의 피아노를 체크 하던 노인은 째깍 째깍 움직이는 바늘을 지그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1분 28초. 실로 기가 막힌 연주였구나.”

* * *

무거운 건반을 빠르게 누르다 보니 손가락 끝이 금세 얼얼해졌다.

너무 내 기분에만 취해 함부로 연주한 것은 아닐까 싶기도 했지만, 방금 전의 연주는 내가 들어도 제법 훌륭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완벽히 나만의 피아노를 찾은 것은 아니지만, 오수정 선생님과 베토벤이 남긴 말뜻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호흡을 가다듬은 나는 이번에는 끝까지 비창을 연주할 수 있었다.

비록 나의 색이 입혀진 피아노였기에 시간의 문을 열리지 않았지만, 오늘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분이 좋다.

마치 답답하게만 느껴졌던 껍질을 깨부수고 나온 느낌이야.

&

“미… 민준아. 조금만 천천히 가면 안 될까?”

뒤에 들려오는 오수정 선생님의 목소리에 계단을 오르던 나의 발걸음이 멈췄다.

“에고고.. 아야, 이럴 줄 알았으면 운동화 신고 올 걸…”

뾰족 구두를 신고오신 오수정 선생님은 시멘트와 돌덩이로 대충 만들어진 계단을 오르기가 쉽지 않아 보이셨다.

“괜찮으세요. 선생님?”

“응.. 근데 민준아 아직 멀었니?”

“조금만 더 가면 되요~”

“그 말. 아까 저 밑에서도 했던 것 같은데…”

삐죽 입을 내미는 오수정 선생님은 무릎을 받치고 일어나 긴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대로 달렸더라면 이미 집에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이긴 한데, 선생님의 걸음걸이에 맞추다 보니 더 멀게 느껴진다.

거기다 빈손으로 가면 안 된다고 무거운 쥬스까지 들고 계시니 얼마나 힘이 드실까?

“선생님. 그 쥬스 제가 들어 드릴게요.”

“뭐? 이거 엄청 무거운데?”

“이정도야 괜찮아요~”

“오올~ 우리 민준이 제법 남자다운데? 그럼 저기 계단 위까지만 부탁할게.”

짧은 스커트 차림으로 겨우겨우 계단을 오른 오수정 선생님은 길게 숨을 들이 마시며 뒤를 돌아 보셨다.

언덕 아래로 펼쳐진 수많은 집들을 바라보며 선생님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말했다.

“등산이 뭐 별거야? 높은데 오르면 이거야말로 등산이지…”

“네?”

“아냐. 민준아. 그냥 선생님 혼잣말이야. 자~ 이제 가볼까?”

하고 고개를 돌린 선생님의 눈앞에는 다시 비좁은 비탈길에 자리 잡은 수많은 계단들이 놓여 있었다.

“민준아… 아까 계단은 방금 이걸로 끝이라며?”

“이제부턴 그냥 작은 비탈길 정도라 별로 계단 같지도 않아요~”

“그, 그래…?”

잠시 후. 집 앞에 있는 계단까지 알뜰하게 다 오르니, 어느새 집앞 가로등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학교에서 집까지 오는 동안 한 번도 가로등 켜질 때 도착한 적이 없는데, 엄청 늦었네….’

“아이구~ 우리 똥강아지 왔구나~”

집 앞에서 나를 기다리시던 할머니 목소리에 서둘러 달려가 안기자, 뒤이어 오수정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민준이 할머니 되시나요?”

“옴마. 민준아. 이분은 누구시다니?”

“저희 학교 음악 선생님이요.”

“선상님? 근데 전에 내가 본 선상님이랑은 좀 다른 것 같은디?”

“아, 담임선생님이 아니라, 음악만 따로 담당하시는 선생님이에요.”

“그래? 그런데 선상님이 여기까진 어쩐 일로…?”

“그게, 민준이 보호자의 사인이 필요해서요.”

가방 안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내든 선생님은 베시시 웃어보였다.

볼을 타고 흐르는 땀을 본 할머니는 가지고 계시던 손수건으로 선생님의 땀을 닦아 주셨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 많으셨어요. 누추하지만 일단 안으로 들어오셔요.”

바닥이 차기에 두툼한 이불 위에 선생님을 앉힌 할머니는 선생님이 가져오신 쥬스를 컵에 담아 내어 주었다.

“그냥 오셔도 되는지, 뭐 이런 걸 다…”

“아니에요. 할머니. 감사합니다.”

오렌지 쥬스로 목을 축인 선생님은 잔을 바닥에 내려놓자마자, 본론으로 들어가셨다.

“사실 이번에 민준이가 피아노 대회를 나가기로 했는데요. 여기 보호자 동의를 받아야 해서 이렇게 찾아왔어요.”

“아이구~ 그럼 선상님께서 오실게 아니라, 저를 학교로 부를 것이지…”

“아니에요. 덕분에 운동도 되고, 좋은 경치도 구경했는걸요~”

“전에 뵌 선상님은 엄청 깐깐하시던데, 젊은 선상이라 그런가 말도 어쩜 이쁘게 하시누?”

할머니는 오수정 선생님이 마음에 드셨는지, 눈가에 주름을 깊게 패이며 연신 웃어보이셨다.

“그런데 우리 민준이가 대회까정 나갈 실력이 되나?”

“그런 말씀 마세요. 민준이라면 분명 잘 해낼 거라 믿어요. 그리고 그렇게 큰 대회도 아니라서 너무 걱정 안하셔도 되셔요.”

“물론 착한 선상님께서 알아서 잘해주시겠지만, 이 할미가 못나서 학원 한번 제대로 보낸 적이 없는디. 참가비가 얼마요?”

“네? 아니에요. 할머니 참가 무료구요. 그냥 편하게 서류에 도장만 찍어주시면 되세요.”

“그려요? 잠시만 도장을 어디에 두었더라…”

할머니가 서랍을 뒤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시고, 옆에 있던 나는 쥬스를 홀짝이며 시계만 바라보고 있었다.

본래라면 저녁 식사를 마친 뒤 구교사로 돌아가고도 남을 시간이었지만, 오늘은 아무래도 조금 늦을 것만 같았다.

“어머, 종이 건반이네?”

방안을 둘러보시던 선생님께서 한쪽 구석에 놓여진 종이 건반을 들어 보였다.

스카치 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여진 초라한 종이 쪼가리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얼마나 두드려 대었는지 반질반질 윤이 나는 종이를 바라보며 오 선생님은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이셨다.

“평소에도 이걸로 연습하는 거니?”

선생님의 물음에 잠시 대답을 망설이던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하다.”

“네?”

“나에겐 왜 이런 열의가 없었을까?”

선생님은 내 초라한 종이 건반을 곱게 접어 바닥에 내려놓은 뒤,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셨다.

“천재란 1%의 영감과 99% 노력으로 만들어진다더니. 틀린 말이 아니었구나…”

&

“그럼 가볼게요. 할머니.”

“아이구, 밥이라도 먹고 가지. 내 마음이 다 불편하네.”

“나중에요. 민준이랑 같이 또 올게요.”

“민준아, 선상님 큰길까지 모셔다 드리고 와.”

“네~”

“아니에요. 괜찮은데…”

하지만 이미 어두워진 골목을 바라보니, 선생님도 어디가 어딘지 잘 모르는 눈치였다.

“그, 그럼 민준아. 아까 올라왔던 계단까지만 데려다줄래?”

“그럴게요~ 다녀오겠습니다. 할머니.”

“오야~ 조심히 다녀오그라~”

멀리서 손을 흔드는 할머니에게 오 선생님은 몇 번이나 뒤돌아 인사를 드렸다.

그렇게 큰 길로 향하는 길.

나는 몇 번을 망설이다 선생님에게 말을 걸었다.

“선생님.”

“음?”

“저 이제 정말 대회에 나가는 건가요?”

“응. 왜? 막상 눈앞에 다가오니 떨리니?”

“그냥, 왠지 좀 어색해서요.”

“첫 대회라. 하긴 선생님도 딱 네 나이 때 처음으로 대회에 나갔었지.”

“선생님도 저처럼 어릴 때가 있었어요?”

“그럼~ 물론이지.”

“선생님은 어땠어요?”

“글쎄에~ 어땠을 것 같니?”

“엄청 피아노를 잘 쳐서 상도 타고, 꽃다발도 받고…”

하지만 내 말에 선생님은 ‘쿡’하고 웃음만 터뜨릴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웃던 선생님은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처음 대회에 나간 날. 선생님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가만히 피아노 앞에 앉아만 있다가 결국 시간 초과로 내려 와야 했지.”

“정말요? 왜요?”

“무서웠거든. 나를 바라보는 관객들의 시선. 부모님의 기대. 그 모든 것이 너무나 부담이 되었었나 봐. 결국 집에 돌아와선 그동안 연습한 것이 분하고 억울해 펑펑 울었지만…”

“아…”

“하지만 우리 민준이는 선생님이랑 다르니까. 그런 부담감쯤은 쉽게 물리칠 수 있을 거라 믿어.”

“정말 그럴 수 있을까요? 막상 대회에 나가면 엄청 떨릴 거 같은데…”

“그럴 때는 말야. 이건 선생이라기보다 너보다 먼저 대회를 경험해본 선배로서 하는 이야긴데,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나를 바라보는 선생님의 표정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

“스톱. 이번에도 틀렸어.”

베토벤의 차가운 목소리에 나와 수잔 누나는 동시에 건반에서 손을 내려놓았다.

“미안. 이번에도 내가 틀렸네.”

어두운 표정을 짓는 누나에게 나는 되려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에요. 제가 정확히 맞추지 못해서…”

“둘이 아주 즐거워 보이는군. 그렇게 여유 부리다간 오늘 밤새도록 피아노를 쳐야할 걸?”

“네? 어라, 안되는데? 자정 전까진 할아버지 저택으로 돌아가기로 했는데…”

“팔자 좋은 소리하고 있네. 아가씨의 연주회가 코앞인데, 가긴 어딜 가? 나는 뭐 한가해서 여기 죽치고 앉아 있냐?”

두 대의 피아노 뒤에 앉아 있던 베토벤이 몸을 일으키며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해요. 선생님…”

“모차르트의 포르테 피아노 협주곡. 제 소견으로는 아직 아가씨의 실력으론 무리라 생각하는데, 어떻게든 이 곡을 꼭 하셔야겠습니까?”

다그치듯이 언성을 높이는 베토벤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자,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내가 입을 열었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더 쳐볼게요.”

“고작 한 번 가지고 되겠어?”

“잠시 10분만 누나랑 이야기 좀하고 올게요.”

“좋아. 눈앞에서 기적을 보여준다는데, 그깟 10분쯤이야. 다녀오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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