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피아노-21화 (21/177)

[21] Ep.3 : 오만과 편견. (8)

연주를 마친 베토벤은 아무 말도 없었다.

아니, 솔직히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

그와 나의 실력 차는 스스로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까.

“어떻게 내 연주를 그대로 카피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렇게 내 뒤만 쫓다간 평생 너만의 피아노를 칠 수 없을 것이다. 스승으로서 너에게 주는 첫 번째 조언이다. 참고하던지..”

의자 위에 코트를 집어 들며 베토벤이 내게 남긴 말이 계속해서 귓가에 맴돌았다.

‘나만의 피아노라….’

방과 후. 음악실에서 오수정 선생님이 오시길 기다리는 동안 피아노 앞에 앉아있던 나는 조심스레 건반 위에 손가락을 얹어 보았다.

‘언젠가 나도 그와 같이 될 수 있을까?’

듣는 이로 하여금 온 세상을 세피아 톤으로 물들일 수 있는 연주라니, 솔직히 거기까진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베토벤의 말대로 나만의 피아노를 찾을 수 있다면…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건반 위에 올려져있던 손가락이 저절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뒤이어 나를 등진 채 피아노를 치고 있는 베토벤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깃털처럼 부드러웠지만, 건반 하나하나를 누를 때마다 특유의 힘이 실린 강인한 연주.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그의 연주를 흉내 내고 있는 자신을 발견 할 수 있었다.

팅…

‘이건 나만의 피아노가 아냐. 그저 어제의 베토벤을 흉내 내었을 뿐….’

“어째서 멈추는 거야?”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음악실 문을 빼꼼 열은 채로 나를 바라보는 수정 선생님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민준이 너 솔직히 말해 봐.”

“네? 뭘요?”

“너 따로 누구에게 피아노 레슨 받고 있는 거 아냐? 어떻게 단 며칠 만에 실력이 더 오를 수가 있지?

며칠 전이었다면 선생님의 칭찬에 마냥 기분이 좋았을 텐데, 오늘은 딱히 그런 기분이 들지 않았다.

내가 아무런 대답도 없자, 내 표정을 살피던 수정 선생님이 나에게 물었다.

“무슨 일 있었니? 혹시 너희 담임선생님께서 또 괴롭히든?”

“아니요. 그냥 좀…”

“오늘따라 좀 이상하네?”

“선생님. 저 궁금한게 있는데요.”

“응? 뭔데?”

“자기만의 피아노를 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뭐?”

나의 질문에 오수정 선생님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잠시 후. 살포시 웃으며 내 머리에 손을 올려 두었다.

“예전에도 느꼈지만, 넌 참 독특한 아이구나. 선생님이 스무살이 되어서야 느꼈던 것을 넌 벌써부터 찾고 싶은 거니?”

“선생님도 그런 적이 있어요?”

“물론이지. 하지만 미안하게도 선생님은 그 질문에 답을 줄 수가 없네~ 난 결국 찾을 수 없었거든.”

“네?”

“그래서 결국 이렇게 국민학교 선생님이 되었지. 하지만 민준이 넌 선생님과는 달리 꼭 찾을 수 있을 거야. 너만의 피아노를…”

* * *

끼이익.

민준이가 오수정 선생과 이야기를 나누던 시각. 정옥분 선생을 태운 택시가 시장 골목 안쪽에 멈춰섰다.

손님의 무리한 요구에 복잡한 골목까지 들어온 택시기사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택시비를 요구했다.

“2100원이요.”

“다른 기사 같으면 1500원이면 왔을 텐데, 받아도 너무 받아먹네.”

“그러게 아까 시장 진입로에서 내리셨으면 손님도 저도 서로 편했잖아요.”

“그럼 뭐 하러 비싼 돈 주고 택시를 타. 버스를 타고 다니지. 아무튼 시끄럽고 난 항상 1500원에 왔으니까. 1500원만 낼 거야.”

“네? 그게 무슨 소리에요. 할머니.”

“뭐라고? 할머니? 내가 어딜 봐서 할머니야!! 아이들 가르치는 학교 선생님한테 이게 무슨 막 되먹은 버릇이야!?”

좁은 택시 안이 쩌렁 쩌렁 울리도록 고함을 내지르는 통에 두 손 두 발 들어버린 택시 기사는 결국 택시비 1500원을 받고 서둘러 내려 주는 쪽을 택했다.

“젠장. 선생이면 오히려 모범을 보여야하는 것 아닌가? 나 원 참 동전 몇 푼에 더러워서… 캬악~ 퉤!!”

창문 밖으로 가래침을 내뱉은 기사는 손님이 채 내리기도 전에 엑셀을 힘껏 밟았다.

기사의 급출발 덕분에 넘어질 뻔한 선생은 겨우 중심을 잡으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어머, 어머머머!! 저런 미친놈을 봤나. 다들 봤어요? 어머~ 세상에 진짜 어떻게 자기보다 나이 든 사람한테 이럴 수 있지.”

하지만 택시 안에서 벌린 실랑이를 지켜본 상인들은 누구하나 선생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진짜. 약속을 잡아도 꼭 이런 곳에다가 불러서 사람 고생을 시켜요. 가만보자. 은하 다방이 어디야?”

시장 골목에 어지럽게 얽혀 있는 간판 중에서 지하로 표시된 낡고 지저분한 간판을 발견한 정옥분 선생은 손수건으로 입가를 가리며 건물 앞에 섰다.

“거기다 지하야? 용석이 어머님도 센스하고는…”

괜스레 축축하게 느껴지는 지하 계단을 통해 다방의 유리 문을 열고 안에 들어서자, 쌍화탕 냄새가 코끝에 진하게 풍겨왔다.

‘여기가 커피집이야 쌍화탕집이야?’

1990년대. 아직은 거리에 카페가 거의 없던 시절.

학부모와 선생의 만남의 장소는 이렇게 어두컴컴한 지하 다방이었다.

메뉴 역시 계란 노른자를 띄운 쌍화탕이나 잣이 올려진 십전대보탕. 커피 역시 분말 프림이 잔뜩 들어가 달달한 맛을 즐기던 때였다.

“혼자 오셨어요?”

“아뇨. 만날 사람이 있어요.”

“성함이 혹시…?”

“정옥분이요.”

“아, 먼저 온 손님께서 기다리고 계세요. 자리로 안내해 드릴게요.”

종업원을 따라 다방에 구석진 테이블로 걸음을 옮기자, 테이블에 앉아있던 학부모가 벌떡 일어나 선생님을 맞았다.

“아휴~ 선생님. 안녕하셨어요? 시장통 헤매느라 고생이 많으셨죠?”

“좀 그렇네요. 용석 어머님. 종업원? 여기 커피 한잔이요.”

“네. 알겠습니다.”

“아휴~ 제가 일이 바빠서 부득이하게 이쪽으로 모셨는데, 선생님께서 이해 좀 해주세요.”

“저기, 용석 어머님. 제가 전화로 말씀 드렸지만, 이번 피아노 대회에는 용석이 대신 다른 아이가 나가기로 이미 결정을 해서요.”

“아이~ 선생님. 제가 요새 자주 못 찾아뵈었다고 이러시는 거면 이렇게 사과드릴게요? 네?”

일을 하다가 서둘러 달려왔는지 허리에 걸친 돈 가방을 뒤적이던 용석이 엄마는 이내 두툼한 봉투를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눈가에 자글자글한 주름살을 그리며 돈 봉투를 바라보던 정옥분 선생은 마른 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흐음.. 용석 어머님의 마음은 충분히 알겠는데, 이번엔 저도 어쩔 수가 없으니 용석이가 한번 양보를 해주는 것이 좋을 듯한데…”

“우리 용석이가 그것 때문에 요새 피아노 학원에 얼마나 열심히 다니고 있는데요~”

“사실 그렇게 큰 대회도 아니라, 입상 한다고 해도 큰 의미는 없어요. 어머님.”

“그러니까요~ 우리 용석이 숫기가 없어서 오히려 그런 대회부터 천천히 입상을 하는 것이 더 좋을 거라고 피아노 학원 선생님이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선생님만 딱 믿고 있었는데…”

“다음에 또 좋은 기회가 오면 그때는 제가 꼭 용석이를 밀어 드릴 테니까. 이번엔 그냥…”

“다음? 다음 또 언제요. 그게 매달 열리는 행사도 아니고 1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대회일 텐데, 선생님~ 어차피 작은 대회라면서요. 별 이력도 되지 않는 대회라면 경쟁자도 그만큼 없을 거 아녜요? 그러면 차라리 저 말고 다른 쪽 아이 어머니를 설득 좀 해주세요~ 네?”

역시 시장 통에서 장사 꽤나 해온 분이라 그런지 사근 사근 말을 마친 용석이 엄마는 허리춤에서 또 다른 봉투 하나를 꺼내 올렸다.

봉투의 두께는 방금 전 올린 것과 비슷한 두께였다.

“용석 어머님도 참. 자꾸 이런 식으로 보채시면 어머님 보기 점점 껄끄러워 지는데…”

“선생님도 참~ 그저 우리 용석이 예쁘게 봐주셔서 제가 고마워서 드리는 거예요. 저얼대 다른 뜻은 없어요. 아시죠?”

“그야, 어머님께서 자식 교육에 워낙 관심이 많으시니까요. 일단 알겠습니다.”

정옥분 선생은 종업원이 오기 전 테이블 위에 올려진 두 개의 봉투를 한손으로 쓸어 자신의 가방에 넣어 두었다.

“제 성의 받아주시는 거죠? 선생님?”

“하는 수 없죠. 내일 학교에 출근하면 피아노 학원까지 다니는 아주 재능 있는 학생이 추천 제한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에 대해 교감 선생님께 건의 드려 볼게요.”

“아휴~ 감사합니다. 선생님. 정말 선생님 밖에 없어요~”

“호호호. 용석이가 아주 총명해서 저도 수업하기가 한결 편해요.”

“그런데 교감 선생님이 잘 처리해 주실까요?”

“걱정마세요. 피아노의 ‘피’자도 모르는 학생 하나가 있는데, 아니 글쎄 음악 선생이랑 조금 친하다고 추천을 받아서 덜렁 대회에 참가한 녀석이 하나 있거든요.”

“네에? 어머, 어머 그런 식으로 막 대회에 나가면 오히려 대회 질이 더 떨어지지 않을까요?”

“그러게나 말에요. 정말 용석이랑은 달리 골치 아픈 학생이라니까요.”

작게 한숨을 내쉬는 정옥분 선생님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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