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Ep.3 : 오만과 편견. (7)
코트를 벗어던진 젊은 베토벤이 가벼운 재킷 차림으로 피아노와 마주한 모습은 마치 미술 교과서에 나오던 세기의 명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가져다주었다.
그렇게 한동안 아가씨의 피아노 앞에 앉아 있던 베토벤의 새하얀 손은 곧 깃털처럼 사뿐히 건반 위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 순간. 정말로 마법 같은 일이 벌어졌다.
베토벤의 첫 음이 울려 퍼진 순간.
방 안 전체의 채도가 한 단계씩 내려가는 듯한 착각에 빠진 것이다.
‘이, 이건 말도 안 돼.’
구름이 태양을 가린 것도 아닌데, 곡의 특성만으로 이런 압도적인 분위기를 연출해내다니…
‘괴물이다….’
단지 이 말 말고는 눈앞에 그를 표현할 적절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번 연주만큼은 도저히 흉내 낼 수 없을 것만 같은 느낌.
한 순간이나마 베토벤의 비창을 완벽히 재연했다고 생각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 * *
“오~ 이것이 베토벤 선생의 피아노인가?”
“오늘은 주인님께서 컨디션이 아주 좋으신 모양입니다.”
“방금 전 연주도 제법 상당한 실력이라 생각했는데, 한 순간에 아이들 장난 수준으로 전락해버렸군.”
브로우닝 백작의 평가에 프란츠는 고개를 갸웃 거리며 한스에게 물었다.
“첫번째는 수잔 아가씨의 피아노인건 알겠는데, 두 번째는 누구지?”
“아마도 주인님을 따라간 소년의 피아노일 것입니다.”
“기절하겠군. 세 번째 피아노가 아니었다면 베토벤이 친 거라 해도 믿겠어…”
“그러게요.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하지만, 역시 오리지널이 다르긴 다르군.”
프란츠가 빈 찻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자, 곁에 있던 하인이 다가와 홍차를 따라주었다.
윗 층에서 울리는 피아노 연주에 맞춰 대리석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던 프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브로우닝 백작이 모르게 슬쩍 올라갔다.
‘이 자식. 가르치라는 아가씨는 안 가르치고, 누구에게 진짜 실력을 보여주고 있는 거냐….’
&
“그럼, 우리 수잔을 제자로 받아 주시는 겁니까?”
“제자와 같이 거창한 것은 아닙니다. 그저 아가씨의 피아노 실력 향상을 위해 조금 도와 드리는 것뿐입니다.”
“으음? 그게 그 말 아니오?”
베토벤은 자신의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브로우닝 백작이 참으로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프란츠는 그런 베토벤의 표정을 먼저 읽고선 특유의 유들유들한 말투로 브로우닝 백작을 이해 시켜야만 했다.
“그러니까, 제자인 듯 제자가 아니지만, 결론은 제자 같은 관계로군.”
아무래도 백작은 자신의 딸이 베토벤의 제자이길 너무나 바라는 눈치다.
하긴 그러는 편이 어느 연회에 참석하더라도 조금은 더 있어 보일 테니까.
어느새 산봉우리에 태양이 걸린 시간이다.
베토벤은 노인과 한 약속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대충 마무리 지었다.
“좋습니다. 수잔 아가씨를 저의 제자로 삼도록 하지요.”
“그럼~ 역시 그렇게 나오셔야지.”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그래 무언가?”
“여기 있는 이 아이 역시 아가씨의 레슨이 있을 때 같이 오게 될 것입니다. 마침 레슨실에 피아노가 두 대 있더군요. 함께 수업을 가르쳐도 되겠습니까?”
“아…”
베토벤의 말에 내내 말이 없던 민준이가 고개를 들어보였다.
브로우닝 백작은 그의 청에 턱 끝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곁에 있던 수잔이 베토벤을 거들었다.
“아버님. 저도 부탁드릴게요. 이 아이 역시 보통의 연주 실력이 아니었답니다.”
“오~ 나의 작은 새가 이렇게까지 부탁한다면 내가 들어줘야지~”
“배려에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아버님.”
“다들 저녁식사까지 함께 했으면 좋았을 텐데, 돌아가는 길이 바쁘다니 할 수 없군.”
그렇게 몇 마디 인사를 나누는 사이에 민준을 저택에 데려다준 마차가 정문 앞에 도착했다.
한스는 어린 민준의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끼우곤 단번에 마차 안으로 아이를 앉혀주었다.
“한스.”
“네. 주인님.”
“꼬마를 데리고 먼저 가보도록 해.”
“네에? 그럼 주인님은요?”
“나는 프란츠랑 함께 슬슬 걸어서 돌아갈 테니. 오늘 밤은 좀 걷고 싶군.”
그러자 슬슬 다음 차례로 마차에 오를 준비를 하던 프란츠 베겔러의 얼굴에 경악이 스쳤다.
“뭐? 내가 왜 너랑 같이 걸어가!?”
“전에 자네가 평소에 운동을 해두는 게 좋다고 하지 않았나? 시내까지 나와 함께 걸어가지.”
“그 먼 길을 언제 걸어가려고!?”
프란츠의 불만에 베토벤은 슬쩍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잔말 말고 같이 걷자면 좀 걷지? 네 부탁대로 브로우닝 가문의 피아노를 봐주게 되었잖아. 이런 식으로 나를 이용해 인맥을 넓혀가려는 것 내가 모를 줄 알고?”
“끄응… 알았다. 알았어.”
결국 베토벤에게 약점을 잡힌 프란츠는 거대한 4인승 마차를 포기하고 그와 함께 걷는 쪽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주인님. 정말 괜찮으세요?”
“프란츠가 있으니 걱정 할 것 없다. 어르신 저택까지 꼬마를 잘 부탁한다.”
“네, 알겠습니다.”
한스가 백작과 자신의 주인에게 인사를 마치고 마차 문을 닫으려던 찰나. 이를 지켜보던 수잔이 서둘러 마차에 다가왔다.
“민준. 또 와 줄 거지? 너무 자신에게 실망하지 마. 너의 연주 역시 굉장히 훌륭했으니까.”
하지만 수잔의 응원에도 불구하고 되돌아온 민준이의 대답엔 너무 힘도 실려 있지 않았다.
“고마워요. 수잔 누나.”
“누나라고…?”
마차 안에서 들려오는 남자 아이의 목소리에 브로우닝 백작이 쫑긋 귀를 세웠지만, 딱히 개의치는 않았다.
여느 꽉 귀족 가문과는 달리 브로우닝 백작은 다행히도 생각이 깨어 있는 사람이었다.
수년 전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지금은 딸 밖에 모르는 바보 아빠이긴 했지만 말이다.
손님들을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
브로우닝 백작이 자신의 딸에게 물었다.
“베토벤의 연주를 눈앞에 직접 들어보니 어떻더냐?”
수잔은 아버지의 말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전 오늘 두 명의 베토벤을 만난 느낌이에요.”
“뭐?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
“한쪽은 너무나도 찬란히 빛났고, 한쪽은 온 세상을 집어 삼킬 듯한 어둠 속에서 홀로 피아노를 치고 있더군요.”
브로우닝 백작은 알 듯 말 듯한 딸아이의 대답에 단지 고개만 갸웃 거릴 뿐이었다.
&
훅후르르르~
산중에서 해는 시내에서보다 빨리 진다.
아직 초저녁이건만 어두운 숲속에서는 벌써부터 부엉이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자신의 친구인 루트비히와 함께 터벅거리며 걷고 있던 프란츠가 답답함에 못이겨 먼저 입을 열었다.
“자~ 이제 이만큼 왔으면 말 좀 해 봐.”
“뭘?”
걷는 내내 생각에 잠겨 있던 베토벤은 프란츠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네가 이렇게 걷는 이유. 너 생각이 많을 때 산책하잖아.”
“흐음…”
“혹시 네가 데려온 그 꼬마 때문이야?”
그러자 베토벤의 고개가 조심스럽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두 번째 곡 이었던 너의 비창. 그 아이가 연주한 것 맞지?”
“그래. 맞아.”
“실력이 나쁘지 않던걸?”
프란츠의 칭찬에 베토벤이 피식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나쁘지 않았다고? 직접 그 방안에 있었으면 그런 소리 못했을 걸?”
“음? 그게 무슨 말이야.”
“그 녀석… 천재야. 정말 신이 내린 재능이지. 한 마디로 미쳤어.”
“그… 정도야?”
“내가 처음 비창을 작곡 했을 때의 느낌을 어디 한번 봐달라는 듯이 똑같이 재현하더군. 마치 그 아이 앞에서 벌거벗겨 지는 기분이 들 정도로 말이야.”
“허~ 네가 이렇게까지 누군가를 칭찬 하는 건 본적이 없는데? 어린 녀석이 대단하군.”
“오죽하면 그 아이가 연주를 시작하자마자, 창밖에 새가 지저귀더라니까?”
“이 무뚝뚝한 친구가 오늘은 어째 농담까지 다하고 오래살고 볼일이군.”
프란츠는 베토벤의 말에 웃음을 터뜨리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도 시내에 다다르기엔 너무나 먼 거리였으나, 하늘에 수놓은 수많은 별들을 바라보며 걷고 있자니 딱히 기분 나쁘진 않았다.
* * *
“꼬마야. 레슨 중에 무슨 일이 있었냐?”
마차 안에서 아무 말도 없자, 한스 아저씨가 불안한 듯 내게 물었다.
“아뇨. 아무 일도 없었어요.”
겉으로는 이렇게 이야기 했지만, 내 머릿속에는 아까부터 베토벤의 피아노가 계속해서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릿속에서 반복해 보아도 그의 피아노를 똑같이 흉내 낼 자신이 없었다.
온 세상의 모든 색채가 물 빠지듯 흐려지는 감각..
그가 자신의 피아노 연주를 마쳤을 때. 내 눈에 보인 세상은 온통 세피아 색이었다.
‘나로선 도저히 감당 할 수 없는 피아노였어.’
연주를 마친 베토벤의 차가운 눈초리와 마주 쳤을 때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나… 정말 이대로 계속 피아노를 칠 수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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