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Ep.3 : 오만과 편견. (4)
* * *
할아버지의 제안에 냉철한 성격의 베토벤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게 베토벤의 저택에서 돌아오는 길.
내 손을 꼭 잡은 채 대로를 걷던 할아버지가 거대한 성당 너머로 기우는 해를 바라보며 나에게 말했다.
“이제 슬슬 원래의 시간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구나.”
“아, 뭔가 아쉽다.”
“걱정 말거라. 너라면 분명 다시 이곳에 돌아 올 수 있을 터이니..”
그렇게 성당 십자가에 걸린 태양이 마지막 붉은 빛을 내뿜는 순간.
“허억!!”
마치 긴 잠에서 깨어난 듯. 나는 피아노 앞에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창밖에는 여전히 거대한 보름달이 오래된 피아노를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고, 잠시동안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할아버지를 찾았다.
“할아버지?”
“오냐. 잘 다녀왔느냐?”
위 아래로 고개를 끄덕이시며 할아버지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계셨다.
&
학교를 빠져나와 홀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1798년 빈에서 있었던 하루를 떠올리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거의 한나절을 그곳에서 보내었건만 현실에서의 시간은 한 시간정도 밖에 흐르지 않았다.
꿈을 꾼 것처럼 몽롱한 기분이었지만, 그 곳에서의 기억은 내 머릿속에 확실히 남아있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어제의 기억이 떠올리며 교실에서 건너편의 구교사 건물을 바라보았다.
다른 아이들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몰라도 적어도 나에게 만큼은 굉장히 신비로운 장소였기 때문이다.
“야, 차민준. 너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어?”
“응? 아니. 아무 일도 없어.”
“뭐야~ 얼굴은 싱글벙글 웃고 있는 주제에…”
짝꿍인 진아가 못마땅한 얼굴로 입술을 삐죽 내밀었지만, 어차피 사실을 말해도 믿어주지 않을 걸 알기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치사해.”
“진짜 별거 아니라니까.”
담임 선생님의 아침 조회가 있기 전까지 교실은 매우 시끄러웠다.
민석이와 근상이는 어제 새로 나온 아이큐 점프를 서로 먼저 보겠다고 싸우고 있었고, 교실 뒤에선 승우가 같은 축구부 소속인 민우랑 패스를 주고받고 있었다.
결국 참다못한 진아가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조승우!! 너 교실에서 축구공 갖고 놀면 위험하댔지!!”
퍼억~!!
진아의 말이 떨어진 순간 승우가 차올린 축구공이 보기 좋게 진아의 이마를 때리고 지나갔다.
통토동…
바닥에 축구공이 튕기는 소리가 들릴 만큼 쥐죽은 듯 고요해진 안에서 분노가 가득담긴 진아의 목소리가 울렸다.
“야… 조승우. 너어…”
“어억!! 천진반이 기공포 준비한다. 다들 피해!!”
“우와아아아~~!!”
그러자 민석이가 재빠르게 승우 앞을 가로 막으며 두 손가락을 이마에 가져다 대었다.
“도망쳐. 천진반 녀석은 나의 마광 광살포로 맞서주지.”
이 상황에서 저런 상황극을 펼치다니…
민석이 저 녀석은 나중에 뭐가 되도 크게 될 놈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의자에 기대어 시끌벅적한 교실 분위기를 바라보던 중 누군가가 내 앞에 다가왔다.
“너 피아노 대회 나가기로 했다며?”
“어…?”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다름 아닌 소희가 내 앞에 서있었다.
“응. 오수정 선생님께서 담임선생님 대신 추천서를 써주셨어.”
“곡은 정했니?”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 제 2악장.”
나의 대답에 소희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쇼팽의 즉흥 환상곡이 아니고?”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우선은 이 곡에 집중하기로 했어.”
“그렇구나…”
“너는 어때?”
“응? 뭐가?”
“너는 대회에 나가지 않을 거야?”
“아, 그게 나는…”
그때 교실 밖에서 망을 보던 친구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앗!! 선생님 오신다~!!”
그와 동시에 진아를 피해 교실에서 뛰어 놀던 아이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흩어져 자기 자리를 찾아 앉았다.
드르르륵.
언제나처럼 출석부와 함께 길고 단단해 보이는 몽둥이를 들고 오신 선생님은 출석부를 내려놓자마자 몽둥이로 교탁을 두드리며 말했다.
“반장. 인사.”
“차려어엇~!!”
아침이라 목이 덜 풀린 용석이의 삑사리에 아이들이 키득 거리자, 반장의 얼굴이 새빨게졌다.
탕탕탕.
“다시.”
“차려엇!! 선생님께 대하여 경례.”
“안녕하세요.”
“출석을 부르기 전에 한 가지 먼저 발표할게 있다.”
아침이면 항상 짜증 섞인 표정을 지으시던 담임선생님의 얼굴이 오늘은 웬일로 괜찮아 보이시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가?
“이번에 열리는 어린이 피아노 대회에는 우리 학급 대표로 소희가 나가기로 했다.”
으잉? 용석이가 아니라 소희가 나간다고?
갑자기 바뀐 명단에 용석이 마저 얼떨떨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선생님. 제가 아니라요?”
“용석이는 다음에 좋은 기회를 찾아보자꾸나. 부모님께는 선생님이 대신 말씀드리마. 그리고 소희는 오늘부터 우유급식 당번에서 제외되었으니. 어디보자… 아~ 그래. 민준이 앞으로 네가 하렴.”
“저 혼자서요?”
“그래.”
선생님의 목소리에는 어떠한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어렴풋이 예상은 했었지만, 나에 대한 선생님의 횡포가 최근 들어 더욱 심해진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우리 집은 선생님께 따로 촌지를 챙겨드릴 만 한 형편이 못되니까…
&
“얼씨구? 오늘은 혼자냐? 맨날 같이 우유 받으러 오던 여자아이는 어쩌고?”
“걘 이제 배식 당번이 아니라서요.”
그러자 우유 박스를 내어준 아저씨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이거 혼자 들고 갈 수 있겠냐?”
“해봐야죠.”
“그렇다고 애 혼자 보내다니, 너희 선생님도 참.. 아무튼 조심하거라.”
“네~엡!!”
플라스틱 박스의 손잡이를 붙잡고 허리 반동을 이용해 들어 올리자, 양팔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젠자앙~!! 겁나 무겁네!!’
그렇게 이를 악물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려는데,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내려 놔. 내가 같이 들어 줄게.”
“소희…?”
“손 조심해.”
“아, 응…”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온 소희는 묵묵히 반대편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여긴 어쩐 일이야?”
“도와주려고…”
“그러다가 걸리면 너도 나처럼 담임선생님한테 찍힐지 몰라.”
“친구가 어려울 때는 서로 도와주는 거라며? 전에 네가 그랬잖아.”
“아, 그건…”
“그리고 괜찮아. 아무래도 나만 널 도와주러 온 게 아닌 것 같으니까.”
“뭐?”
소희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진아를 비롯해 승우와 근상이가 뻘쭘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쟤들도 진짜.
뭔 우유 박스 하나 나르는데 이렇게 떼거지로 몰려왔담.
&
방과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
중간에서 흩어지는 슈퍼마켓 앞에서 우리들은 각자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달동네로 오르는 어귀에 소희네 집이 있었기에 나와 소희는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내심 오늘 아침 선생님의 말이 신경 쓰였던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너도 피아노 대회 나가더라?”
“응. 엄마가 한번 나가보라고 해서 작은 대회라도 좋은 경험이 될 거라며… 이미 반대표가 있다고 했는데, 어제 따로 선생님을 만나고 왔나 봐.”
그녀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소희네 집은 한눈에 봐도 엄청난 부자니까.
그런 소희에 어머니라면 담임선생님의 의도는 아마 단번에 알아 차렸을 것이다.
아마 용석이를 대신해 소희를 올리는 대신 그에 걸맞은 무언가를 요구 하셨겠지…
‘그래서 오늘 아침 그렇게 기분이 좋으셨구나….’
오늘 아침 선생님의 표정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소희가 나에게 물었다.
“너 피아노 연습은 하고 있니?”
“응? 아, 물론~”
“전에 네가 말했던 종이 건반으로?”
“아니. 오래된 피아노 한 대를 알게 되어서… 자세한건 비밀이지만.”
“비밀? 아무튼 제대로 된 피아노로 연습하고 있다는 거구나.”
“뭐,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아주 특별한 힘이 숨겨진 피아노긴 하지만…
그때 소희가 자신의 집앞에서 발걸음을 멈추더니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뭐야. 갑자기?”
“너도 그리고 나도 열심히 해보자는 뜻으로… 어때?”
“좋아. 서로 열심히 해보자.”
새하얀 소희의 손을 조심스레 맞잡은 나는 가볍게 그녀와 악수를 나누었다.
“힘내~”
“너도~!!”
소희와 헤어지고 가파른 언덕을 달리던 나는 신발주머니를 거세게 휘두르며 소리쳤다.
“야호~!!”
오늘 밤. 나는 다시 1798년의 오스트리아 빈으로 떠날 테니까..
베토벤이 과연 나를 제자로 받아줄지는 의문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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