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피아노-16화 (16/177)

[16] Ep.3 : 오만과 편견. (3)

&

“으잉? 주인님. 이 꼬마는 뭡니까?”

베토벤을 모시는 집사 한스는 자신의 주인이 데려온 동양인 꼬맹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이는 낯선 저택 안을 두리번거리다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곧장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어, 그래.”

일단 예의는 바르군. 이라고 한스는 생각했다.

주인님이 데려온 아이는 한 눈에 보기에도 꽤나 영특해 보이는 아이였다.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과 생글생글한 표정. 복장이 조금 특이하긴 했지만, 화려한 색감으로 장식한 귀족의 옷차림도 아니고, 빈민가 꼬맹이들의 더럽혀진 옷차림도 아니었다.

한스는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아이에게 물었다.

“넌 이름이 뭐냐.”

“차민준이요.”

“그게 다야?”

“뭐가 더 필요한가요?”

“아니, 됐다.”

적어도 귀족이 아니라는 걸 확인했으니 되었다. 한스는 아이를 거실 소파에 안내해주고 서둘러 자신의 주인을 찾아가 방문을 두드렸다.

“저기, 주인님?”

“잠시 혼자 있게 해주게.”

“어디 몸이라도 안 좋으신 겁니까?”

“잠시 후에 나갈테니, 내가 데려곤 아이 좀 돌봐 주겠나?”

“알겠습니다.”

최근들어 자신의 주인인 베토벤의 성격이 까탈스럽게 변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낀 한스는 더 이상 그를 자극하지 않았다.

29살의 젊은 음악가인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평민 출신이지만, 행동 하나하나에 여느 귀족 못지않은 기품이 서려있었고, 자신의 음악에 대한 자부심 또한 대단했다.

세기의 천재라 불리우던 모차르트가 죽고 7년이 흘렀다.

그의 사망 소식을 듣고 베토벤은 조금의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안타깝다.’라는 짧은 말을 남겼을 뿐.

어릴 적부터 모차르트와 자주 비교 되었던 그의 일생 동안 이곳 오스트리아 빈에서 단 한번 그와 마주친 적이 있었다.

5살 때부터 작곡을 하고, 8살에 교향곡을 만들었다는 세기의 천재.

하지만 실제 모차르트와 만나게 된 베토벤은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응당 예술가로서 가져야하는 품위와 자부심은 눈곱만치도 찾을 수 없었고, 매일 술과 도박에 빠져 하루도 제 정신인 적이 없었다.

즉흥적으로 써내려간 수많은 명곡은 여인내의 가슴골에 파묻혀 술값을 대신했다.

어쩌면 모차르트의 그러한 행동은 20대 초반의 베토벤에게 깊은 교훈을 주었을지 모르겠다.

난잡한 옷차림과 광기어린 웃음이 뒤섞인 주점에서 베토벤은 한 동안 그런 모차르트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단 한곡의 즉흥곡을 남기고 빈을 떠났다.

어머니께서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도 오직 모차르트를 만나기 위해 돌아가는 시기를 늦추었건만…

슬픔과 분노에 차오른 베토벤의 즉흥곡에 대해 당시 모차르트는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의 음악은 후세에 길이 빛날 것이다.-

후에 베토벤이 다시 빈을 찾았을 때. 모차르트는 급성 장티푸스로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이 위대한 음악가의 무덤은 전염병을 두려워한 나머지 인근 공동묘지의 커다란 구덩이에 그대로 버려졌는데, 당시 함께 버려진 시신들이 너무나 많아 아직도 그의 유해를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모차르트의 초라한 죽음 앞에서 베토벤 자신은 누구보다 청렴한 삶을 살아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운명’은 쉽게 그를 놓아 주지 않았다.

‘젠장… 젠장… 젠장… 젠장!!!’

한스를 돌려보낸 루트비히는 침대위에 몸을 웅크린 채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키이이잉!!!

아까부터 점점 더 고막을 파고드는 이명(耳鳴)에 숨죽인 비명을 내지르던 그의 등은 이미 식은땀으로 축축히 젖어 있었다.

“하아.. 하아…”

결국 서랍을 뒤져 진통제 한 움큼을 집어 삼키고 나서야 루트비히는 자신의 귓속을 파고드는 고통을 덜어 낼 수 있었다.

“돌아버리겠군.”

귀가 안들리는 작곡가라니, 세상에 이런 기구한 운명이 또 있을까?

약 기운에 취해 침대위에 멍하니 누워있던 루트비히는 괜스레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 하하하하~ 아주 걸작이야~”

이제야 비로소 아버지의 강압에서 풀려나 나만의 곡을 쓸 수 있게 되었건만…

빌어먹을 운명이란 나에게 참으로 잔혹하구나.

그때였다.

소리 없이 흐느끼던 젊은 작곡가의 귀에 마치 옥구슬이 건반위에 흐르는 듯한 청렴한 피아노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장난스럽게 반복되는 4마디의 전주가 무척이나 인상적인 피아노 연주와 함께 문 밖에서 한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이것 참 재미있는 곡이구나~”

“그쵸? 저도 참 좋아하는 곡이에요.”

“이 곡을 들으니 마치 조그만 강아지가 거실을 뛰어 노니는 듯 한 착각이 드는군.”

“어? 아저씨 어떻게 아셨어요? 이 곡의 제목이 강아지 왈츠인데?”

“뭐라구? 하하~ 제목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구나.”

강아지 왈츠?

침대 위에 누워있던 루트비히의 입가에서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과연 어린아이다운 작명 센스다.

피아노란 본디 귀족의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한 악기다.

따라서 모든 연주곡에는 응당 저마다의 기품과 진중함이 서려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런데 저 문 밖에서 들려오는 피아노는 어쩌면 저렇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것은 마치 그가 그토록 경멸했던 모차르트의 피아노와 닮아 있었다.

“말도 안 돼. 저토록 어린 아이가?”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저 아이의 피아노가 아주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돌이켜 보면 자신도 8살 때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으니까.

“이 세상에는 천재가 너무 많아. 정말 먹고 살기 힘들군.”

또 하나의 천재적인 감성을 지닌 소년의 출현에 루트비히는 땀에 젖은 머릿칼을 쓸어 넘기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레슨이랍시고 귀족 자제들의 쓰레기 같은 연주만 듣다가 저 아이의 피아노를 들으니 머릿속까지 맑아지는 듯하군.’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니 강아지 왈츠라는 아이의 연주가 더욱 또렷하게 들려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루트비히가 방문을 열고 나오자 한스가 서둘러 아이의 연주를 멈추었다.

“주인님 죄송합니다. 아이가 주인님의 피아노에 너무나 관심을 갖길래.”

“아냐. 나는 신경 쓰지말고, 계속하도록.”

평소라면 자신의 피아노에 손을 대는 것조차 발끈하던 주인이 오늘은 웬일로 이렇게 관대하실까? 한스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는 베토벤을 바라보며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꼬마.. 아니지. 차민준이라고 했나? 그래. 언제부터 누구에게 피아노를 배웠지?”

“네? 그게… 딱히 누군가에게 피아노를 배운 적은 없는데요?”

아이의 대답에 계단을 내려오던 베토벤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뭐?”

피아노를 배운 적도 없는 아이가 방금 전 같이 유연한 곡을 그토록 훌륭하게 소화해 내다니…

“방금 전 네가 친 곡. 강아지 왈츠라고 했나? 어디 다시 한 번 들려줄 수 있겠니?”

아이의 실력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건반을 누르는 빠르기와 정확도에서 티가 나기 마련이기에 루트비히는 아이에게 다시 한 번 같은 곡을 청했다.

“문제 없죠.”

위대한 음악가 베토벤의 부탁에 아이는 떨리는 손끝을 건반 위에 대었다.

그리고 고사리 같은 작은 손이 건반 위에 춤을 추는 순간.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머릿속에 한줄기 생각이 스쳤다.

‘이 녀석은… 진짜다.’

&

똑똑똑.

거침없이 울려 퍼지는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 속에서 차가운 노크소리가 울렸다.

“누구지?”

집사 한스는 때 아닌 불청객의 방문에 눈살을 찌푸렸다.

똑똑똑.

재촉하듯 또 한 번 울려오는 노크 소리에 민준의 피아노 마저 멈추자. 한스는 한숨을 내쉬며 두터운 저택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중절모를 쓴 노인이 모자를 벗으며 입을 열었다.

“혹시 이곳에 민준이라는 아이가 있습니까?”

“그렇소만, 누구십니까?”

“그 아이의 보호자입니다.”

“아~”

자신의 정체를 밝힌 노인의 말에 한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저택 안으로 노인을 들였다.

“어? 할아버지!!”

“이 녀석. 이런 곳에 숨어 있었구나.”

노인을 보자마자 반가운 듯 달려가는 아이의 모습을 보니, 루트비히는 한결 마음이 놓였다.

‘그저 빈민가 출신의 떠돌이는 아니었나보군.’

노인은 아이의 머리를 몇 번인가 쓰다듬으며 계단위에 있는 루트비히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아이를 돌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허락도 없이 이곳에 데려와 죄송할 따름입니다. 헌데 아이가 제법 훌륭한 실력을 갖추고 있군요.”

“그럴리가요. 당신에 비하면 아직 한참이나 부족한 실력입니다.”

“저에 비한다니 귀하는 제가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까?”

민준이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노인은 베토벤의 물음에 이렇게 대답했다.

“독설의 귀재. 오만한 피아니스트. 까칠한 완벽주의자. 그 누구도 당신의 레슨은 세 번 이상 버티지 못한다죠? 루트비히 판 베토벤.”

너무나 직설적인 노인의 평가에 한스는 헛기침으로 분위기를 환기 시켰다.

“하하.. 어르신 이거 갑자기 찾아오셔서 그런 말씀을 하시면…”

“제 말이 틀렸습니까?”

“아~ 그게 아주 틀린 말씀은 아닌데…”

“한스.”

“사실 그~렇게 까지 우리 주인님이 못 된 성격은 아니고, 그저 돌려 말하길 굉장히 싫어하시는 칼 같은 성격 덕분에 그런 소문이 난 것이 아닐까. 추측을…”

얼음 같이 차가운 루트비히의 목소리에 한스는 양미간을 좁히며 어쩔 줄 몰라했다.

노인과 그런 한스를 측은하게 바라보다가 루트비히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래서 말인데, 이 아이는 어떻습니까?”

“할아버지?”

“네?”

“당신만 괜찮다면 이 아이에게 당신의 피아노를 가르쳐 보는 것은 어떠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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