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Ep.3 : 오만과 편견. (2)
* * *
째각. 째각.
낡은 벽시계에서 들려오는 초침 소리. 하지만 남자는 아까부터 두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더 지났을까…
이윽고, 보다 못한 하인이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저기… 주인님?”
“잠시만. 아주 잠깐이면 돼.”
20대 후반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는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이며 자신을 재촉하는 하인의 입을 막아버렸다.
그들의 건너편 소파에는 자신의 불편한 심기를 온갖 표정으로 드러내고 있는 허트 백작이 입술을 꾸욱 깨물고 있었다.
그런 백작의 표정을 읽은 하인은 남자의 어깨 소매를 잡아채며 다시 한 번 재촉했다.
“주인니임~ 제발요…!!”
“후우~ 좋습니다. 제 소감을 말씀 드리죠.”
이윽고 눈을 뜬 남자는 자신의 검지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빙글 돌리며 양손을 깍지 끼었다.
그의 태도에 방금 전까지만 해도 폭발 직전이었던 허트 백작 부부와 그의 어린 딸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남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가씨의 피아노 실력은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오~ 그런가? 역시~!! 하하하~”
“네. 정말이지. 기대 이상으로 형편없더군요. 솔직히 깜짝 놀랐습니다.”
“뭐라고…?”
남자의 반전 어린 혹평으로 허트 백작의 표정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그러자 남자의 곁에 서있던 하인의 얼굴 근육이 미소 지은 채 천천히 굳어져 갔다.
“하하, 주인님…? 제가 전에도 언어를 조금 순화 시키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말씀 드린 적이 있었는데, 기억 안 나시나 봐요?”
“무슨 소리야. 재능이 없는 걸 없다고 하지. 그럼 있다고 해? 그럼 저 아가씨는 자신이 피아노에 재능이 있는 줄 알고 죽도록 매달릴 거 아냐? 그야말로 돈과 시간의 낭비지.”
남자의 평가에 백작 부부의 어린 아가씨는 눈물을 글썽이며 자신의 방으로 달려가 버리고, 냉랭한 분위기 속에서 허트 백작이 입을 열었다.
“내 돈과 시간을 아껴주어 너무나 고맙군. 빌어먹을 예술가 양반.”
&
다그닥. 다그닥.
울퉁불퉁한 돌길 위에 마차 바퀴가 굴러가며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마차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던 남자가 맞은편에 앉아 있는 자신의 하인에게 물었다.
“지금 몇 시지?”
“오후 1시가 조금 지났습니다. 점심식사는 어떻게 할까요?”
“별로 생각이 없네.”
“그러시겠죠. 허트 백작의 저택에서 몸 성히 나오신 것만으로도 다행입니다.”
“잠시 바람을 쐬고 싶군. 먼저 돌아가게.”
남자의 말에 하인은 마부에게 마차를 잠시 멈출 것을 요구했다.
히이힝~
거친 말울음 소리와 함께 마차가 멈추자, 남자는 문을 열고 바닥에 내려섰다.
“일단 식사준비는 해두라고 전하겠습니다. 주인님.”
“마음대로 하게.”
가벼운 채찍 소리와 함께 마차가 떠나자, 남자는 긴 한숨을 내쉬며 반대편으로 발길을 돌렸다.
오스트리아 빈.
음악의 도시로 유명한 이곳은 젊은 음악가들에겐 기회의 땅이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거리 곳곳에는 떠돌이 악사들로 넘쳐 났는데, 남자의 귀에는 그들의 모든 연주가 누군가를 향한 구걸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은 남자에겐 상당한 불쾌함으로 다가왔다.
끼이이잉~~ 끼깅~
어딘선가 들려온 바이올린의 미숙한 보잉 소리에 남자는 표정을 찡그리며 양쪽 귀에 손을 가져다 댔었다.
최근 들어 귀가 점점 안 좋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방금처럼 날 선 소리라던가 대장간을 지날 때 쇠붙이를 갈아내는 소리를 들으면 고막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파왔다.
의사는 단순히 신경성이라고 했지만, 남자는 의사를 믿을 수 없었다.
‘돌팔이야. 젠장. 서둘러 다른 병원을 찾아봐야겠어.’
잠시 후. 안정을 되찾은 그가 세차게 고개를 내저으며 몸을 일으키려는데, 눈앞에 조그만 신발이 보였다. 때 묻은 아이의 신발은 굉장히 독특한 디자인이었다.
“응…?”
“아저씨 괜찮아요?”
아이의 유창한 독일어 발음에 기분이 좋아진 남자가 한쪽 입 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들자 똘망똘망한 표정의 동양인 아이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동양인?”
이토록 완벽한 독일어를 구사하는 아이가 이국인이라니…
남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괜찮으세요?”
“아, 그래… 잠시 어지러웠을 뿐이란다.”
“제가 집까지 부축해드릴까요?”
“괜찮다니까.”
“정말요? 아저씨 귀에서 피가 나는데…?”
“뭐!?”
아이의 말은 사실이었다.
손가락을 귓구멍에 대어 보자 진득한 피가 소량이지만 묻어 나왔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역시 그 의사 돌팔이였어. 신경성은 얼어죽을…
무릎에 힘을 주고 몸을 일으키니 동양인 꼬마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꼬마야. 이곳에서 무얼 하는 것이냐?”
“음악을 듣고 있어요.”
아이의 말에 주변을 둘러보니, 거리의 악사들 모두 제각각 자신의 연주에 몰두해 있었다.
“정확히 누구의 어떤 음악을 듣고 있는 거지?”
“그냥 전부 다요. 오늘은 할아버지가 그래도 된다고 했거든요.”
“할아버지?”
보통 대화의 맥락을 알 수가 없는 아이다. 하지만 아이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거리를 둘러보며 웃고 있었다.
거짓말을 하고 있진 않은 것 같은데, 하나의 연주에도 집중 할 수가 없는 이 시끄러운 광장에서 이 아이는 어쩜 저리도 평안한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남자는 팔짱을 낀 채로 잠시 아이를 내려 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꼬마야. 넌 이름이 무어냐?”
“차민준이요.”
“챠민…쥰…? 그게 다냐?”
“네.”
성이 없는 걸 귀족 집안의 아이는 아니었다. 어쩌면 빈민가 출신의 아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빈민가 출신의 아이라면 이렇게 편하게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이도 없었다.
“아저씨는 이름이 뭔가요?”
“루트비히.”
“와아~ 멋진 이름인데요? 그런데 그게 다인가요?”
… 볼수록 건방진 꼬맹이다. 방금 전에 자신이 내뱉을 말을 그대로 돌려주다니.
남자는 피식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풀네임을 밝혔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
그러자 자신을 바라보던 아이의 표정이 돌변했다.
“아아…!!!”
“왜… 왜 그러냐?”
“아아!!!”
“뭐.. 뭐냐.”
“베토벤~!!! 우와!! 내가 베토벤을 만났어!!”
광장 한복판에서 울린 아이의 외침에 거리를 지나던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남자에게로 꽂혔다.
“이 녀석아. 갑자기 무슨 짓이야.”
루트비히는 깜짝 놀라 재빨리 아이의 입을 틀어막았다.
“읍!! 으읍!!”
그러나 아이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남자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사람들의 시선이 점점 수상쩍게 변하자, 참다못한 루트비히는 아이를 이끌고 서둘러 광장을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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