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Ep.2 : 천재의 발현(發現) (3)
‘이런 분위기에는 역시 이 곡이 좋겠지?’
루드비히 판 베토벤의 비창 제 2악장.
아다지오 칸타빌레…
아다지오(adagio)란 안단테와 라르고 사이의 느린 빠르기를 일컫는 말이다.
비슷한 말로는 아다지에토(adagietto)라는 아다지오 보다는 아주 약간 빠르게, 아다지오 아사이(adagio assai) 아다지오보다 아주 약간 느리게 같은 용어가 있다고 음악 선생님께 들은 적이 있다.
그중에 아다지오 칸타빌레(adagio cantabile)란 ‘느리게 노래하듯이’라는 뜻으로 부드럽게 연주하는 것이 포인트다.
마치 밤하늘의 달빛이 온 세상을 어루만지듯…
창밖의 은은한 달빛이 피아노 위를 비추고, 나는 두 눈을 감은 채로 점점 베토벤의 비창에 심취해가고 있었다.
쇼팽의 녹턴이 새벽빛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서정적인 느낌이었다면, 베토벤의 비창은 듣는 이로 하여금 가슴이 먹먹해지는 슬픔이 서려 있었다.
똑같이 서정적인 느낌임에도 완전히 다른 두 작곡가의 성향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고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의 비창은 너무나 아름다운 곡임에 분명했다.
비창은 2악장은 곡의 분위기를 크게 세부분으로 나눌 수 있었는데, 1부에선 아다지오라는 설정에 맞게 느린 템포로 아름다운 선율로 곡의 전체 분위기를 만들어가며 이어서 애틋한 분위기의 2부로 들어서면 템포가 살짝 빨라지며 세잇단 반주가 들어가 곡의 긴장감을 살짝 끌어 올려준다.
그리고 마지막 3부에서는 2부에서 이어진 세잇단 반주와 1부의 주제 선율이 하나로 합쳐지며 ‘노래하듯이’라는 뜻의 ‘칸타빌레’가 이루어지는 구조였다.
청중 하나 없는 낡은 음악실 안.
나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비창을 끝까지 연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것은 짧은 내 생에 있어 가장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다, 다쳤다. 아니, 그보다 이 피아노 소리가 엄청 좋잖아?”
구교사의 그랜드 피아노는 소희네서 만졌던 업라이트 피아노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차원이 다른 소리의 깊이를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이런 창고와 다를 게 없는 곳에서 몇 년 동안 방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율까지 완벽히 이루어져 있었다.
방금 전까지 묵직한 건반을 내리누르던 손가락은 아직도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려왔다.
‘그런데 이토록 아쉬운 느낌은 대체 뭘까…?’
베토벤의 비창 2악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주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나에 대한 의문이었을 지도 모른다.
‘나는 과연 베토벤의 비창을 완벽히 연주한 것일까?’
완벽.
클래식 연주에서 완벽이란 단어는 어쩌면 있을 수가 없는 단어이다.
그것은 곡을 만들어낸 작곡가가 아니면 불가능한 영역이니까.
안단테(andante)와 아다지오(adagio), 라르고(largo) ‘느리게’라는 템포에서만 벌써 이토록 많은 표시가 있다.
그리고 이 안에서 또다시 세분화된 표시가 있는 만큼 클래식 연주에서 작곡가의 의도를 100% 채울 수 있는 완벽한 연주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방금 연주를 마친 비창 2악장에 대해 굉장히 아쉬운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1부의 템포를 좀 더 느리게 가볼까? 아냐. 어쩌면 3부의 칸타빌레가 너무 약했을지도 몰라 조금 더 반주의 템포를 끌어 올렸더라면….’
혹시나 할머니가 잠에서 깨시기 전에 딱 한곡만 치고 재빨리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그때였다.
“베토벤의 비창 2악장이라… 오늘 같은 날에 나쁘지 않은 선곡이군.”
“헉!!”
진심 뒤로 나자빠질 만큼 놀랐다. 대체 언제부터 있었던 거지?
피아노를 치기 전까지 분명 아무도 없었는데?
역시 이곳에는 귀신이 살고 있었던 거야…
“갑자기 말을 걸어 놀랐나보구나? 안심해라 귀신은 아니니.”
“네?”
일단 귀신이 아니란 말에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낯이 익은 할아버지 한 분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푸른색 와이셔츠에 어깨에 매달린 은색 호루라기 줄. 그리고 짙은 남색 모자위에 쓰여진 ‘수위’ 라는 글귀에 나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가가멜!?”
“음? 가가멜…? 그게 무엇이냐.”
“네? 아, 그게 만화 스머프에 나오는 요정들을 잡아먹는 나쁜 마법사인데…”
“그 나쁜 마법사가 나와 무슨 상관이냐?”
… 아, 네. 그러게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왜 수위 할아버지 별명이 가가멜인지는 모르겠네. 그냥 다들 그렇게 부르니까 불렀을 뿐인데…
할아버지는 음악실 문앞에 서서 묵묵히 나를 바라만보고 있었다.
어색한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나는 우선 자리에서 일어나 할아버지께 사과를 드렸다.
“죄송합니다.”
“이번엔 대뜸 사과를 하는구나.”
“허락 없이 구교사에 들어왔고, 또 할아버지를 별명으로 불렀으니까요.”
“아~ 그 가가멜이라는 것이 내 별명이냐? 재미있구나.”
가가멜이라는 소문답게 불같이 화내실 줄 알았는데, 오히려 수위 할아버지는 끌끌 혀를 차며 인자하게 웃어 보이셨다.
어라? 이건 생각했던 거랑 조금 다른 전개인데?
긴장이 조금 누그러진 탓일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는 쭈뼛 고개를 들어 할아버지께 물었다.
“혹시. 전에 제가 이곳에 들어왔을 때도 말을 거신 게…?”
“그래. 나였다. 그때 참 재미있게 도망치더구나?”
“죄송합니다.”
“괜찮다. 나도 축구공이 안에 들어갔다 길래 찾으러 왔을 뿐이었으니까.”
“감사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이냐?”
“네? 아, 그게… 피아노가 치고 싶어서.”
“이 밤에 몰래? 너 부모님께 허락은 받고 온 것이냐?”
“부모님은 안 계세요. 할머니랑 살고 있는데, 허락을 받고 나온 건 아니에요.”
“솔직하구나.”
“담임 선생님께는 이르지 말아주세요. 아마 반성문 100장 쓰는 것도 모자라 1년 내내 교실 청소를 해야 할지도 모르거든요.”
“호오… 그것 참 큰일이로구나. 알았다. 대신 내 질문에 하나만 대답해 준다면 선생님께 알리지 않으마.”
할아버지의 날카로운 눈을 바라보니 쉬운 질문은 아닐 것 같은데?
하지만 달리 방도가 없기에 나는 조심스레 할아버지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뭔데요…?”
“방금 전 비창 2악장을 연주하고 나서 무슨 생각을 했지?”
“제 생각이요?”
“그래. 이번에도 솔직하게 대답해주길 바란다.”
할아버지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돌려 피아노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그곳에는 푸르스름한 달빛을 받은 오래된 피아노 한 대가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베토벤이요.”
“베토벤?”
“네. 제가 연주한 비창 2악장이 과연 작곡가 베토벤이 의도했던 실제 연주와 일치 했을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왜 그런 생각을 했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비창을 듣다보면 저도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굉장히 서글퍼지는 걸요.”
할아버지는 나의 대답에 입가에 주름을 좁히며 되물었다.
“마음이 서글퍼진다고?”
어쩌면 이런 느낌은 내가 타인의 생각을 들을 수 있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었다.
위대한 작곡가들의 연주를 듣다보면 아주 부분적으로 나마 그들의 감정이 흘러 들어 올 때가 있었으니까…
스스로에게 점수를 매겨 보자면 방금 전의 내 연주에서 작곡가의 감정이 이입 된 것은 거의 절반 수준 밖에 되지 않았다.
“너 이름이 무어냐?”
“4학년 6반. 차민준이요.”
“음… 알았다.”
“설마 선생님께 알리실 건가요? 전 솔직히 대답했는데.”
“알리지 않으마. 네 말에 한 치의 거짓이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 이번엔 이 할애비 말을 믿어 주겠니?”
“무슨 말씀인데요?”
“내가 보기에 너는 보통 아이들과는 다른 조금 특별한 감각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구나.”
수위 할아버지의 말에 깜짝 놀란 나는 나도 모르게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여전히 인자한 미소를 지으신 채 피아노 쪽을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그리고 저 피아노는 보통 피아노와는 다른 조금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단다.”
“특별한 힘이요?”
“그렇단다.”
확실히 소희네 피아노에 비해 월등히 좋다는 것은 방금 전에도 느꼈지만, 지금 할아버지가 말씀하시는 힘이란 단지 음의 깊이나 울림과 같은 단순한 것이 아니란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게 뭔가요?”
“오늘은 시간이 너무 늦었구나. 할머니께서 걱정하고 계시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거라.”
마치 할머니가 잠에서 깬걸 알고 있는 것처럼 할아버지는 내 머리에 손을 얹으시곤 빙긋 웃어 보이셨다.
“돌아가 할머니께도 솔직하게 말씀 드리렴. 그리고 정식으로 허락을 받아 이곳에 다시 오거라. 그렇다면 너에게 저 피아노의 비밀을 알려주마.”
피아노의 비밀…?
내 머리 위에 할아버지가 손을 거두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피아노를 바라보았다.
쿠웅.. 쿠웅.. 쿠웅.. 쿠웅..
마치 살아 움직이는 무언가처럼 칠흑빛의 피아노 안에서 심장의 고동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할아버지. 할머니께 허락 받아서 꼭 다시 올게요.”
“그래. 기다리마.”
들어왔던 길을 다시 돌아 소각장 쪽으로 내려온 나는 학교 정문을 넘고난 뒤 고개를 돌려 구교사 쪽을 바라보았다.
푸르스름한 불빛이 3층에서 번쩍이는 걸 보아 아직 할아버지가 안에 계신 모양이었다.
잠시 그 불빛을 쫓던 나는 벅차오르는 감정에 빙긋 웃음을 지으며 힘차게 달렸다.
한숨도 쉬지 않고 집까지 뛰어올라오니 우리집 유리창에 형광등이 밝게 켜져 있었다.
“할아버지 말대로 할머니가 잠에서 깨셨구나.”
갑자기 사라진 탓에 걱정이 크시겠지…
나는 잠시 집 앞에서 마른 침을 삼킨 뒤 천천히 현관 문 고리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솔직하게 말씀 드리자. 내가 잘못한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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