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Ep.2 : 천재의 발현(發現)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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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롱~ 도롱~ 도로로롱~
옆에서 들려오는 할머니의 코고는 소리가 평소보다 많이 안정 되어 있었다.
아마도 희경이 누나가 준 파스가 제법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사실 아까부터 몇 번이나 잠자리를 뒤척여 보았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건반을 두드리던 손끝의 감각.
소희네 집에서 처음 쳐본 피아노 건반의 감각이 아직도 손끝에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정말 날아갈 듯이 가벼운 건반이었어.’
가로등 불빛이 창문으로 새어 들어와 어스름한 방안에서 나는 가만히 내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다.
천천히 보이지 않는 건반을 두드리던 손이 점차 빨라지고 어느 새 나의 손가락은 즉흥 환상곡의 마지막 부분을 연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의 마음은 더욱 허전해져만 갔다.
아예 끝까지 연주라도 했다면 이토록 갈망하진 않았을 텐데…
연주를 중단에 멈춘 것이 너무나 후회될 만큼 오늘 밤은 영 잠이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마치 소풍가기 전 날의 싱숭생숭한 기분처럼 말이다.
‘할 수만 있다면 한 번 더 쳐보고 싶어. 내일 소희에게 한번 부탁해볼까?’
다음 날.
새벽녘이 되어서야 깜빡 잠이 들었던 나는 할머니가 챙겨주신 도시락을 들고 집을 나섰다.
“배탈 안 나게 밥 꼭꼭 씹어먹고~”
“후아아암~ 할머니 저 다녀올게요.”
“그려, 그려.”
골목 계단을 다 내려올 때까지 집 앞에서 나를 바라보시는 할머니에게 다시 한 번 손을 흔들어 준 나는 학교로 향하는 아이들의 행렬에 섞여 걷기 시작했다.
“민준이 학교가니?”
집 근처의 구멍가게 아저씨가 가게 문을 열다가 나를 발견하곤 반갑게 인사를 걸어주셨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아따~ 이 녀석 오늘도 목소리가 똘망 똘망하구나.”
두평 남짓한 공간에서 주로 담배나 사탕을 파는 아저씨는 종종 나에게 캬라멜이나 사탕을 선물로 주시곤 했다.
“자~ 이따 배고플 때 친구들이랑 나눠 먹거라.”
“감사합니다. 아저씨~”
갈색 종이 박스에 담긴 밀크 캬라멜.
상자를 밀어내면 투명 기름종이에 곱게 싸인 8개의 캬라멜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내 볼을 잡아당기며 싱글 벙글 웃는 아저씨를 보니 뭔가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보다.
“아저씨.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그럼~ 있지.”
“어? 뭔데요?”
“그게 어제 집사람이랑 밤에 말이지… 아~ 내가 지금 애한테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애들은 몰라도 된다. 학교 늦겠다. 얼른 가봐라~”
“아, 네.”
아저씨랑 아줌마랑 밤에 좋은 일이 있으셨나보구나..
아저씨에게 받은 캬라멜 박스를 주머니에 넣고 가파른 달동네 언덕을 내려오자, 멀리 소희네 집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서 학교까진 비교적 가까운 거리라 천천히 걸어가도 될 것 같았기에 나는 아저씨에게 받은 캬라멜 하나를 조심스레 까서 입안에 넣었다.
달콤한 캬라멜 향기가 입안에 가득 퍼지자, 나도 모르게 입가에 하나 가득 미소가 번졌다.
‘그러고 보니 어제 소희네 집 장난 아니었지….’
거실에 들어선 순간 보이는 수많은 방문들.
심지어 피아노가 설치된 방이 우리집보다 넓었으니까. 아마도 소희네 집은 굉장한 부자가 아닐까 싶다. 그러고 보면 종종 놀러가는 승우네집도 만만치 않지.
어쩌면 내 친구들 중에서는 우리집이 가장 작을 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굳이 그런 것을 따지지 않아도 우리들이 서로 친한 친구임에는 변함없으니까. 딱히 신경 쓰이진 않았다.
“민준아.”
“어? 소희야. 안녕~ 여기서 뭐해?”
“아, 나도 지금 막 학교 가려고 나온 참이야.”
“오올~ 오늘은 지각 안하겠는데?”
“으, 응.”
여전히 내성적인 그녀의 반응에 나는 주머니에서 캬라멜 하나를 꺼내 소희에게 내밀었다.
“먹을래?”
“이게… 뭐야?”
“으잉? 캬라멜을 몰라?”
“캬라멜? 처음 들어보는데?”
아니 무슨 이런 황당한 일이…
하지만 잠시 생각을 정리해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잣집 아이들 중에는 캬라멜 같은 불량 식품을 못 먹게 하는 부모님도 있다고 했으니…
하지만 이렇게 달콤한 걸 한번도 못 먹어 봤다니 그건 좀 너무 하단 생각도 들었다.
“한 번 먹어 봐. 맛있어~”
“그럴까?”
내 손안에 있는 캬라멜을 집어든 소희는 요리 조리 종이를 뜯어낸 뒤 조심스럽게 입안에 넣었다.
“음… 와아~ 엄청 달아.”
“그치?”
만족해하는 소희의 반응에 뿌듯해진 나는 소희의 손을 붙잡고 학교로 향했다.
“가자.”
얼굴이 빨개진 채 내 손에 이끌려 걸어오던 소희는 한쪽 볼을 오물거리며 환하게 웃어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학교 어귀로 접어드는 대로에서 내 손을 잡고 있던 소희가 나에게 물었다.
“민준아. 너 혹시 예전에라도 피아노 배운 적 있어?”
“피아노? 아니~ 한 번도 없는데?”
“하지만 너 어제 피아노를 쳤었잖아. 쇼팽의 즉흥환상곡…”
“아~ 그거? 그게 왜?”
“왜라니. 어떻게 아무한테도 배우지 않고 그 곡을 한 번에 칠 수 있었어?”
“한 번에 친 게 아냐.”
“뭐…?”
“연습했어. 손가락에 쥐가 나도록.”
“그게 무슨 소리야?”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춘 소희에게 나는 조금 창피했지만, 내가 사용하는 종이 건반에 대해 알려주었다.
“종이에 그린 피아노 건반으로 연습을 했다고?”
“응…”
나의 대답에 소희의 커다란 눈망울이 흔들렸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오늘 학교 끝나고 한 번 더 피아노를 쳐볼 수 없을까?”
“미, 미안. 오늘은 레슨이 있어서…”
“아~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소희는 잡고 있던 손을 슬그머니 빼내며 내 시선을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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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차민준.”
“또 왜?”
선잠을 잔 탓에 아침 조회가 끝나고 한 숨 자려는데, 진아가 나를 불렀다.
“너 혹시 구교사에 또 들어간 적 있어?”
“으응? 내가 거길 왜 또 들어가?”
“최근에 이상한 소문이 들려서…”
“무슨 소문?”
“다른 반에서 들었는데, 구교사에서 밤마다 이상한 소리가 들린데…”
“이상한 소리?”
“응. 듣기로는 피아노 소리 같다는데? 뭔가 쿵쾅거리는 소리도 들리고…”
“피아노?”
“너 그때 공 주우러 들어간 곳이 음악실이라고 그랬지?”
“응. 그렇긴 한데. 그때는 그냥 먼지 쌓인 음악실이었는데…”
“흐음… 아무튼 너는 안 들어갔다 이거지?”
“그렇다니까.”
팔짱을 낀 채 표루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 자기가 무슨 탐정이라도 된 모양이다.
그런데 다른 건 다 제쳐두고서라도 피아노 소리라니…
나는 승우의 축구공을 찾으러 구교사에 들어갔던 그날을 떠올려 보았다.
매케한 먼지 냄새와 뻑뻑하게 느껴졌던 오래된 피아노 건반..
소희의 피아노 건반이 날아갈 듯이 가벼운 건반이었다면 구교사의 피아노는 굉장히 묵직해서 빠른 소리를 내기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그렇게 오래된 피아노는 대체 어떤 소리를 낼까?’
쿵.. 쿵쿵.. 쿵쿵.. 쿵쿵..
구교사의 피아노를 떠올리자, 어제 새벽에 느꼈던 설레임과 손끝에 감각이 천천히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피아노가 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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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롱… 도롱..
초저녁부터 일찍 잠이 드신 할머니의 코고는 소리가 울리자, 나는 몰래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재 시간은 오후 11시 38분.
학교에 도착하면 자정 즈음이 될 거 같은데…
설마 또 그 목소리를 듣게 되는 건 아니겠지?
‘그래 생각해보면 민석이 말대로 이 세상 귀신이 어딨겠어~ 내가 잘 못들은 거겠지.’
애써 자신이 들었던 진실을 외면하고 싶을 정도로 피아노를 치고 싶었던 나는 할머니가 잠에서 깨지 않게 조심스레 옷을 챙겨 입었다.
마지막으로 방문을 살짝 열어 현관을 빠져 나온 나는 늦은 밤 차가운 바람에 몸을 웅크린 채 서둘러 학교 쪽으로 달렸다.
삐이익… 삐익..
굳게 잠긴 정문을 타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이미 한 번 경험해 보았으니까.
미리 생각해 두었던 대로 소각장으로 향한 나는 구교사 입구인 2층 창문 난간에 도착했을 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드르륵…
“으잉?”
이 창문이 이렇게나 쉽게 열렸던가?
분명 전에는 있는 힘을 다해 삐걱 거리는 문을 잡아 당겼던 걸로 기억하는데…
마치 기름칠이라도 해둔 것처럼 2층 난간의 창문이 미끄러지듯 열렸다.
그때 구교사 끝에서 새하얀 불빛이 움직이는 걸 느낌 나는 서둘러 구교사 안으로 몸을 숨겼다.
‘어떻게 된 건지 영문을 모르겠지만, 일단 들어오긴 했구나….’
생각보다 너무 쉽게 들어왔지만, 뭔가 이상한데?
캐캐 묵은 먼지 냄새도 전보다 줄어든 느낌이고, 진아 말대로 정말 구교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설마 이 고생을 해서 들어왔는데 음악실에 피아노가 사라졌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불길한 마음을 한쪽 가슴에 고이 접어둔 채 서둘러 발걸음을 옮긴 나는 곧장 3층으로 올라가 음악실 앞에 섰다.
‘좋아 이 문만 열어젖히면 달빛에 비치는 먼지 쌓인 피아노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오늘이야 말로 제대로 쳐본다.’
달칵.
차가운 손잡이를 시계방향으로 돌리자, 나무문이 삐걱 거리며 음악실 내부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순간… 깨진 유리창 사이로 펄럭이는 커튼 아래 묵묵히 나를 기다리고 있는 장엄한 피아노 한 대가 내 눈에 들어왔다.
달빛에 새하얗게 빛나는 오래된 그랜드 피아노.
하지만 그때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음악실 내부였다.
“누가 들어와서 청소라도 한 건가?”
각종 집기로 어질러져 있던 피아노 주변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가까이 다가가보니 피아노마저도 먼지 한 톨 없이 잘 닦여 있었다.
역시 소희집에서 보았던 업라이트 피아노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박력 넘치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저절로 침이 꼴깍 삼켜졌다.
‘아, 맞다. 귀신!!’
전에 들었던 목소리를 쫓아 서둘러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역시나 음악실 안에는 나 혼자 뿐이었다.
“후우… 좋았어.”
양 손바닥을 비비며 피아노 앞에 선 나는 전과 같이 건반 뚜껑을 열어젖히고 의자에 걸터 앉았다.
이번에야 말로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나만의 피아노를 칠 수 있다는 생각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던 나는 양 손가락 끝을 서로 마주댄 채 천천히 심호흡을 하였다.
창가에 새어 들어오는 서늘한 달빛 아래.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나는 머릿속에 담긴 수많은 악보들 중 하나를 꺼내어 천천히 건반 위에 손가락을 올려 두었다.
처음에는 즉흥 환상곡을 연주하고 싶어 이곳을 찾아왔지만, 막상 피아노 앞에 앉으니 다른 곡이 떠오르네…
‘이런 분위기에는 역시 이 곡이 좋겠지?’
루드비히 판 베토벤의 비창 제 2악장.
아다지오 칸타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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