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피아노-7화 (7/177)

[7] Ep.2 : 천재의 발현(發現) (1)

* * *

끼리릭.

자동차의 사이드 미러를 채우는 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

좁은 골목길의 저택 앞에 겨우 주차를 마친 그는 와이셔츠 주머니에서 구겨진 담배갑을 꺼내 그중에 한가치를 입에 물었다.

“후우~ 모처럼 레슨 쉬는 날인데, 하필 내일 강의에 필요한 연구 노트를 두고 가다니. 아이구~ 내 팔자야.”

부싯돌을 튕겨 담배에 불을 붙인 그는 뉘엿뉘엿 저무는 석양을 바라보며 길게 흰 연기를 내뿜었다.

석동철.

서른넷이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음대 교수가 된 그는 소희의 아버지와 어려부터 죽마고우였다.

친구의 부탁으로 딸의 피아노를 봐주고 있었지만, 소희는 가능성은 어느 정도 보였지만 피아노에 그다지 흥미가 없어 보여 걱정이었다.

“역시 내가 없는 날은 피아노 소리가 들리지 않는군.”

차에 기대어 담배를 깊게 빨아들인 동철은 쓴웃음을 지으며 좌우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조만간 친구인 희철이를 만나면 소희의 레슨을 그만 두는 것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전 할 생각이다.

이대로라면 아마 소희가 어린 나이에 큰 상처를 받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녀석도 부모가 되니 어쩔 수 없군. 자식 교육에 욕심만 많아져선….’

그 때였다.

데엥~

저택에서 묵직한 피아노의 건반음을 시작으로 다소 우울한 전조가 흐르더니, 이윽고 손가락 마디가 날아다니는 듯 한 환상적인 피아노 연주가 시작되었다.

“뭐, 뭐야?”

쇼팽의 작품번호 66번.

일반인들에게 ‘즉흥 환상곡’이라 불리 우는 이 곡은 좌우 엇박자가 심한 곡이라 현재 소희의 실력으로는 이렇게 정확히 음을 배분하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이 앞섰다.

아니지. 그걸 제쳐두고서라도 자신이 다니는 대학에서 쇼팽의 즉흥환상곡을 이만큼이나 정확하게 칠 수 있는 제자가 몇이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즉흥환상곡을 도입부에서 굉장히 빠른 템포로 오른손과 왼손이 움직여야했다.

오른손이 16분 음표를 때려 박는 동안 왼손은 세잇단 8분 음표를 연주해야 하기에 여기서오는 엇박자의 리듬감을 잡기 위해선 수없이 연습을 반복해야만 했다.

‘설마 새로운 피아노 교사를 구했나?’

자신의 친구가 한마디 상의도 없이 그런 짓을 하진 않았을 텐데?

하지만 그렇다면 대체 누가 이런 피아노를 치고 있단 말인가?

&

한편 석동철이 저택 바깥에서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을 때, 거실에서 쥬스를 따르던 소희역시 마찬가지 기분을 느꼈다.

“어머… 아가씨 친구 분도 피아노를 칠 줄 알아요?”

“네? 아, 그게…”

지금 소희의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은 단 한 가지였다.

‘지금 민준이가 치고 있는 피아노 위엔 악보가 없을 텐데… 그렇다면 설마?’

무 악보 연주.

피아노를 처음 쳐본다는 민준이의 피아노 실력은 그동안 그녀가 피아노 레슨에 매달려 왔던 시간을 처참히 부숴버리고도 남았다.

쟁반을 들고 거실에 우두커니 선 소희는 지금 굉장히 복잡한 기분이었다.

민준이의 피아노를 들을수록 자신의 피아노가 점점 초라하게 느껴졌지만, 한편으론 민준이의 피아노가 멈추지 않고 계속 되기를 바랬으니까…

그렇게 빠른 템포 전반부가 지나가고 환희에 차오르는 즉흥환상곡의 중반부에 접어들자. 그런 소희의 불안한 마음을 어루만지듯 따듯한 음색의 피아노가 그녀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그 순간 언젠가 노래하듯 피아노를 연주하라던 선생님의 말씀을 어느 정도 이해 할 수 있었다.

‘저 아이는 피아노를 통해 노래를 부를 수 있구나….’

지난 3년간 매일 같이 피아노를 쳐왔던 그녀였기에 민준이의 피아노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금방 알아 챌 수 있었다.

만약에 이 세상에 천재가 있다면 민준이 같은 아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순간.

절정으로 향하던 민준이의 즉흥 환상곡이 갑자기 뚝하고 끊겼다.

"어라?"

그리고 뒤이어 들려오는 민준이의 비명 소리에 하마터면 쟁반을 떨어 뜨릴 뻔했다.

“으아아아!!!! 오늘 동사무소 가는 거 까먹었다!!”

벌컥 소리와 함께 하얗게 질린 창백한 표정으로 거실에 튀어나온 민준이에게 소희가 물었다.

“가, 갑자기 왜 그래?”

“미안, 소희야. 나 중요한 일을 깜박 잊었어. 미안하지만 나 먼저 간다.”

어찌나 서두르는지 가방끈을 꼬아 맨 것도 모른 채 정신없이 달려 나가는 친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소희는 한편으로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꼈다.

어쩌면 그 안에 약간의 질투심이 담겨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 * *

클났다. 클났어~!!

이런 바보 멍충이!!

난생 처음 피아노를 칠 수 있다는 생각에 빠져 동사무소에 배급 날을 깜박 잊어버리다니…

우리 동네 동사무소에서는 매월 중순 경에 할머니와 나처럼 생활에 어려운 사람을 대상으로 무료로 라면을 배급하곤 했는데, 수량이 한정되어 있어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빠르게 정원을 지나 대문에 달린 스위치를 누르자 둔탁한 소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제법 묵직한 철문을 안으로 당긴 뒤 저택을 빠져 나오자, 반대편 골목 어귀에 있던 아저씨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꼬마야. 너 지금 저 저택에서 나오는 거니?"

처음보는 아저씨의 물음에 잠시 대답을 망설이다가 매케한 담배 연기에 코를 감싸 쥔 나는 결국 죄송하다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동사무소로 발을 달렸다.

&

아슬아슬하게 동사무소가 문 닫기 전에 도착은 했지만, 역시나 무상 라면 배급소는 이미 끝나 있었다.

아, 큰일이네. 할머니께 뭐라고 말씀을 드리지…

복잡한 심정에 나도 모르게 손톱을 물어뜯고 있는데, 뒤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민준아~!!”

“어? 희경이 누나?”

단정한 옷차림과 선한 인상를 가진 희경이 누나는 동사무소 직원이었다.

라면 배급을 할 때면 배급소 한 켠에 서서 항상 인원수를 체크하기에 한 달에 한번은 꼭 마주치는 누나였다.

“오늘은 왜 이렇게 늦었어?”

“죄송해요. 친구네 집에 놀러 갔다가 깜빡 잊었어요.”

“바보야. 잊을게 따로 있지…”

희경이 누나는 가볍게 내 머리를 쥐어박으며 살포시 웃어보였다.

“이쪽으로 와. 안 그래도 네가 안 보이길래 따로 한 박스 빼놨으니까.”

“정말요? 와~ 누나 최고~!!”

“하지만 다음 번에는 꼭 제 시간에 와야 해. 알았지?”

“네. 꼭 그렇게 할게요.”

잠시 후 라면 한 박스를 들고 온 누나는 내 손에 직접 상자를 들려주며 말했다.

“혼자서 들고 갈 수 있겠어?”

“물론이죠. 여태 항상 그래 왔는걸요.”

“할머니 무릎은 좀 어떠셔?”

“많이 안 좋으신가봐요. 요새는 집에만 계시는 걸요.”

“흐음… 바깥바람도 좀 쐬셔야 할 텐데. 민준아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봐.”

누나는 자신의 책상에서 약이 담긴 봉투와 파스 한 뭉치를 가져오더니, 뒤돌아 내 가방에 넣어 주셨다.

“자~ 이제 됐다. 이거 가져가서 할머니 무릎에 붙여 드려. 알았지?”

“고맙습니다. 누나. 나중에 커서 꼭 은혜 갚을게요.”

그러나 이번에도 내 머리를 살짝 쥐어박으며 희경이 누나가 말했다.

“꼬맹이가 어디서 그런 말을 배웠어.”

“할머니가 그랬어요. 은혜를 입으면 꼭 갚을 줄 알아야 한다고, 교과서에도 써있었는데요?”

“어른이 주는 건 그냥 감사한 마음으로 받기만 해도 돼. 자~ 그럼 할머니 기다리시겠다. 얼른 가보렴.”

“네. 고맙습니다~ 아저씨들 감사해요.”

내 몸집만 한 라면 박스를 받쳐든 채 다른 직원분들에게 인사를 드리다가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지만, 다행히 옆에 있던 희경 누나가 잡아주었다.

“어이, 꼬맹이씨 조심 좀 하지?”

“헤헷. 그럼 저 갈게요. 누나~”

동사무소를 나오니 이미 해가 져 주황색 가로등이 골목을 밝히고 있었다.

“이크.. 할머니께서 많이 걱정하시겠는데…”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집으로 가는 길을 찾은 나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라면 박스 무게 때문에 잘 달릴 수 없었지만, 그래도 희경이 누나 덕분에 마음만은 든든하다.

“싫어~!!! 이거 말고 종합 세트 3호로 사달란 말야~!!”

근처 슈퍼마켓을 지나는 길에 나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가 과자상자를 끌어안고 부모님께 떼를 쓰고 있었다.

그 아이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알록달록한 포장지로 감싸여진 과자 박스였다.

저거 한 박스가 라면 한 박스랑 가격이 비슷하다던데…

반면 나는 내 손에 들려 있는 라면 한 박스. 물론 나도 그 아이처럼 과자로 가득한 선물 박스를 가지고 싶다.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 둘 중 무언가를 선택 하라고 한다면 나는 당연히 라면 한 박스를 선택할 것이다.

나는 애써 아이가 들고 있는 과자 상자에게서 눈길을 돌리며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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