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Ep.1 : 사라진 아이 (6)
&
그 날을 계기로 소희는 반 친구들과 제법 친해진 느낌이다.
나한테 툴툴 거리던 진아 역시 어느 순간부터 소희랑 잘 어울려 다니곤 했으니까.
말이 없는 건 여전하지만, 그래도 이전보단 훨씬 얼굴이 밝아졌달까?
하지만 그 날을 계기로 달라진 사람이 또 하나 있었으니…
“민석아.”
“…….”
“야, 송민석!!”
“어!? 어, 왜 뭐?”
“아까부터 계속 불렀는데 어딜 보고 있는 거야? 음? 너 소희 보고 있었냐?”
“무, 무슨 소리야. 내가 왜 소희를 봐~!!”
정색을 하며 눈을 부릅뜨는 민석이를 바라보며 나는 배식 받은 우유를 던져 주었다.
“아니면 말지. 왜 화를 내냐.”
“나 화 안냈거든~!!”
“그래 알았다. 알았어.”
평소라면 우유 받으러 제일 먼저 달려오는 녀석이 요새 들어 이상하단 말야?
그 날 이후로 여전히 나와 소희는 2교시가 끝난 뒤 함께 우유를 타러 다니고 있다.
소희는 플라스틱 박스를 쥐느라 빨개진 손을 문지르며 나를 향해 웃어 보였다.
“왜?”
“아냐. 암것도… 오늘도 도와줘서 고마워.”
자기 우유 하나를 챙겨들고 자리로 돌아가는 소희를 쫓아 우유를 마시던 민석이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돌아갔다.
“너 소희 좋아하지?”
“푸흡~!! 쿨럭, 켈룩…”
“응. 그래. 충분히 대답이 된 것 같다. 우유 잘 마시고~”
“야~!! 차민준!!”
뒤에서 들려오는 당황스런 민석이의 목소리에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심장이 평소보다 3배는 빨리 뛰는 주제에 아닌 척 하기는~’
사람의 감정을 쉽게 느끼는 것들 중에 하나가 그 사람의 심장 박동을 체크하는 것이다.
약을 올려 흥분했을 때 화가 날 때…
그 사람의 심장은 마치 폭주 기관차처럼 빨리 뛴다.
듣고 있는 내가 불안해질 정도로…
하지만 누군가를 좋아하는 사람의 심장은 굉장히 섬세한 리듬을 가지게 된다.
그것은 음악 선생님인 강수정 선생님께서 과학실 선생님을 볼 때 마다 들려온 심장 소리에서 이미 느껴보았다. 그리고 이듬해… 두 선생님은 결혼 하셨다.
처음 누군가의 생각이 내 머릿속에 들려왔을 때. 나는 누구나 나와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단지 집중력의 차이라는 생각만 했을 뿐.
나 역시 모든 이의 생각을 꿰뚫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람의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자연스레 들려오지만, 그러기 위해선 나 역시 상당한 집중력이 필요했다.
“선생님 오신다~!!”
누군가의 목소리에 쉬는 시간의 어수선 했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오늘도 여전히 오래된 갈색 스웨터를 걸친 정옥분 선생님은 교탁에 서서 양미간을 좁혔다.
“인사.”
“차려어엇~!! 선생님께 대하여 경례~”
반장 용석이의 맥 빠진 목소리가 교실 안에 울리자, 아이들은 제각각 교과서를 꺼내들며 선생님께 인사를 드렸다.
“윤소희.”
“네…?”
“내가 전에 분명히 부모님 모시고 오라 했을 텐데?”
“아, 그게…”
“그리고 차민준.”
“네.”
“넌 우유 급식 당번도 아니면서 왜 소희를 도와주지?”
선생님의 질문에 나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렇게 배웠으니까요.”
“뭐?”
“친구가 힘들 때는 서로 돕는 거라고 교과서에 쓰여 있던데요?”
“……”
그 순간 선생님의 심장 박동이 거칠게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짜증나는 꼬맹이 녀석. 매번 눈에 거슬리는구나.-
“책들 펴. 수업 시작한다.”
조금은 삭막한 분위기 속에 정옥분 선생님의 수업이 시작되었다.
&
방과 후. 종례시간.
결국 난 떠든 사람 목록에 적혀 있지 않은 대도 불구하고, 교실 청소 당번으로 지명되었다.
아마 3교시 때 선생님 심기를 건드린 것이 문제였던 듯싶다.
책상과 걸상을 밀어내고 청소를 시작하려는데, 빗자루를 들고 소희가 다가왔다.
“어디서부터 하면 돼?”
“응? 넌 청소 당번 아닌데 왜 빗자루를 들고 있어?”
“나도 도와주고 싶으니까.”
“피아노 레슨은 어떡하고?”
“괜찮아. 오늘은 개인 연습이니까.”
“그래? 그렇다면 고마워. 자~ 그럼 후딱 끝내볼까?”
&
소희가 빗자루를 들자 몰래 교실 청소를 제끼고 도망가려던 민석이까지 합세하게 되어 청소는 생각보다 일찍 끝낼 수 있었다.
친구들과 다함께 교문을 나선 뒤, 집이 같은 방향인 나와 소희는 골목을 걷고 있었다.
사실 아까부터 소희의 피아노에 대해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지만, 전에 보인 반응으로 보아 피아노에 대해 별로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그래서 나는 다른 쪽으로 화제를 돌려보았다.
“우리 반 선생님 무섭지?”
“응. 굉장히…”
“그래서 별명이 마귀할멈이야. 어때? 굉장히 어울리지?”
“그러게~ 킥킥…”
빨간 장갑으로 입을 가린 채 키득 거리는 소희의 모습에 나 역시 피식 웃음을 던지며 물었다.
“그런데 왠 장갑이야? 날도 이정도면 따듯한 편인데?”
“아, 손을 보호해야 해서…”
“손? 어디 아파?”
“아니, 다치지 않기 위해서 미리 보호 하는 거야.”
“설마 피아노 치는 것 때문에?”
그러자 소희는 작은 얼굴을 끄덕였다.
“엄마 아빠는 내가 커서 피아니스트가 되길 원하시거든…”
“피아니스트? 그게 뭔데?”
“피아노 연주자를 뜻하는 말이래.”
“우와~ 멋진데?”
“하지만 매일 같이 피아노를 쳐야하고, 정기적으로 대회도 나가야해서 힘들어. 처음에 나간 어린이 피아노 대회에서 입상하고 나서 뭔가 변한 것 같아.”
“변하다니? 뭐가?”
“우리 엄마 아빠.”
“부모님께서?”
“단지 처음에는 피아노 소리가 예뻐서 배우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피아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어두워지는 소희를 표정에 나는 애꿎은 신발 주머니만 빙글빙글 돌려대었다.
“그래도 좋던데~”
“뭐가?”
“너의 피아노 소리. 특히 쇼팽을 칠 때는 더더욱…”
“민준아. 너도 피아노 칠 줄 알아?”
소희의 질문에 나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교실에 있는 풍금이야 아무도 없을 때 가끔 쳐보긴 했지만, 실제 피아노를 연주해 본 적은 없었으니까.
내가 가진 피아노는 그저 스케치북 종이를 길게 연결해서 그려 놓은 종이 조각에 불과하다.
“그냥 교실에 있는 풍금 정도만?”
“와아~ 그랬구나.”
“그렇게 놀랄 정도의 실력은 아니야.”
연주자가 꿈인 아이 앞에서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람…
애꿎은 마음에 손끝으로 코를 훔치며 씨익 웃어보이자, 소희가 나에게 말했다.
“우리집에 피아노 한 번 쳐볼래?”
“뭐…?”
&
딩동~
“누구세요?”
“저에요. 아줌마.”
“어서오세요. 아가씨 오늘도 늦으셨네요~”
띠익~
거친 전자음과 함께 철문이 열리고 나는 마른 침을 삼키며 철문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녹색 잔디가 깔린 푸른 정원을 지나 현관문에 들어서자, 중년의 아주머니 한분이 마중을 나오셨다.
“배고프시죠? 아가씨. 식사 준비했으니 얼른… 어? 이 도련님은 누구세요?”
“아, 안녕하세요. 소희 친구 차민준이라고 합니다.”
“어머~!! 아가씨 벌써 친구가 생기셨네요~ 민준이라고? 똑똑하게도 생겼네. 앞으로 우리 아가씨 잘 부탁한다.”
“감사합니다.”
항상 밖에서 바라보던 주택의 내부는 생각보다 화려했다.
뭔가 썰렁한 느낌도 들긴 하지만…
미술책에서나 보았던 그림도 턱턱 걸려있고, 거실만 해도 우리 집의 서너배는 되었기에 굉장히 부잣집이라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잠깐 피아노 좀 칠게요.”
아주머니께 가방을 넘겨준 소희가 터벅터벅 어떤 방으로 향하자 나는 인사를 드리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부모님은 어디계셔? 인사드려야 하는데…”
“아직 안 돌아오셨을거야. 많이 바쁘시거든.”
달칵.
거실 한 켠에 위치한 새하얀 문이 열리자, 방 한가운데 새하얀 피아노가 덩그러니 놓여져 있었다.
주변엔 꽃잎을 연상케하는 스피커와 LP 판들이 놓여져 있어 뭔가 음악 감상실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바닥에 가방을 내려놓자 소희는 닫혀있던 피아노 건반을 뚜껑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쳐볼래?”
“지, 진짜 쳐봐도 돼?”
“물론 얼마든지. 나는 아주머니께 마실 것 좀 부탁하고 올게.”
소희가 방문을 나서고 새하얀 피아노와 마주 한 나는 천천히 다가가 건반 하나를 눌러보았다.
딩~
딩딩딩~
교실에 있는 풍금과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음색…
어느새 피아노 의자에 걸터앉은 나는 손가락을 깍지 낀 채로 이리 저리 비틀며 머릿속으로 수많은 곡을 떠올려 보았다.
그 무엇 하나 빼놓을 수 없는 명곡들이 스쳐갔지만…
‘역시 처음 피아노를 친다면 이 곡을 한번 쳐보고 싶었어….’
아름답게 수놓인 새하얀 건반 위에 살포시 손가락을 올리자, 이루 말할 수 없는 짜릿한 감각이 정수리를 통해 내리 꽂혔다.
‘자~ 그럼 어디 한 번 시작해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