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3
293화 제우스 (7)
제우스는 그런 대규를 바라보며 외쳤다.
“하하, 네 녀석이 공간을 반전시킨다 해도 내 결계가 너의 돌풍을 다 막아 낼 것이다.”
하지만 대규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돌풍이 이제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때 제우스를 향해 커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그렇겠지. 돌풍이 나와 가까이 있는 상태에서 공간을 반전시키면 너의 결계가 다 막아 내겠지. 하지만 돌풍이 나에게 다가와 아예 나를 휩쓸고 공격하고 있는 상태라면 말이 달라질 것이다.”
“뭐라고?”
제우스가 쳐놓은 결계는 그의 몸으로부터 50cm 정도 떨어져 있다.
그렇다면 자신의 몸으로부터 50cm의 안쪽으로 돌풍이 이미 진입한 상태에서 공간을 반전시킨다면?
물론 그렇게 하면 돌풍은 분명 대규를 공격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
대규는 이를 악물었다.
돌풍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들이 이제 대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1미터를 지나 90cm, 80cm, 70cm…….
하지만 대규는 그 어느 스킬도 시전하지 않았다.
돌풍은 어느새 50cm 안쪽으로 다가와 대규의 몸을 공격했다.
화르륵- 서걱!
“끄윽!”
돌풍 안의 검날들이 자신의 팔과 가슴팍을 사정없이 난도질했다.
벼락들이 찌릿찌릿 자신의 몸을 사정없이 공격해 댔고, 뜨거운 불길들이 자신의 몸을 태웠다.
대규는 이를 악물고 고통을 버텨 냈다. 돌풍이 자신의 몸 안쪽으로 더욱 깊숙이 파고들었고, 피가 온몸에서 철철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이때다!’
대규는 이를 악물고 남은 힘을 짜내 공간 왜곡 스킬을 시전했다.
번쩍!
대규의 몸 깊숙이 파고들었던 돌풍은 순식간에 제우스의 몸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제우스가 단단하게 친 결계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미 대규의 몸으로 파고들었던 돌풍은 공간이 반전되자마자 바로 제우스의 몸을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끄아아악!”
저 정도의 비명이면 분명 치명상이다.
하지만 제우스가 악에 받친 목소리로 외쳤다.
“시나티오 스킬은 너만 갖고 있는 게 아니다!”
생명력이 조금이라도 붙어 있다면 생명력을 회복시키는 시나티오 기술을 쓸 수 있다.
‘빌어먹을! 저 자식이 여기서 생명력을 회복해 버리면 다시는 쓰러뜨릴 수 없을지도 몰라.’
대규 역시 한계에 봉착한 상황이었다.
방금 전 사슬날 돌풍을 만드는 데 자신의 모든 스킬과 역량을 쏟아부어 넣었다. 그래서 마나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 자신은 쥐고 있는 무기도 없는 상황이다. 제우스를 현재 공격하고 있는 돌풍들이 바로 자신의 무기 사슬검이었으니까.
‘어떻게 해야 하지?’
그때 공략집의 메시지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에피메테우스에게 받은 아카나의 구슬 조각을 이용하십시오.>
그랬다.
분명 프로메테우스 말고 그의 동생 에피메테우스에게 받은 보상 아카나의 구슬 조각이 있었다.
그것은 프로메테우스가 준 아카나의 구슬에 반 정도 되는 크기를 지닌 구슬이었다.
대규는 그것을 보관함에 보관만 해두고 있었다.
‘시간이 없어. 제우스는 당장이라도 회복 스킬을 쓰려고 한다.’
다행히도 그를 공격하고 있는 돌풍에 막혀 쉽사리 회복 스킬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대규는 얼른 보관함에서 에피메우스가 준 아카나의 구슬 조각을 꺼냈다.
작은 구체의 선홍빛 구슬이 그의 손바닥 위에 올려져 있었다.
곧 공략집의 메시지창이 연달아 떠올랐다.
<에피메테우스는 자신의 형, 다른 티탄 신족들과 함께 빚은 판테온 고대 인류에게 생명과 다양한 재능을 불어넣었습니다. 그의 능력은 다양한 창조(Creation)입니다. 이 아카나의 구슬 조각에는 창조 능력의 정수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 아카나의 구슬 조각은 사용자가 원하는 대로 외관이 변형됩니다. 다만 그 유지 기간은 사용자가 현재 소지하고 있는 마나량에 비례합니다.>
‘에피메테우스가 이런 능력을 지니고 있었구나. 싸움 실력은 별로 출중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대규는 구슬을 꾹 쥐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자신이 현재 지니고 있는 마나량은 거의 바닥이었다.
엘릭서를 마신 뒤에 이용해 볼까 했지만 지금 그럴 시간이 없었다.
‘제길, 아무리 그래도 10초 정도는 버틸 수 있겠지.’
대규는 눈을 감았다. 얼마 후 쥐고 있는 구슬에서 하얀빛이 일기 시작했다.
우우웅-
그리고 그것은 곧 거대한 형상을 이루기 시작했다.
대규가 손에 쥔 것을 본 제우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대규가 아카나의 구슬 조각으로 만든 것은 바로 제우스 자신이 오른손에 쥐고 있는 벼락과 똑같았다.
“이걸로 끝이다.”
대규는 자신이 들고 있는 벼락을 휘둘렀다.
벼락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자신의 몸에 얼마 남아 있지 않은 마나가 빠르게 벼락으로 흡수되는 게 느껴졌다.
그때마다 머리가 어지러워지고 시야가 흐려졌다.
하지만 정신을 집중해 제우스의 급소를 노려 공격했다.
우르르릉, 콰콰쾅!
“끄아아악!”
대규의 벼락에서 나온 벼락 자기장이 정확히 제우스의 머리를 공격했다.
그리고 돌풍 역시 그의 온몸을 집어삼켜 버렸다.
신들의 왕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며 돌풍 안을 부유했다.
얼마 후 눈앞에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신들의 왕 제우스와의 전투에서 이겨서 심연의 결계에 그를 가둘 수 있게 됐습니다.>
<심연의 결계가 열리기 시작합니다.>
돌풍 위쪽에서 허공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허공의 틈에서 붉은 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대규는 내심 궁금했다. 붉은 손들이 저 돌풍 안으로 들어가서 제우스의 몸뚱이만 건져올까?
하지만 붉은 손들의 움직임은 그의 예상과 달랐다.
‘미친, 뭐 저런 것들이 다 있어?’
틈에서 나온 수십 개의 붉은 손은 아예 대규가 만든 돌풍 전체를 감싸기 시작했다.
휘이이잉-
착착착!
붉은 손들은 돌풍에 닿아도 전혀 공격받지 않는 듯했다.
곧 손들은 돌풍을 거대한 누에고치처럼 감싼 뒤 통째로 제우스를 결계 안으로 삼켜 버렸다.
그리고 허공은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났냐는 듯 시치미를 뚝 떼고 깨끗하게 닫혔다.
물론 주변의 파괴되고 파헤쳐진 봉우리들을 보면 여태 제우스와 대규가 벌였던 전투의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말이다.
‘이제 끝난 건가.’
그때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신체 개조술을 받은 제우스를 쓰러뜨렸습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많은 양의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상상도 할 수 없이 많은 양의 마나를 흡수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제우스가 지닌 신권과 권위가 이양되었습니다.>
제우스까지 정말로 쓰러뜨리고 나니 왠지 허무했다. 이렇게 끝인 걸까?
그런데 제우스가 지닌 신권과 권위가 이양되었다는 건 무슨 말일까.
‘그보다도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하지?’
우선 판테온의 중앙 신전으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돌아가서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중앙 신전에 남아 있는 신들에게 자신이 제우스를 결계에 가뒀다고 말하는 게 우선이겠지.
그리고 신들에게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말해 두기로 했다.
앞으로 다시는 인간들과 인간 출신 영웅들에게 손대지 말라고 말이다.
그때 대규의 머릿속이 울리기 시작했다.
새로운 메시지창이 떠올랐던 것이다.
<심연의 결계 안에 갇힌 제우스가 당신과 대화를 시도하고 싶어 합니다. 대화를 수락하시겠습니까? Yes/No>
‘이런 것도 되는 거였어?’
아무래도 대규가 결계에 가둔 자이니만큼 가둔 자와 대화를 하는 게 가능한 것 같았다.
Yes를 선택한 뒤 대규는 눈을 감았다. 지독하게 패배한 제우스가 자신에게 지금 뭐라고 말할지 궁금하기도 했다.
‘어디 들어나 보자.’
눈을 감자 제우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크, 크윽… 그대는 이제 무엇을 할 작정인가? 중앙 신전으로 가 친히 신들의 왕 자리에 오를 것인가?”
그런 것도 가능한 거였나.
혹시 좀 전에 메시지창에서 봤던 신권과 권위가 이양되었다는 게 그런 의미가 아닐까?
신들의 왕이 되면 좋을 것 같았다.
판테온 전체를 다스리고 모든 신도 자신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특히 아레스와 아폴론 같은 소인배 녀석들도 말이다.
하지만 대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별로 신들의 왕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왕은 누군가를 지배하고 군림하는 존재다. 그것은 현실 세계에서처럼 단순히 사업을 성공시키는 것과는 달랐다.
그리고 한 부대를 지휘하는 것과도 스케일이 달랐다.
‘나는 한 부대를 통솔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권력, 권위가 높아질수록 책임져야 할 것들이 많아진다.’
대규는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아니, 그러진 않을 것이오.”
그러자 제우스는 안도한 것 같은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다.
“그럼 그대가 원하는 것은 대체 무엇이냐?”
이자가 왜 이런 걸 묻는 걸까.
대규는 대답 대신 곰곰이 생각해 봤다. 아마도 뭔가 타협을 봐서 결계를 빠져나오고 싶은 거겠지.
그것이 가장 그럴듯했다. 그런 게 아니라면 제우스는 저 안에서 굳이 대규에게 대화를 신청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대규는 아예 대놓고 그에게 돌직구로 물어봤다.
“그곳에서 나오고 싶소?”
“…….”
정곡을 찔렀나 보다.
어쩌면 이것이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
‘판테온의 중앙 신전 신들에게 말하는 것보다 차라리 그들 위에 있는 제우스에게 확답을 받아 놓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대규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당신을 결계에서 꺼내 줄 수도 있소. 그리고 다시 신들의 왕 자리로 돌려놓을 수도 있지. 내가 당신으로부터 빼앗은 신권, 권위를 다시 돌려줄 수 있단 말이오.”
“…정말인가?”
“그렇소. 하지만 당신이 나랑 약속을 하나 해 준다면 말이오.”
그러자 제우스가 물었다.
“무슨 약속이지? 들어주도록 하겠다.”
하지만 대규는 차가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일단 징표부터 거시오. 나는 그대를 못 믿겠으니까.”
제우스는 음흉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미리 이렇게 징표로 못 박아 둬야 뒤탈이 없을 것이다.
제우스는 탐탁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다. 징표를 걸겠다. 그대가 원한다면… 손목을 살펴보거라.”
그러자 대규의 손목 위에 황금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황금빛은 이내 제우스를 상징하는 벼락 모양의 인장으로 바뀌었다. 인장이 대규의 손목 위에 찍혔고, 그것은 스며들 듯 손목 안쪽 피부로 들어갔다.
징표가 성공적으로 걸렸단 표시였지만 대규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스튁스 강물에도 맹세해 주시오.”
“네 녀석이 그걸 어떻게!”
스튁스 강물 이야기가 나오자 제우스가 놀라서 외쳤다.
이 판테온의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대규가 그가 독파한 신화 책은 수십 권이 넘었다. 그 강물에 대해 모를 리가 없었다.
신화 내용에 따르면, 스튁스 강을 걸고 한 맹세를 지키지 않은 신은 1년간 목소리를 낼 수 없고, 9년간 신들의 회의에 참석하지 못한다.
이는 신들의 왕인 제우스에게도 여지없이 적용된다.
‘그리고 옛날에 하데스의 저승에서 보물 가져오기 경주를 했을 때 스튁스 강을 건넜지. 그때도 이에 대한 비슷한 설명을 본 적이 있었다.’
대규가 스튁스 강까지 끄집어내자 제우스는 빼도 박도 못하고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크으, 알겠다. 스튁스 강물에 걸고 맹세하마. 그대가 어떤 약속을 한다 해도 들어주겠다고.”
“알겠소. 그 말 꼭 지키길 바라겠소. 내가 당신에게 바라는 것은 딱 두 가지요.”
“무엇이냐?”
“우선 한 가지, 앞으로 당신과 판테온의 모든 신은 나와 인간 출신 영웅들에게서 손을 떼십시오. 관여하지 마시오. 앞으로 인간 출신 영웅 전부는 내가 관리합니다. 그들은 오직 나만의 명령에 따를 것이고, 당신과 다른 신들은 그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하지 못할 겁니다. 한마디로 우리들에게 독립된 지위와 보장권을 달란 말입니다.”
그러자 제우스는 쓴 소리로 대답했다.
“…알겠다.”
어쨌든 승낙했다. 징표에 스튁스 강물까지 걸고 맹세했으니 그로선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대규는 비장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