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9
289화 제우스 (3)
아레스의 말을 들은 대규는 어이가 없었다.
‘내가 언제 빼앗아 갔다는 거야? 내기에서 이겨서 공정하게 가져갔는데.’
하지만 제우스는 그 말을 듣고 아레스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당연한 말이다! 판테온의 반역자에게 전쟁의 신이란 신성한 칭호를 내릴 수는 없는 법! 아레스, 내 아들아, 저 반역자를 단칼에 해치우고 오너라. 그럼 전쟁의 신 칭호는 다시 너에게로 갈 것이다.”
그 말에 대규는 제우스를 바라봤다.
이상했다. 왜 저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걸까.
제우스는 바보가 아니었다. 따라서 대규의 실력이 아레스보다 한참 위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대규가 아레스 따위는 아폴론처럼 바로 심연의 결계에 가둘 수 있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아레스에게 이길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거지?’
그 점이 이상했다.
그때 아레스가 자신의 검을 빼들고 대규를 향해 날아오듯 달려왔다.
“흐라압! 죽어라, 이 반역자 새끼야!”
그의 대검이 허공을 갈랐지만, 대규는 너무나도 여유롭게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 자신이 의식의 대장간에서 새롭게 만들어 온 벼락검을 꺼냈다.
곧 프로메테우스가 준 아카나의 구슬 효과가 발동된다는 메시지창이 떠올랐고, 사슬날들이 순식간에 검신에서 분리됐다.
샤샤샤샥!
“가랏!”
대규가 명령하자 수십 개의 사슬 검날들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어어? 무슨 술수를 부린 게냐!”
아레스는 당황해서 이렇게 외친 후 주변을 둘러봤다. 하지만 분명 검날들은 사라졌다.
이제 그는 기세 좋게 웃으며 대규에게 말했다.
“하하하! 무기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녀석인가 보…….”
푹! 푹! 푹!
사라진 줄 알았던 칼날들이 사방에서 날아와 아레스의 온몸에 꽂혔다.
미처 막아낼 틈조차 주지 않았다.
“끄으으…….”
곧 아레스가 쓰러졌고, 허공에 심연의 결계가 열리기 시작했다. 판테온의 신들은 결계가 열리는 모습을 보고 경악했다.
오로지 단 한 명, 제우스만 빼고 말이다.
제우스는 다른 신들처럼 결계를 바라보는 대신 대규의 사슬검을 주의 깊게 살펴볼 뿐이었다.
심지어 그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도 나타나지 않았다.
‘왜 저러지? 뭔가 이상하다.’
곧 결계 안에서 붉은 손들이 아레스의 몸을 휘감았고 아레스는 순식간에 결계 안쪽으로 끌려들어 가 버렸다.
결계는 감쪽같이 사라졌고 이제 나머지 판테온 신들은 좀전보다 더욱 몸을 떨며 두려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때 제우스가 신들을 돌아보았다.
아레스 다음으로 대규를 상대할 신을 지명하려는 것 같았다.
‘제우스는 왜 바로 나를 상대하지 않는 것일까?’
그 점을 알 수 없었다.
판테온의 신들은 하나같이 제우스가 제발 자신만은 지명하지 말았으면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벌써 아폴론과 아레스 두 명의 신이 결계로 끌려들어 갔다. 그렇다면 그다음은 자신이 될 수도 있었다.
그때 제우스의 고개가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그의 시선이 구석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아테나에게 멈췄다.
“아테나.”
제우스가 입을 열었다.
“그대는 판테온의 전쟁의 여신이다. 전쟁의 여신으로서 저 반역자를 처단해 이 아버지를 기쁘게 하길 바란다.”
“…….”
아테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지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제우스와 대규를 번갈아 쳐다볼 뿐이었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제우스는 엄격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러느냐? 왜 대답이 없지?”
제우스의 목소리는 몹시 부드러웠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은 차가웠다. 자신의 말을 거역하면 바로 아테나를 들고 있는 벼락으로 찌를 기세였다.
아테나는 결국 고개를 숙이며 이렇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신들의 아버지시여.”
그녀는 결국 신들의 대열에서 걸어 나왔다. 그리고 제우스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대규를 바라봤다.
‘뭐야, 저 표정은?’
대규는 제우스의 입가에 떠올라 있는 묘한 미소를 보자 기분이 나빠졌다.
게다가 왜 하필이면 다음 상대가 아테나란 말인가.
대규는 판테온의 신 중에서 아테나를 각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전에 자신은 그녀의 부대에 있었고, 그녀는 자신의 상관이었다. 그리고 대규가 신이 돼 부대를 나왔을 때도 그녀와 대규는 서로 이야기를 종종 나누고 가까운 사이를 유지했다.
심지어 그녀는 대규가 신이 된 기념으로 자신이 아끼는 아이기스의 방패 한쪽을 선물로 내주기도 했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대규는 한순간 고민이 됐다.
언젠가 아테나와 함께 싸우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식으로 서로 싸우게 될 줄이야.
아무리 그녀가 판테온 전쟁의 여신이라지만 그녀는 신이고 자신은 초월자다. 자신은 이미 아테나의 실력보다 훨씬 우위에 있게 됐다.
그는 아테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녀에겐 나의 힘을 다 발휘하지 말아야 하나…….’
한마디로 봐주겠다는 것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녀는 심연의 결계에 끌려갈 테니까.
아테나의 표정 역시 긴장되고 굳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큰 결심을 한 듯 대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엔 평소 차갑고 냉정한 전쟁의 여신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몸에선 힘찬 기백이 마구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규여.”
자신을 향해 말을 거는 그녀를 본 대규는 놀랐다.
아테나는 초월자인 자신을 대면하면서도 꼭 동등한 지위에 있는 존재인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분명 그전까진 그에게 존댓말을 썼는데 말이다.
‘혹시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백과 연관이 있는 걸까?’
대규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테나가 자신의 창을 꺼내 들었다.
전투 때 항상 봐 온 그녀의 무기였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갑옷 왼쪽 어깨에 붙어있는 하나 남은 아이기스의 방패를 떼어 내 오른손에 들고 말을 이었다.
“우리 정정당당하게 겨루도록 하자. 전쟁의 여신과 전쟁의 신으로서 말이다. 그리고…….”
그녀는 망설이듯 입을 달싹거리다가 결국 이렇게 덧붙였다.
“그대가 지닌 모든 힘과 능력을 다해 싸워 줬으면 좋겠다. 그것이 정정당당한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전투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다. 대신 나도 그대에게 전력을 다할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빛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진심이군.’
대규는 좀 전에 순간적으로 그녀를 봐줘야 하나, 하고 고민했던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졌다.
아테나는 자존심이 센 여신이었다.
지금의 그녀는 그전보다 더욱 높은 긍지를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진정 판테온의 전쟁의 여신이군.’
아폴론, 아레스 같은 소인배 신들과는 질이 달랐다.
‘그 녀석들에게 아테나를 비교하는 것도 미안한 일이지.’
대규는 입가에 미소를 띠우며 그녀에게 화답하듯 말했다.
“알겠다, 아테나. 나도 최선을 다해서 그대와 싸우도록 하지.”
허리춤의 벼락검을 뽑아 들고 자신의 방패도 꺼내 들었다.
대규의 방패에 박혀 있는 아이기스와 아테나의 방패에 박혀 있는 아이기스가 서로 눈이 마주쳤다.
“키에에엑!”
아이기스들이 서로를 알아보고는 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녀석들의 표정으로 보아 은근히 서로를 반가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테나는 대규의 방패에 박혀있는 아이기스를 보고 놀라서 말했다.
“대규, 그대의 아이기스는 분명 죽은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다시 되살려냈다. 나도 모르게 녀석에게 정이 많이 들었나 봐.”
아테나는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미소도 잠시, 표정을 바로 굳히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봐주지 않겠다. 시작하지. 흐라앗!”
말을 마친 아테나는 기함을 내지르며 대규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녀의 눈빛이 푸르게 빛났고 얼마 후 그녀가 들고 있는 창두의 끝과 창을 잡고 있는 그녀의 오른팔 역시 푸르게 빛났다.
아테나의 플로우 창법!
곧 그녀의 얼굴엔 아무런 감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그녀는 오직 눈앞의 목표인 대규를 해치우기 위해 감정 없이 기계적으로 창을 휘두를 뿐이었다.
하지만 대규 역시 플로우 검법을 익힌 상태다.
‘내 플로우 검법은 아테나의 창법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만든 거였지.’
대규 역시 정신을 집중시켜 초집중의 상태로 들어갔다. 곧 대규가 들고 있는 사슬검의 끝과 그의 오른팔도 푸르게 빛나기 시작했다.
아테나의 창두가 빠른 속도로 대규의 가슴팍과 목덜미, 그리고 머리를 노리며 날아들었다.
휙, 휙, 휙-
꼭 창두가 수십 개나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테나가 그만큼 창을 빠르게 휘두르고 있단 얘기였다.
지영을 비롯한 대규 부대의 영웅들은 아테나의 창술을 보고 깜짝 놀라 외쳤다.
“저걸 어떻게 막아?!”
보고만 있어도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대규의 눈엔 창의 움직임이 슬로모션처럼 천천히 보이고 있었다.
‘너무 느려!’
창두의 움직임이 하나하나 천천히 자신의 급소를 향해 날아왔고 대규는 여유롭게 그것들을 피했다.
하지만 놀라운 사실은 아테나의 창의 움직임이 정말로 정확하다는 것이었다. 저 정도로 빠르게 창을 휘두르는데 창두가 향하는 방향은 정확히 대규의 급소들로부터 1cm도 벗어나지 않았다.
저렇게 빠르게 창을 휘두르며 정확하게 급소를 노린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대규는 창두를 피하면서 속으로 내심 감탄했다.
‘역시 아테나의 실력은 대단하다. 전쟁의 여신이라 불릴 만해.’
물론 그녀의 실력을 무효화시킬 만큼 자신의 능력이 뛰어나긴 하지만 말이다.
대규는 아이기스의 방패를 들어 아테나의 창두를 하나씩 모두 막았다.
퍽, 퍽, 퍽-
그 역시 너무나 빨리 방패를 움직여 영웅들과 다른 신들의 눈엔 방패의 움직임이 거의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한편, 자신의 플로우 창법이 완벽하게 막히자 아테나는 몹시 당황하고 있었다.
‘대규가 이 정도로 성장했단 말인가. 이제 그는 정말 나와는 다른 존재가 됐구나.’
하지만 공격을 막혀 당황한 것과 달리 희미한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번져 나갔다. 하지만 그 미소는 왠지 모르게 슬퍼 보였다.
물론 미소를 보인 것도 한순간이었다. 아테나는 다시 냉정한 전쟁의 여신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대규를 향해 다시 한 번 외쳤다.
“그럼 대규! 이것도 막아 보거라! 하아압!”
아테나는 두 손으로 그녀의 창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저것은!’
대규는 아테나의 두 손과 창두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녀의 두 팔은 이제 어깨까지 푸르게 빛나고 있었고 창두는 푸르다 못해 시퍼렇게 물들어 있었다.
‘플로우의 경지를 극한까지 끌어 올린 건가.’
아테나는 엄청난 기함을 내지르며 창두 끝으로 대규의 방패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흐라아압!”
콰콰콰쾅!
창두의 끝과 방패가 부딪친 순간 대규의 방패에 숨겨져 있던 아자토스의 핵이 진가를 발휘했다.
기존에 지니고 있던 방패에 있던 아자토스의 핵 역시 대규가 의식의 대장간에서 떠올려 만든 방패에 넣어두었다.
파아앙!
버섯모양의 거대한 뭉게구름이 대규의 방패로부터 뻗어 나왔다.
“크으윽… 으아아!”
아테나는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날아가 버렸다.
쩌억!
그녀의 창 역시 두 동강이 나 버렸다.
“크으으…….”
아테나는 중앙 신전 바닥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중앙 신전 바닥은 깊게 파여 있었다.
대규는 깜짝 놀라서 쓰러져있는 아테나에게 뛰어가며 외쳤다.
“아테나, 괜찮아?”
그녀의 입가에선 피가 한줄기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최대한 냉정한 표정을 유지하며 말했다.
“…나는 괜찮다. 대규, 어서 나에게 최후의 공격을 하거라.”
“뭐라고?”
“나는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그대에게 졌다. 나는 패배를 받아들이겠다. 이제 패배해도 미련이 없다. 그러니 어서 빨리 나에게 최후의 공격을 하거라. 그래야 그대는 진정한 판테온 전쟁의 신이다.”
“아테나…….”
그때 아테나는 대규를 바라보았다. 그 표정은 냉정한 전쟁의 여신의 표정이 아니었다. 순수하면서도 애절한 소녀의 그것이었다.
“…그리고 대규, 나는 너와 함께 싸울 수 있어서 정말 기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