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8
288화 제우스 (2)
지영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더 큰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니요…….”
대규는 천막 안에 서 있는 영웅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을 잘 듣길 바랍니다. 우리 부대는 이제 판테온의 중앙 신전으로 갈 겁니다.”
판테온의 중앙 신전이란 말을 듣자 영웅들이 웅성거렸다.
이곳에 있는 영웅 중 그 누구도 중앙 신전에 가본 적이 없었다. 대규의 경우 신이 되기 전 승전 기원 만찬에 부대의 최고 영웅의 자격으로 케이른과 함께 방문한 적이 딱 한 번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몹시 특별한 경우였다.
중앙 신전은 본래 신이 아닌 존재가 들어갈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번엔 라이펑이 대규에게 물었다.
“대규 님, 그곳엔 대체 왜 가려는 겁니까?”
대규는 영웅들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우린 그곳에 제우스, 그리고 다른 판테온의 신들을 치러 가는 겁니다.”
“……!”
323명 영웅의 눈동자가 일제히 커졌다.
그들은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다.
‘잘못 들었나? 제우스 님과 다른 판테온의 신들을 치러 간다고?’
대장군 지영 역시 평소의 차분함을 잃고 당황한 목소리로 대규에게 물었다.
“대규 님, 그게 무슨…….”
영웅들은 이제 입을 떡 벌리고 대규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영은 이내 당황한 목소리를 가다듬고 대규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평소의 차분함을 잃은 상태였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그리고 대규 님, 방금 전 말씀하신 앞으로 닥쳐 올 큰일이란 무엇을 말하는 건지요?”
“앞으로 여러분들에게, 그리고 우리가 사는 지구에 엄청난 재앙이 몰려올지도 모릅니다.”
대규는 심연의 결계 속에서 프로메테우스 형제가 이야기해 준 것들을 부대 영웅들에게도 똑같이 전달해 줬다.
제1차 기간토마키아에서의 인간 영웅들의 활약상과 그들을 제거하기 위한 계획이었던 트로이 전쟁, 그리고 제우스가 이번에도 똑같은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것 등을 말이다.
대규의 이야기를 들은 영웅들의 표정은 급속도로 사색이 돼갔다.
“마, 말도 안 돼…….”
“그게 대체 무슨…….”
지영 역시 사색이 된 채 말했다.
“대규 님, 그럼 제우스 님과 다른 판테온의 신들께선 우리 인간 출신 영웅들과 지구에 살고 있는 인간들을 다 몰살하려 한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대체 왜죠? 우리는 단 한 번도 그들을 거스른 적이 없지 않습니까. 게다가 우린 판테온을 위해 여태껏 싸워 왔는데…….”
대규는 그 말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본래 우리는 판테온에 속한 존재들이 아니었으니까요. 다들 기억납니까? 우리가 맨 처음 차원의 틈에 들어왔을 때 말입니다.”
“예?”
“우리는 신들을 돕기 위해 기간토마키아에 참전하게 된, 차출된 존재들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신들을 돕기 위한 일종의 도구와도 같았죠. 애초에 차원의 틈에 처음 들어왔을 때 우리는 영웅도 아니고 영웅 후보생이었습니다.”
그랬다.
그때는 난생처음 이상한 능력을 지니게 됐고, 현실에선 얻을 수 없는 어마어마한 보상을 얻게 돼 그에 기뻐하며 온 정신을 뺏겼지만 사실 그들은 신들을 돕기 위한 존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 능력과 보상은 신들을 더욱 잘 돕기 위한 일종의 ‘당근’ 역할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제 기간토마키아가 끝났고, 우리들의 실력은 판테온에 있는 신들까진 아니더라도 정령들을 충분히 위협할 만한 수준은 됩니다. 게다가 저는 인간 출신인데도 불구하고… 판테온의 신들을 위협하고도 남는 존재가 돼 버렸지요.”
“아…….”
“그래서 제우스는 이번에 그 싹을 깨끗하게 잘라 버리려고 한 것입니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사용한 도구를 이제는 폐기해야 할 때라는 거지요. 우리가 판테온의 질서를 어지럽힐 수도 있다고 생각됐을 테니까 말이에요. 명분은 불온한 인간 출신 영웅들로부터 판테온을 수호하기 위해서라나요…….”
그러자 라이펑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그, 그럼 설마 아폴론 신께서 이곳에 온 것은…….”
대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요. 아마도 아폴론을 따라갔다면 여러분들은 끔찍한 일을 당했을 겁니다. 아니면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받았을지도 모르죠. 서로가 서로를 죽여야만 하는 그런 명령 말입니다.”
그러자 몇몇 영웅이 그 말에 분통을 터뜨리며 말했다.
“우리가 어떻게 기간토마키아에 참전해 왔는데… 얼마나 많은 희생을 했는데! 너무한 거 아닙니까?”
“우리를 그렇게 동물만도 못한 존재 취급하다니!”
대규는 그런 영웅들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진정하세요. 나도 여러분과 똑같이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 당장 판테온 중앙 신전으로 가서 제우스와 다른 신들을 상대하러 갈 겁니다.”
“하, 하지만 대규 님…….”
라이펑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규 님은 신이시지만 우리는 고작 세미데우스 영웅일 뿐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감히 신들을 상대로 전투를 벌인단 말씀이십니까?”
“나도 그쯤은 알고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신들과 싸우게 하지 않을 겁니다. 다만, 여러분께 바라는 것은 딱 한 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인간 출신 영웅들의 기백을 그들에게 보여주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판테온을 해칠 불온한 존재들도 아니지만, 동시에 판테온 신들에게 순순히 당하고만 있지도 않겠다는 마음가짐을요. 여러분이 나와 함께 그곳에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효과가 있겠지요.”
“정말로 효과가 있을까요?”
라이펑이 의문스럽다는 듯 묻자 대규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 겁니다. 왜냐면 제우스는 아마도 나와 여러분이 자신의 계획을 알고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할 테니까요. 물론 여러분들이 신들을 쓰러뜨릴 수 없다 해도 그들이 원하는 대로 꼭두각시처럼 움직이진 않겠다, 란 의사 표현만이라도 강력하게 한다면 그건 그 나름대로 분명 효과가 있을 겁니다.”
그리고 대규는 이렇게 덧붙였다.
“게다가 여러분은 방금 전 내가 아폴론과 싸우는 광경을 봤을 겁니다.”
그 광경을 떠올린 영웅들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심연의 결계에서 나왔던 그 끔찍한 붉은 손들의 모습이 각자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다.
대규는 낮은 목소리로 가만히 입을 열었다.
“…나에게 이제 일반적인 판테온 신들은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
“나를 막아서는 신들은 내가 직접 처리할 것입니다. 아폴론처럼 말이죠. 나는 그들과 같은 신이기 때문에 내가 신을 상대하는 건 판테온의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 아닙니다. 하극상도 아니구요.”
하지만 문제는 제우스였다.
아폴론은 제우스의 명을 받고 이곳 주둔지에 와서 인간 출신 영웅들을 데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대규에 의해 심연의 결계에 갇혀 버렸다.
중앙 신전으로 아폴론이 돌아오지 않고 있으니 제우스는 당연히 지금쯤 의심을 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다. 어쩌면 이미 모든 상황을 다 파악하고 있을지도 몰라.’
제우스는 항상 모든 전투나 광경들을 앉은자리에서 다 보곤 했다. 어쩌면 아폴론과 대규가 싸움을 일으키고 아폴론이 심연의 결계에 갇혔다는 사실까지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고도 남을 자이지.’
그렇다면 이곳에서 꾸물거릴 시간이 없었다.
대규는 아직도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거나 사색이 된 영웅들을 보며 말했다.
“두렵다면 나를 따르지 않아도 좋습니다. 중앙 신전에 가서 판테온의 신들을 직접 대면하는 일이 여러분들에게 매우 두려운 일인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나를 따라가지 않는다고 나무라진 않겠습니다.”
그러자 지영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저는 가겠습니다.”
“지영 대장군님!”
“대규 님의 말이 사실이라면… 인간 출신 영웅으로서 가만있을 수 없습니다. 인간들의 대표로 그곳에 가서 신들에게 우리는 그런 부당한 일을 당할 존재가 아니라는 걸 똑똑히 보여 주겠습니다.”
그러자 라이펑과 존도 한 발짝 앞으로 나와 역시 대규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저희도 가겠습니다.”
“그렇습니다. 그전에 아폴론 부대에서 받았던 인간 출신이라 받았던 차별도 모자라 이젠 몰살이라뇨. 더 이상 참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자 도미노 효과라도 일어난 듯 차례로 한 명씩 영웅들이 앞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결국 323명의 모든 영웅이 대규를 따라가겠다고 나섰다. 특히 아폴론 부대에서 옮겨온 영웅들의 눈빛에는 더욱 독기가 서려 있었다.
‘아무래도 그간 인간 출신이라고 받았던 홀대에 대해 쌓인 게 많아서겠지.’
대규는 영웅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좋습니다. 하지만 중앙 신전에 가는 만큼 조심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요. 나는 여러분께 우선 축복을 내리겠습니다.”
대규는 신의 축복 스킬을 부대 영웅들에게 걸어 줬다.
영웅들의 몸이 반짝이기 시작했고, 그 반짝이는 빛은 그들의 몸속으로 빠르게 흡수가 됐다.
그리고 그는 영웅들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 따라오겠다고 하니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대들은 단순히 내 부대의 영웅, 아랫사람이 아닙니다. 그대들은 나와 함께 차원의 틈 시절부터 함께 싸워 온 동료입니다.”
그리고 대규는 영웅들에게 역시 고개를 숙여 화답했다.
이제 중앙 신전으로 갈 때였다.
대규는 자신과 영웅들의 몸 주변에 투명 이동 결계를 쳤다.
‘이번 전투야말로 어쩌면 진정한 의미의 최후의 전투구나.’
이 전투에서 진다면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인간 출신 영웅들, 그리고 더 나아가 현실에서 살고 있는 인간들마저도 위험하게 된다.
평소보다 더욱 비장한 표정으로 대규는 중앙 신전으로 이동했다.
대규와 323명의 영웅은 판테온의 중앙 신전에 곧 도착했다.
대규는 도착하자마자 눈앞에 보이는 광경을 보고는 입가에 피식, 조소를 띠었다.
그들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제우스와 나머지 판테온의 신들이 일렬로 좌르륵 서 있었다.
그들은 모두 장비와 무기를 갖춘 채 전투태세를 하고 있었다.
맨 앞에는 신들의 왕 제우스가 벼락을 들고 서 있었다.
제우스는 대규를 바라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가 이렇게 나올 줄 알고 있었다. 아폴론은 어디 있는가?”
대규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맞받아쳤다.
“알면서 왜 물어보시오?”
“…역시 그대가 심연의 결계에 가뒀군.”
그리고 제우스는 다른 판테온의 신들을 돌아보며 매서운 목소리로 외쳤다.
“여봐라! 이자는 판테온의 신을 공격한 불온한 반역자이다! 이자를 제일 먼저 쓰러뜨리는 신에겐 내가 보상을 내리겠다!”
대규는 제우스 뒤에 서 있는 판테온의 신들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자신과 함께 싸웠던 아테나, 아프로디테, 헤르메스, 아레스, 디오니소스 등이 있었다.
제우스가 명령을 내렸지만, 그들은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특히나 디오니스소는 사시나무 떨듯 온몸을 떨며 무기를 단단히 두 손으로 움켜쥐고 있을 뿐이었다.
예전에 대규와의 결투에서 패해 심연의 결계에 잠깐 동안 갇혔던 악몽을 아직도 떠올리는 것 같았다.
아프로디테 역시 쉽사리 나서지 못했다. 그녀의 얼굴엔 항상 봐왔던 유혹적인 색기는 간데없고 두려움이 떠올라 있었다. 두려움이 떠올라 있는 건 헤르메스와 아레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들은 신이고 나는 초월자의 육체를 지녔으니까. 하지만…….’
대규는 마지막으로 아테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대규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대규는 그녀의 속마음을 들어왔다.
‘대체 어떻게 대규가 심연의 결계에서 나온 것일까? 아니, 그보다 대규는 이제 우리가 쓰러뜨려야 할 적이다. 하지만…….’
그녀의 속마음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아다. 얼굴엔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때 아레스가 앞으로 튀어나가며 외쳤다.
“제, 제우스 님! 제가 저 반역자를 쓰러뜨리겠습니다!”
그는 두려운 기색을 여전히 드러내고 있었지만, 반면 그의 얼굴엔 이상한 희망의 빛 같은 게 떠올라 있었다.
‘뭐야, 저 자식…….’
아레스는 제우스에게 이렇게 덧붙였다.
“마, 만약 제가 저 자를 쓰러뜨린다면… 저자가 저로부터 빼앗아 간 전쟁의 신 칭호를 저에게 다시 돌려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