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2
282화 크로노스 (3)
벼락검의 검기와 화염들이 크로노스를 난도질하는 동안 대규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핏방울이 사방으로 튀고 화염도 맹렬히 일었지만, 그의 머릿속엔 지금 눈앞에 있는 자신의 적을 베어 버려야겠다는 생각만이 지배하고 있었다.
얼마 후 크로노스의 머리 위 허공의 틈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붉은 손들이 튀어나오기 전, 그 틈의 암흑에서 기분 나쁘게 생긴 붉은 눈동자가 보였다.
눈동자는 크로노스를 탐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동자를 본 크로노스의 얼굴이 겁에 질렸다.
대규 역시 그 눈동자를 보고 놀랐다.
‘저 눈동자는……!’
분명 디오니소스와 전투를 했을 때 열렸던 심연의 결계 틈에서 봤던 그 눈동자와 동일했다.
곧 대규의 눈앞에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크로노스와의 전투에서 이겨서 심연의 결계에 그를 가둘 수 있게 됐습니다.]
[심연의 결계가 열리기 시작합니다.]
곧 틈에서 붉은 팔들이 나와 크로노스의 온몸을 덩굴처럼 휘감기 시작했다.
“크윽! 이럴 순 없다……!”
크로노스가 붉은 팔들을 뿌리치며 외쳤다.
하지만 그의 마음과 달리 어느새 붉은 손들은 그의 몸을 휘감아 심연의 결계 안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크로노스의 몸이 틈 안으로 모두 들어가자 결계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닫혀 버렸다.
얼마 후 크로노스를 해치웠다는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축하합니다! 티탄 신족의 왕 크로노스를 해치우셨습니다.]
[크로노스와의 전투에서 기여했던 기여도에 따라 마나 양과 경험치 양을 흡수합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천문학적인 양의 경험치를 획득하였습니다.]
[마나가 풀로 찼습니다.]
[레벨이 한 단계 상승했습니다.]
한꺼번에 좌르륵 뜨는 메시지창들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메시지창의 내용들이 평소와 좀 달랐다.
‘그런데 축하합니다, 라니. 여태까지 메시지창이 저런 개인적인 감정을 담은 적은 없었는데.’
다른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여태까지는 대규 혼자서 무조건 적을 쓰러뜨리고 경험치를 독식했는데 이번엔 아닌 것 같았다.
전투에 기여했던 기여도만큼 마나와 경험치를 분배해서 주는 것 같았다.
확실히 이 전투는 제우스와 대규가 공동으로 싸워서 이긴 전투이니만큼 더 그런 것 같았다.
‘그래도 천문학적으로 많은 양의 경험치를 얻었다니… 대체 어느 정도란 말이지?’
하지만 더욱 놀라운 건 그토록 많은 경험치를 얻었는데도 레벨은 겨우 한 단계만 상승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초월자의 육체는 신의 육체보다 훨씬 레벨을 올리기 힘든 걸지도 몰랐다.
‘하긴, 괜히 초월자의 육체가 아니겠지.’
레벨은 올리기 힘들지만 그만큼 더욱 강해질 것이다.
대규는 이제 고개를 돌려 저 멀리 뒤쪽에 있는 제우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척 들어 보였다.
모든 게 자신의 계획대로였다.
사실 방금 전 크로노스를 맞췄던 제우스의 벼락은 애초에 대규와 제우스가 계획한 것이었다.
대규는 크로노스를 쾌속 비행으로 쫓아가기 전 제우스에게 이렇게 신신당부했다.
‘제우스 님, 아까의 벼락을 불러내 저를 공격하십시오.’
크로노스는 분명 자신과 대규가 붙어 있는 상황에서 벼락이 떨어진다면 분명 제우스가 자신을 공격하기 위해 벼락을 불러낸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면 크로노스는 당연히 공간을 반전시켜 그 벼락이 대규를 공격하게 만들 것이었다.
대규가 생각해 낸 건 그걸 역이용한 전략이었다.
제우스가 크로노스가 아닌 대규를 노리고 벼락을 때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 길이 없는 크로노스는 당연히 벼락이 자신을 공격하는 줄로만 알고 자신과 대규 사이의 공간을 반전시킬 것이다.
결국, 제우스의 벼락은 최종적으로 크로노스를 공격하고 만다.
그래도 일부러 대규는 크로노스를 향해 쾌속 비행 스킬을 써서 그 옆에 찰싹 붙었다.
그렇게 붙어 있어야 크로노스가 대규를 향해 날아오는 제우스의 벼락을 봤을 때 당연히 자신을 공격할 벼락이라고 믿을 테니까 말이다.
예상대로 대규의 계략은 성공적이었다.
크로노스는 보기 좋게 속아 넘어가 공간을 반전시켰고, 결국 제우스의 벼락은 크로노스에게 명중했다.
제우스는 대규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수고가 많았다. 그대 덕분에 내 아버지를 다시 심연의 결계 속에 가둘 수 있었다.”
“아닙니다. 제우스 님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작전이었습니다.”
제우스는 저 멀리 티탄 신족 두 명과 힘겹게 싸우는 하데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이제 아우 하데스를 도와주러 가야겠다.”
“알겠습니다!”
그들은 하데스가 2 대 1의 전투를 벌이고 있는 봉우리로 날아갔다.
한편 하데스는 몹시 힘겹게 전투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저 멀리서 제우스와 대규가 날아오는 걸 보고 놀라서 물었다.
“전투는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러자 제우스가 쩌렁쩌렁 울리는 신의 목소리로 하데스와 나머지 티탄 신족 2명에게 말했다.
“나의 아버지 크로노스는 나에게 패해서 심연의 결계에 다시 갇혀 버렸다. 이에 우리가 그대의 전투를 도와주러 왔다.”
그 말에 하데스의 얼굴이 몹시 밝아졌다.
반면 나머지 티탄 신족 두 명은 충격에 휩싸인 얼굴을 하기 시작했다.
“마, 말도 안 된다. 크로노스 님이…….”
이제 그들의 얼굴엔 충격을 넘어서서 경악에 찬 표정이 떠올랐다. 크로노스가 패배했다는 말을 들은 것만으로도 그들은 전의를 상실한 것 같았다.
“이익, 이럴 순 없다. 더 이상 전투를 할 수 없어…….”
그들은 이렇게 중얼거린 뒤 갑자기 낮은 목소리로 이상한 주문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그들의 몸은 마티가스의 봉우리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도망쳤군.”
제우스는 좀 전까지 그들이 서 있던 곳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런 것 같습니다.”
그 순간 제우스와 하데스, 대규의 눈앞에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제2차 기간토마키아가 끝났습니다. 판테온의 승리입니다.]
그 메시지창을 보자마자 하데스와 대규는 제우스에게 고개를 숙여 이렇게 말했다.
“판테온이 승리했습니다. 신들의 왕이시여, 승리의 영광을 당신께 바칩니다.”
그러자 제우스는 온화한 목소리로 대규와 하데스에게 말했다.
“아니다. 그대들도 수고가 많았다. 승리의 영광은 판테온 전체의 것이다. 이젠 내 불찰로 심연의 결계에 갇힌 포세이돈을 꺼내야겠지.”
대규는 그제야 결계 속으로 끌려갔던 포세이돈을 기억해 냈다.
‘맞다. 심연의 결계에 갇힌 자는 그 결계에 가둔 자만이 꺼낼 수 있었지.’
제우스는 포세이돈을 꺼내기 전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했다.
“만약 내가 나의 아버지 크로노스에게 패해서 나마저도 심연의 결계에 갇혔다면… 포세이돈을 구출할 수 없을 뻔했구나.”
얼마 후 허공에서 결계의 틈이 열렸고, 그 안에서 포세이돈의 커다란 몸이 쑤욱 빠져나왔다. 꼭 결계가 그를 삼켰다가 다시 내뱉은 것 같았다.
포세이돈은 정신을 차린 뒤 제우스에게 물었다.
“제, 제우스 님? 이게 대체……. 전투는 어떻게 된 겁니까?”
“우리가 승리했다.”
그 말에 포세이돈의 얼굴이 환해졌다. 제우스는 그런 그에게 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잘못이다. 내 불찰로 그대를 심연의 결계에 갇히게 만들었다. 진심으로 사과를 하마, 내 아우여.”
“아닙니다. 그래도 승리했으니 다행입니다.”
제우스는 이제 대규와 하데스, 포세이돈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모두 중앙 신전으로 돌아가도록 하자. 이번 최후의 전투에 대한 보상과 제2차 기간토마키아를 이긴 데 대한 승리의 축하연이 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제우스는 이동 결계를 위해 두 팔을 높이 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대규는 오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렇게 길었던 대전쟁이 정말 이렇게 끝나 버린 거야?’
뭔가 기분이 어색하고 이상했다.
전쟁이 끝난 것은 분명 좋은 일이었지만 이렇게 막상 끝나니 왠지 허무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래도 계속 전시 상황인 것보다는 낫겠지. 이제 판테온의 모든 신도 그 켄타로우스의 숲에 있던 켄타로우스들처럼 평화롭게 지낼 수 있겠지.’
곧 제우스의 이동 결계가 4명의 신을 감쌌다.
결계 안에 들어가자 제우스가 대규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대규여.”
“예.”
“그전에 그대가 나에게 물어봤던 건 어떻게 됐나?”
“무엇 말씀이십니까?”
“그대 부대의 인간 영웅들의 향후 거취에 대한 것 말이다.”
그 말에 대규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 제우스 님이 말씀하신 대로 제가 알아서 하기로 했습니다. 영웅들과는 잘 협의를 했습니다.”
“그래?”
“네. 전쟁이 끝났지만 가끔 정기적으로 주둔지에 모여 훈련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 외의 시간엔 각자 현실 세계의 생업에 종사하기로 했구요.”
“그렇군. 정말 그대는 대단하군…….”
제우스의 목소리가 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감지한 대규는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예? 뭐가 대단하다는 겁니까?”
그러자 그는 생각에 잠긴 채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게 나약했던 종족인 인간을 훈련시켜 정예 부대로 만들다니… 나는 여태껏 그런 신은 본 적이 없었다.”
“감사합니다.”
그러자 제우스는 대규를 가만히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하지만 인간들은 본래 지녀야 할 힘보다 더한 힘을 얻게 되면 방종하게 되는 법이지.”
대규는 제우스의 그 말이 왠지 거슬렸다. 그의 말에서 인간들을 하대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를 반항적으로 바라보며 이렇게 물었다.
“그건 인간만 그런 게 아니지 않습니까?”
“…….”
제우스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재빨리 화제를 바꿔 버렸다.
“어쨌든 그대 덕분에 크로노스를 무찌를 수 있었다. 그 전략을 생각해 낸 그대의 통찰력 덕분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대는 이번 전투의 공적으로 아주 큰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대규는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느꼈다.
분명 크로노스를 해치우면 공략집에선 초월자 등급의 스킬을 보상으로 준다고 나와 있었다.
‘그러면 크로노스를 해치웠을 때 그것이 떠올라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마치 아자토스를 해치웠을 때 초신성 폭발 스킬이 들어 있던 흑색 상자가 아자토스의 왕좌 위에 떠올랐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번엔 그런 일도 없었고, 크로노스는 바로 심연의 결계 속으로 끌려들어 가 버렸다.
‘대체 어떻게 된 걸까? 뭐, 내가 모르는 사이에 중앙 신전으로 보상이 전송됐을 수도 있지. 일단 신전으로 가 보면 알게 되겠지.’
대규를 포함한 네 명의 신은 곧 이동 결계를 타고 중앙 신전에 도착했다.
“엇?!”
대규는 신전을 바라보고 놀라서 외쳤다.
신전의 외관이 변해 있었다. 기간토마키아가 끝나서 그런지, 요새 모양이었던 신전의 외관은 다시 고대의 신전 모양으로 돌아와 있었다.
정말로 전쟁이 끝나긴 한 건가 보다.
네 명의 신을 발견한 신전의 문지기가 신들에게 넙죽 절을 하며 소리쳤다.
“판테온에 승리의 영광을!”
승전 소식이 벌써 이곳까지 전해진 모양이었다. 네 명의 신은 문지기의 외침을 기분 좋게 들으며 신전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서자마자 귀를 찢을 듯한 함성이 들려왔다.
와아아아아아!
신전 안의 원탁 위엔 이미 성대한 만찬이 차려져 있었다. 네 명의 신이 자리에 앉기만 하면 바로 축하연이 시작될 기세였다.
원탁엔 제우스, 대규, 포세이돈, 하데스 네 명의 자리만이 비어 있었다.
네 명의 신은 각자의 자리에 앉았다. 얼마 후 제우스가 일어나 원탁에 둘러앉은 신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최후의 전투를 무사히 마치고 적장 크로노스까지 심연의 결계에 가뒀다! 이 전쟁은 판테온의 승리로 돌아왔다!”
“와아아아!”
“오늘은 다들 엉망으로 마시고 취해도 좋다. 하지만 그 전에 최후의 전투에 대한 보상을 내려야 하겠지.”
제우스는 우선 하데스와 포세이돈의 이름을 부른 뒤 그들에게 각각 보상의 백색 상자를 내렸다. 그리고 자신이 결계에 가뒀던 포세이돈에겐 다시 한 번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그는 대규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대규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평소와 달리 매우 어두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