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1
281화 크로노스 (2)
“아버지시여, 정말 비열하십니다.”
제우스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낮아졌다. 평정심을 가장하고 있지만, 상당히 감정이 흔들린 것 같았다.
하지만 크로노스는 꼼짝도 하지 않고 붉은 눈동자를 번쩍이며 제우스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전쟁에선 비열한 것이 없다. 비열한 것이 있다면 애초에 아버지를 내몰고 왕위를 빼앗은 그대겠지. 하지만 난 그대의 그런 무례한 행동에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바로…….”
크로노스는 순식간에 제우스의 코앞에 다가와서는 섬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심연의 결계 속 공간을 떠돌며 이 스킬을 익히게 됐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이젠 내가 그대에게 복수할 때다.”
크로노스는 공간 왜곡 스킬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제우스와 대규를 위기로 몰아넣었다. 그 스킬때문에 제우스와 대규는 쉽사리 크로노스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빌어먹을.’
대규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크로노스가 저 공간 왜곡 스킬을 쓰는 한 이 전투는 제우스와 자신에게 몹시 불리했다.
‘아니, 어쩌면 불리한 정도가 아니라 패배할지도 모른다.’
제우스가 아무리 신들의 왕이라지만 생명력이 무제한으로 있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포세이돈은 벌써 심연의 결계 안으로 끌려들어 가 버렸다.
‘제발 저 자식이 공간 왜곡 스킬을 쓸 때의 타이밍을 공략집이 알려 주기라도 한다면…….’
그때 공략집의 메시지창이 대규의 속마음에 감응하듯 이렇게 떠올랐다.
<크로노스의 공간 왜곡 스킬 감지 능력이 발동하기 시작합니다.>
정말일까?
그때 크로노스의 몸에서 하얀빛이 이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 크로노스는 대규 앞으로 다가와 자신의 검을 들이대고 있었다.
대규는 재빨리 네메시스의 방패를 들어 그의 공격을 막아 냈다.
‘지금 하얀 빛이 보였다. 그게 스킬을 쓰는 순간이라는 건가?’
하지만 빛이 보이는 순간은 너무 찰나의 순간이었다.
빛이 이는구나, 라는 걸 인식함과 동시에 공간 왜곡이 일어나는 식이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이 뭘 할 수가 있을까.
‘그래도 크로노스가 스킬을 사용하는 시점이라도 알아낸 게 어디야.’
대규는 절호의 기회를 노리기 시작했다.
되도록이면 크로노스가 그 스킬을 쓰지 않을 때를 노려 그를 공격하려고 했다.
불카누스의 벼락검을 들고 크로노스에게 달려들었다. 하얀빛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벼락검이 크로노스를 향해 날아가는 순간,
고오오오-
크로노스의 몸에서 다시 하얀 빛이 일기 시작했다.
“크윽!”
공간이 반전됐고, 크로노스를 향해 날아갔던 검날은 어느새 자신에게 날아와 자신의 몸을 가르고 있었다.
재빨리 피했지만, 어깨에 검날이 파고들었다. 상처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빌어먹을!’
타이밍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하지만 분명 언젠가는 공격이 먹힐 것이다.
대규는 시나티오 스킬을 발휘해 어깨의 상처를 회복했다. 그리고 다시 크로노스에게 달려들었다.
크로노스가 계속해서 공간 왜곡을 시전하기 때문에 그를 공격하려면 정확한 타이밍이 가장 중요했다.
여태까지 확인한 바에 의하면, 스킬이 시전되기 바로 직전에 하얀빛이 일어났다. 빛이 이는 순간과 스킬이 본격적으로 시전되는 사이 찰나의 순간이 존재했다.
‘그 전까진 녀석을 공격하다 스킬이 발동된다고 판단되면 바로 검을 거둬야 한다.’
그래야 벼락검이 자신을 공격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제기랄, 하지만 너무 찰나의 순간이야.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보였으면 좋겠는데.’
우선 대규는 온몸의 전투 감각을 끌어 올리기로 했다.
전투 감각을 끌어 올리면 시각, 촉각, 후각, 청각 등의 감각들이 주변 상황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다. 심지어 전투 감각이 높아지면 주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나 보이는 광경, 자신의 몸에 부딪히는 자극들이 슬로모션처럼 천천히 보이는 형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따라서 전투 감각을 끌어 올리면 조금이나마 크로노스가 스킬 시전하는 걸 천천히 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공격하기가 더 용이해질 거다.’
우우우-
온몸의 전투 감각을 끌어 올리자 몸이 이상하리만치 가벼워졌다.
그리고 주변의 모든 자극이 평소에 비해 10배는 강해진 것 같았다. 정확히는 자신의 감각 기관들이 10배로 예민해진 것이다.
이제 이 예민해진 감각들을 크로노스에게 집중할 때였다. 정확히는 크로노스의 스킬에 대해서 집중해야 한다.
대규가 전투 감각을 최대치로 끌어 올리는 사이, 제우스가 크로노스와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제우스는 섣불리 그를 공격하지 못했다.
방금 전 벼락으로 그를 내리쳤다가 그를 공격하긴커녕 오히려 자신의 아우이자 아군인 포세이돈을 심연의 결계로 넣어버렸다. 그건 실로 엄청난 전력상실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이제 포세이돈의 상대였던 휘페리온은 하데스를 잡으려고 날아갔다.
이곳에 와서 제우스와 대규를 동시에 상대하느니 우선은 다른 티탄 신족인 코이오스와 2 대 1로 하데스를 상대해 그를 먼저 패배시킬 심산인 것 같았다.
이제 크로노스는 자유자재로 공간왜곡을 하며 제우스를 갖고 놀고 있었다. 꼭 쥐를 갖고 노는 고양이 같았다.
“하하하, 언제까지고 이렇게 놀 수는 없겠지. 아들이여, 이젠 그대가 심연의 결계에 갇힐 차례다.”
번쩍!
눈 깜짝할 사이 다시 공간을 줄여서 크로노스는 제우스의 코앞에 나타났다.
제우스가 벼락을 들고 그의 목을 치려 했지만, 오히려 벼락은 자신의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제우스는 겨우 벼락을 거뒀다. 하지만 그때 크로노스의 검이 때를 놓치지 않고 제우스의 옆구리를 세차게 갈랐다.
“크으윽…….”
공격이 제대로 들어갔다.
그 때문에 좀전에 제우스의 목이 졸렸을 때처럼 그가 서 있는 뒤편의 허공에서 작은 틈이 다시 열렸다. 그리고 그 틈 속에서 붉은 손들이 촉수들처럼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대규는 눈을 감고 집중 상태에 들어섰다. 얼마 후 초집중 상태, 즉 플로우 상태에 들어섰다.
하지만 평소의 플로우 상태와 달랐다.
평소엔 플로우 검법을 쓰기 위해 오른손과 그 손에 들고 있는 벼락검이 푸른 빛을 띠었지만, 지금은 대규의 두 눈동자에 푸른빛 이채가 어려 있었다.
온정신과 생각을 집중해서 크로노스가 공간 왜곡 스킬을 쓰려는 시점을 포착해야 하니까 말이다.
지금은 그것만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두근두근.
심장이 뛸 때마다 크로노스와 제우스의 행동들이 아주 느린 슬로모션처럼 보였다.
크로노스는 다시 공간 왜곡을 써서 제우스의 코앞으로 다가갔다.
이때다.
대규 역시 쾌속비행 스킬을 써서 크로노스에게 매우 가까이 다가갔다.
대규가 갑자기 튀어나오자 크로노스는 살짝 놀랐지만 이내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다시 나와 싸우겠다는 건가! 하하, 하지만 이번엔 겁쟁이처럼 공격을 막기만 해선 안 될 것이다.”
“알고 있다.”
대규는 불카누스의 벼락검을 허리에서 꺼내 크로노스를 향해 맹렬히 휘둘렀다.
하지만 그는 비웃는 듯한 목소리로 대규를 보고 외쳤다.
“애송이 녀석! 너의 공격은 나에게 통하지 않는다! 이제 그대도 심연의 결계에 제우스와 함께 갇힐 때다.”
대규가 검을 휘두르는 순간 크로노스의 두 손 언저리에 하얀빛이 새어 나왔다. 스킬을 쓰려는 것이다.
크로노스의 두 눈이 붉게 빛났다. 그리고 그는 두 팔을 살짝 들어 올렸다.
지금이다.
보이진 않지만, 대규는 자신 주변의 공간들이 뒤틀리고 반전되고 있음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초집중의 플로우 상태라서 느껴지는 것 같았다.
공간이 왜곡되는 것은 자신을 둘러싼 공기들의 파장이 미묘하게 바뀌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느낌은 자신의 피부 세포 곳곳에 예민하게 느껴졌다.
확실히 감각이 예민해지긴 했다.
하지만 대규는 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그리고 검을 거두지도 않았다.
공간이 반전되기 시작한 순간 대규는 벼락검의 칼날을 자신의 몸 쪽 방향으로 바꿔 버렸다.
찰나의 순간 크로노스가 그것을 눈치채고 놀라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대규의 칼은 자신의 가슴팍을 향해 맹렬히 날아들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공간은 완전히 반전돼 버렸다.
푹, 푸욱!
화르르륵!
화염 돌풍이 그들 사이에서 솟구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크로노스의 가슴팍에서 분수처럼 핏줄기가 흘러나왔다.
크로노스는 치명상을 입고 휘청거리며 대규에게 말했다.
“네, 네 녀석…….”
대규는 치명상을 입은 그를 바라보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성공이다.
공간 왜곡이 들어가기 시작하는 타이밍을 노려 자기 자신을 찌르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그의 칼날은 반대로 크로노스의 몸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면 자신이 위험해질 뻔했다.
치명상을 입은 크로노스는 공간을 늘려서 저 멀리 도망쳤다.
하지만 대규는 옵티뭄에 올라타 쾌속 비행 스킬을 이용해 그를 끈질기게 쫓아갔다.
크로노스가 다시 한 번 공간 왜곡을 사용하기 전에 대규는 그를 향해 스킬을 날렸다.
레툼 익투스!
수십 개의 화염 돌풍이 크로노스를 휩싸며 공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크로노스는 쉽게 쓰러지지 않았다.
역시 티탄 신족의 왕답구나.
그때였다.
우르릉, 쾅쾅쾅!
보랏빛 하늘에서 구름들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곧 제우스의 우렁찬 목소리가 대규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이그니스(Ignis)!”
그러자 구름 속에서 수직으로 벼락들이 낙하했다.
하지만 그 벼락들은 여태껏 봐 왔던 제우스의 벼락들과 달랐다. 벼락들은 무지개처럼 영롱한 오색의 빛을 띠고 있었다.
수직으로 낙하한 그 무지갯빛 벼락들은 이제 크로노스를 향해 정확하게 날아갔다.
대규는 무지개 벼락이 날아가는 궤도를 향해 다시 한 번 벼락검의 화염 돌풍을 날렸다.
“흐라압!”
휘이이잉-!
화르륵!
그러자 무지갯빛 벼락과 화염 돌풍이 합쳐지면서 돌풍 근처에 벼락 자기장들이 빠르게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벼락과 화염을 품은 거대한 돌풍이 크로노스를 휘감았다.
“크으으윽……!”
돌풍 안에서 크로노스의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지만 그는 아직 죽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공간을 늘리며 빠르게 도망치고 있었다.
대규는 옵티뭄을 타고 날아갔다. 엘릭서를 마신 뒤 마나를 풀로 채운 뒤 다시 한 번 쾌속 비행 스킬을 써서 광속의 스피드로 날아갔다.
‘초월자의 육체가 된 덕분에 지금의 마나 한계량으로 이 쾌속 비행 스킬을 전에 비해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돼서 다행이다.’
이제 그는 돌풍에 휘감겨 있는 크로노스와 대치했다.
대규는 검을 뽑아 들고 레툼 익투스를 날렸다.
크로노스는 돌풍 속에 갇혀 있지만, 다시 공간 왜곡 스킬을 쓰려고 했다.
그의 몸이 하얗게 빛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규의 레툼 익투스가 한발 더 빨랐다. 그리고 그의 오른팔은 어느덧 푸른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레툼 익투스!”
화르르륵!
화염 돌풍들이 크로노스의 몸을 처참하게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크노로스도 지지 않고 대규를 향해 자신의 검을 휘둘렀다.
그 순간, 다시 한 번 구름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제우스가 방금 전 봤던 무지갯빛 벼락을 다시 소환한 것 같았다.
벼락이 대규와 크로노스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때 크로노스가 씨익 웃었다.
공간 왜곡 스킬이 발동됐고, 공기의 파장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이대로라면 대규가 저 벼락에 맞게 될 것이다.
하지만 공간이 반전됐음에도 불구하고 그 벼락은 크로노스의 머리에 정확히 꽂혀 들어갔다.
“끄아아악!”
크로노스의 입에서 고통에 찬 비명이 튀어나왔다.
그는 벼락을 맞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이때 최후의 일격을 나려야 했다.
대규는 재빨리 다시 한 번 정신을 집중해 플로우 상태로 들어가 크로노스를 향해 그간 갈고닦은 플로우 참파 검법을 시전했다.
서걱, 서걱!
화르르륵!
검기와 화염돌풍이 마구 뒤섞이며 크로노스의 몸을 난도질하듯 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