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9
269화 아자토스 (11)
대규는 공략집 창에 떠오른 몇 개의 메시지에 의아했다.
‘응? 녀석이 지닌 스킬들은 시전할 수 있는 스킬들이 아니라 녀석의 생리적 리듬 과정이자 삶의 일부라고?’
그렇다면 지금 왕좌 위에서 불고 있는 먼지 폭풍과 이 뜨거워지고 있는 공간의 열기 역시 지금 녀석이 스킬을 발휘하고 있는 거란 말인가?
뭐가 뭔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녀석이 지닌 스킬들은 패시브 스킬과 약간 개념이 비슷한 것 같았다.
하지만 보통 패시브 스킬들은 자잘한 것들이 많았으며, 공략집의 설명처럼 저렇게 위협적인 공격 스킬들로는 쓰이지 않았다.
‘역시 외계인들의 왕이라 다른 건가?’
하지만 더욱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대규의 귓가에 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꼭 공략집의 사용해 상대방의 속마음을 들을 때와 비슷했다.
하지만 그것은 누군가의 속마음이 아니라 분명 대규를 향해 말을 걸고 있었다.
‘판테온의 신이여, 안녕하신가?’
대규는 눈을 감고 그 목소리에 집중했다. 목소리는 상당히 낮은 톤이었으며 이상하게도 불쾌한 끈적임이 느껴졌다. 게다가 듣자마자 소름이 끼치는 끔찍한 목소리였다.
꼭 아우터 갓들이 연주했던 기괴한 음악 소리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목소리는 계속해서 대규에게 말을 이었다.
‘나 아자토스를 알현하러 온 신은 티탄 신족 크로노스 이후로 그대가 처음이군.’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아자토스?
그렇다면 지금 저 왕좌 위에서 불고 있는 먼지 폭풍이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인가?
이제 대규가 떠 있는 공간은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었다.
아무리 장비들을 동원해 마법 저항력을 높여도 더 이상 열기를 참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저 열기는 녀석이 지닌 패시브 스킬인 먼지 폭풍의 위력인 것 같았다.
먼지 폭풍 스킬은 주변의 먼지들과 수소들을 끌어모아 폭풍을 일으키며 뜨거운 열을 발산해 주변의 공간을 포식하는 스킬이었다.
녀석은 현재 그 스킬을 발휘 중이었다. 그 증거로 먼지 폭풍 주변에 있는 암흑 공간이 서서히 일렁이면서 폭풍 속으로 천천히 흡수되고 있었다.
‘너무 뜨거워!’
신의 육체를 지니고 있는 자신도 점점 버티기 힘들어졌다.
안 되겠다.
대규는 자신의 오른 팔목에 장착하고 있는 네메시스의 방패를 바라보았다.
네메시스의 방패엔 헤파이스토스가 장착해 준 이타콰의 얼음 조각이 있었다. 그 얼음 조각은 무시무시한 냉기를 뿜어내는 아티팩트이니 분명 이 열기가 가득한 공간에서 이로운 효과를 발휘해 줄 것이다.
팔찌 형태의 방패를 작동시키자 곧 오른손에 황금빛 방패가 들렸다.
이제 아자토스의 왕좌에서는 더더욱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파파팡!
“크윽…….”
열기가 왕좌로부터 원형의 공기 파장을 그리며 대규를 향해 뿜어져 왔다.
대규는 반사적으로 오른손의 황금 방패를 들어 그 열기를 막았다.
그 순간 방패에 새겨진 괴물뱀 아이기스가 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솨아아-
꼭 가스가 새는 것 같은 소리였다.
‘이상한 걸? 평소엔 끼에엑, 하는 괴상한 비명만 내질렀던 녀석인데…….’
그리고 아까부터 그전과 같은 뜨거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시원한 느낌이 드는 건 자신만의 착각인 걸까?
대규는 자신이 들고 있는 네메시스의 방패를 살펴봤다.
방패에 새겨진 아이기스의 입에서 서리같이 하얀 빙결 입김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 때문에 왕좌에서 뿜어져 나온 열기들은 그 입김과 부딪히며 사그라지고 있었다.
물론 아자토스의 먼지폭풍이 내뿜는 열기도 만만치는 않았다.
이 얼음의 조각은 본래 주변의 모든 것을 얼려 버릴 수 있는 위력을 지닌 아티팩트였다. 본래라면 아이기스의 입에서 나오고 있는 저 하얀 입김이 이 공간을 얼려 버려야 했다. 하지만 그 입김은 단순히 열기를 잠재울 뿐이었다.
심지어 열기는 이제 아이기스의 차가운 입김을 녹였고, 방패 주변엔 입김이 녹아 생긴 영롱한 이슬이 맺혀 있었다.
‘어쨌든 이 방패 덕분에 녀석의 열기를 잠재울 수 있게 됐다. 좀 살 것 같군.’
대규는 계속해서 아이기스의 빙결 입김으로 먼지 폭풍의 열기를 막았다.
그러자 아자토스가 대규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호오, 내 열기를 막다니, 대단하구나. 게다가 네 녀석이 그 방패에 장착하고 있는 물건은 우리 외계인의 힘을 지닌 아티팩트로군. 그렇다는 건 우리 외계인들을 네가 쓰러뜨렸다는 의미겠지. 하긴, 나를 이렇게 찾아올 정도라면 너는 꽤나 실력자겠지.’
대규는 왕좌 위에서 소용돌이 치고 있는 먼지 폭풍을 바라보며 외쳤다.
“그렇다. 나는 너를 해치우고 새로운 전쟁의 신 칭호를 얻을 것이다.”
그 말에 아자토스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엄청난 패기로군. 좋아, 나는 너처럼 강력한 존재들을 보면 깊게 매료되지. 후후, 판테온의 존재 중에서 여태껏 나를 매료시켰던 건 티탄 신족의 크로노스밖에 없었는데… 이거 참 흥미롭군. 너 같은 존재가 나타난 게 대체 몇천 년 만이더냐!’
대규는 그 말을 듣고 속으로 어이가 없었다.
외계인 주제에 참으로 건방진 녀석이었다.
마치 자신이 판테온의 신들보다 우위에 있다는 식의 저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규는 방패로 여전히 녀석이 뿜어내는 먼지 폭풍의 열기를 막아 내며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흥, 미안하지만 난 너를 매료시키려고 이곳에 온 게 아니다. 나는 너를 쳐부수러 왔다. 게다가 티탄 신족 크로노스가 너를 매료시켰다고? 너는 그의 부하 아니었나?”
그러자 아자토스가 불쾌하다는 듯 외쳤다.
“뭣이?!”
“너는 그의 부하로 들어가서 다른 판테온의 신들과 몇천 년 전에 전투를 벌였던 것 아닌가? 흥, 크로노스의 부하 주제에 그를 평가하는 듯한 말을 하다니, 건방진 녀석이군.”
그러자 아자토스의 음성에 노기가 띠기 시작했다.
‘이 불경한 놈! 외계인들의 왕인 나 아자토스는 누구의 명령도 따르지 않는다. 나와 크로노스는 부하와 주군 관계가 아니라 동등한 협약 관계였다! 어디서 그런 헛소문을 듣고…….’
하지만 대규는 지지 않고 이렇게 맞받아쳤다.
“그렇다면 왜 너의 부하들이었던 다른 외계인 몬스터들은 거인들의 지하 감옥 카르케르에 갇혀 있었던 거지?”
조목조목 반박하는 대규의 말에 아자토스는 여전히 노기를 드러내며 말했다.
“그건 다른 외계인 몬스터 녀석들이 나약하고 유약했기 때문이다! 그 녀석들은 외계인이면서도 결국 크로노스에게 무릎을 꿇었지.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나는 이곳, 나의 궁전의 왕좌에 남아서 우주를 계속 포식해 왔다! 한마디로 나는 네 녀석이 해치워 온 그 한심한 외계인들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란 말이다.’
하긴, 그럴지도 모르겠군.
대규는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봤던 거대한 문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문에는 분명 외계인들의 모습과 아자토스로 보이는 거대한 운석의 모습이 조각돼 있었다. 조각 속의 외계인들은 아자토스를 고개 숙여 경배하고 있었다.
확실히 녀석은 외계인들 중에서 최정점의 위치에 있는 왕인 것 같았다.
지금 녀석이 발휘하고 있는 스킬 역시 대규로선 막아내기 매우 까다로웠다.
아자토스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나는 그 녀석들과 다르다! 그 녀석들은 하찮은 녀석들이지만 나는 이 우주의 진정한 지배자다. 그래서 크로노스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그 녀석들 따위는 필요 없다!’
하지만 계속해서 나머지 외계인들을 비하하는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코웃음이 나왔다.
애초에 아자토스가 외계인들의 왕이라고 불릴 수 있었던 건 그 밑에서 그를 경배하고 따랐던 다른 외계인 몬스터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본래 윗사람, 즉 왕이나 신들은 자신을 믿고 따르는 아랫사람이란 존재가 있기 때문에 더욱 빛나는 것이다.
대규 역시 그랬다. 자신이 아무리 신이라지만 자신을 따르는 영웅이나 정령들이 없다면 신의 지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부대에서 자신을 따르는 323명의 영웅이 있기 때문에 신으로서의 자신의 위치가 더욱 빛나는 것이다.
하지만 아자토스는 그런 부하들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다.
이딴 녀석이 왕이라니, 외계인 녀석들도 참으로 꼴사나운 녀석을 왕으로 추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자토스는 이제 이렇게 말했다.
‘어쨌든 너는 아주 특이한 신이다. 이곳에 이렇게 온 거로 보아 분명 내 왕좌를 노리고 온 것이겠지?’
“그렇다.”
‘후후, 왕좌를 얻는 건 꿈 깨라. 이쯤 해 두고 돌아가거라. 하지만 이렇게 날 찾아온 너의 패기는 높게 산다. 이쯤에서 그냥 돌아간다면 이 우주의 왕 아자토스가 너에게 보상으로 작은 은하 정도는 내려줄 수 있다.’
“작은 은하?”
‘그래. 보아하니 너는 한 은하계의, 먼지만 한 행성 출신의 존재로구나. 네가 잡았던 다른 외계인 보스 몬스터들이 다스렸던 은하계들이 네가 살고 있는 은하계보다 더 클 것이다. 그 정도의 은하계를 너에게 선물해 주마.’
대규는 은하계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
오직 새롭게 얻게 될 판테온 전쟁의 신 칭호에 관심이 쏠려 있었다.
“싫다면?”
‘그렇다면 너는 나에게 잡아먹히게 되겠지!’
어느새 왕좌 위에서 요동치고 있는 먼지 폭풍은 매우 거대해져서 대규가 들어온 이 공간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먼지 폭풍 안쪽과 바깥쪽에서는 검은색의 전자기장과 벼락 등이 사정없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폭풍의 풍압과 뿜어내는 열기 때문에 두 눈을 뜨는 것조차 힘들었다.
대규는 네메시스의 방패로 먼지폭풍이 방출하는 열기와 벼락 등을 막아 내며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녀석의 형태가 점점 변하고 있었다.
그때 공략집이 떠올랐다.
<아자토스가 먼지폭풍의 형태에서 별의 형태로 외관을 변화합니다. 그 과정에서 어마어마한 핵융합 에너지를 외부로 방출합니다.>
아무래도 핵융합 방출 단계로 넘어간 것 같았다.
‘제기랄, 아까보다 더욱 큰 에너지가 녀석으로부터 뿜어져 나오잖아!’
먼지 폭풍은 이제 단단한 결집을 이루며 운석의 형태로 변하고 있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단순히 뜨거운 열기만 방출했지만 이젠 온갖 자기장과 벼락들이 대규를 향해 날아왔다.
“크윽!”
대규는 아이기스의 방패로 열심히 그것들을 막아 냈다. 하지만 단순히 방어하는 것만으론 아자토스를 쓰러뜨릴 수 없었다.
대규는 방패에 새겨져 있는 아이기스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외쳤다.
“나를 우습게 보지 마라!”
제우스의 벼락을 불러내야 한다.
예전에 아이기스의 방패와 네메시스의 방패를 합치면서 불러낼 수 있는 제우스의 벼락의 위력이 더욱 강해졌었다. 거기다가 최근 이타콰의 얼음 조각까지 합쳤으니 그 벼락의 위력은 냉기까지 품었을 것이다.
아이기스의 얼굴을 바라보자 곧 그와 눈이 마주쳤다.
아이기스의 벌어진 입에선 끊임없이 하얀 입김이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열기 때문에 입김이 녹아 이제 방패는 흥건히 젖어 있었다.
곧 대규의 눈앞에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제우스의 벼락을 부르시겠습니까? Yes/No]
Yes!
참으로 오랜만에 불러보는 벼락이었다.
곧 대규와 아자토스가 있는 공간에 우중충한 먹구름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먹구름들은 아자토스가 형성하고 있는 거대한 운석 위에 안착했다.
우르릉! 콰콰쾅!
예전에 벼락을 불러냈을 때보다 몇 배는 큰 굉음이 공간을 갈랐다.
그리고 갑자기 섬광이 번쩍이며 캄캄한 우주 공간이 밝아졌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눈이 부셨다. 대규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콰콰쾅-!
거대한 벼락이 운석을 정확히 꿰뚫었다.
그것들은 단순한 벼락이 아니었다.
벼락의 한쪽은 검붉은색이면서 뜨거운 불길을 품고 있었고, 나머지 반대쪽은 푸르렀으며, 차가운 냉기를 품고 있었다.
얼음과 불의 기운을 동시에 품고 있는 벼락이 운석을 꿰뚫는 순간, 운석 내부와 외부에서 튀고 있던 전기장, 벼락 들이 엄청난 반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으으윽!’
귓가에 아자토스의 신음이 들려왔다.
좋았어.
저 건방진 녀석이 괴로워하니 대규는 몹시 기분이 좋았다.
그 순간 아자토스가 기함을 했다.
그와 동시에 엄청난 에너지가 운석의 한 가운데로부터 방출됐다.
파아아앙!
바로 핵융합 에너지였다.
그 에너지는 제우스의 벼락을 압도한 뒤 바로 대규를 향해 인정사정없이 날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