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3
263화 아자토스 (5)
대규는 공략집으로 파베르와 다른 대장장이 정령들의 속마음을 들여다보기로 했다.
확실히 대규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엔 단순히 승리를 기원하는 순수한 의도만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곧 파베르와 정령들의 속마음이 대규의 귓가에 들려오기 시작했다.
‘지금 전쟁의 신 아레스는 건방지고 오만해서 자기 잘난 줄만 알지, 전투에서 무기의 중요성을 전혀 모른다니까! 그 무식한 오크 부대원들도 그렇고…….’
웬 아레스 욕이지?
연이어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나마 전쟁의 여신 아테나 님 덕분에 우리 대장간이 먹고사는 거지. 여신은 무기의 중요성을 잘 알아서 우리 대장간에 의뢰를 많이 했으니까. 그 덕에 우리들이 배를 곯지 않고 살 수 있게 된 거야.’
대규는 속으로 어리둥절했다.
대체 아레스와 아테나에 대한 생각이 자신이 외계인 부대와의 전투에서 승리해 전쟁의 신이 되는 것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다.
확실한 건 여기 있는 정령들은 아레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같은 신이지만 아테나와 달리 아레스에겐 존칭도 붙이지 않을 정도이니까 말이다.
대규는 파베르를 바라보았다.
이제 그는 좀전에 대규가 자신에게 보여 줬던 불카누스의 벼락검과 손목의 팔찌 형태로 줄어든 방패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단순히 자신의 스승인 헤파이스토스가 만든 무기를 경탄스럽게 바라보는 느낌이 아니었다.
뭔가, 좀 더 욕심이 있는 눈빛이었다.
그제야 파베르의 본심이 귓가에 들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기 대규 님이 새로운 전쟁의 신이 되면 달라질 거야! 대규 님은 우리 대장간에 의뢰를 많이 하고, 무기 제작에 관심이 많으시잖아. 그러니까 이분이 전쟁의 신이 되면 덩달아 무기 의뢰도 많아질 거고! 그러기 위해선 지금부터 대규 님께 잘 보여야겠지. 미래의 전쟁의 신, 그리고 우리 대장간 번영의 운명을 쥐고 있으신 분이니까…….’
이건 꼭 정권이 바뀔 때 정권과 특정 기업관의 정경 유착 관계 같잖아.
하지만 뭐 나쁠 건 없었다. 파베르가 나쁜 꿍꿍이를 속으로 벌이고 있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파베르와 이곳의 대장장이 정령들은 단지 자신들의 대장간이 번영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대규가 전쟁의 신이 되길 고대하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대규는 기대 가득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파베르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단순히 전쟁의 신의 칭호를 얻게 되면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판테온에서 전쟁의 신이 되고 나면 제우스, 포세이돈, 하데스와 함께 티탄 신족들과의 최후의 전투에만 참여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정령들의 입장은 아닌 것 같았다.
‘확실히 내가 전쟁의 신이 되면 이곳 판테온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되겠지.’
이 대장간처럼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곳은 더욱 발전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래서 아테나와 아스클레피오스가 그런 말을 한 건가? 내가 전쟁의 신이 되면 판테온이 대대적으로 바뀔 수도 있다고 했지.’
그제야 전쟁의 신이란 지위가 지닌 권력과 파워가 실감 나기 시작했다.
대규는 파베르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쨌든 파베르, 제작한 링거 장치는 고맙습니다. 이번 전투에서 꽤 유용하게 쓰일 거예요.”
“아닙니다. 대규 님이 그 장치를 이용해 승리한다면 저와 저희 대장간엔 그만한 영광이 없죠.”
그와 동시에 그의 속마음이 들렸다.
‘내가 만든 장치로 대규 님이 승리를 해서 새로운 전쟁의 신이 되면 우리 대장간의 홍보 효과도 엄청날 거다! 우리 대장간이 제작한 무기와 장비 덕분에 대규 님이 전쟁의 신이 됐습니다, 라고 말할 수가 있잖아. 생각만 해도 기분이 째지는걸!’
벌써부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다니.
아무리 파베르가 대장장이라지만 이 대장간은 어쨌든 판테온의 ‘상업’ 구역에 있는 장소였다.
‘확실히 장사꾼은 장사꾼이구만.’
대규는 파베르에게 인사를 하고 헤파이스토스의 대장간을 나섰다. 자신이 전쟁의 신이 돼서 대장간이 번영하면 좋긴 좋을 것 같았다.
대장간을 나와 판테온의 거리를 거니는 데 온갖 상점의 주인들이 대규를 알아보고 접근하기 시작했다.
“대규 님! 대규 님 아니십니까! 혹시 저희 가게 물건엔 관심이 없으신지요?”
“잠깐이라도 저희 가게에 들러 주세요! 이번에 들어온 진귀한 물건들이 있답니다!”
“저희 가게 색지에 사인 좀…….”
그들의 속마음 역시 파베르와 비슷했다.
대규가 최후의 외계인 부대를 해치울 자격을 얻었다는 걸 소문을 통해 들은 것이다. 그리고 곧 대규가 전쟁의 신이 될 거라 예상하고 미리부터 잘 보이려는 것이다.
그래야 자신들의 생업에 이득이 되니까 말이다.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는 건가.’
꼭 권력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 달라붙는 인간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한편으론 씁쓸했다.
‘이곳도 인간 세상과 비슷하구나.’
대규는 발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대규에게 접근하고 따라붙는 상인이 있었다.
낯익은 얼굴, 바로 차이니즈 오크였다.
‘저 녀석 얼굴은 까먹을 수가 없지.’
저 녀석은 예전에 대규가 인간이었을 시절, 아테나의 허락을 받아 판테온에 처음 왔을 때 대규를 깔보고 바가지를 씌우려 했다 오히려 역으로 망신을 당한 녀석이었다.
하지만 이후 대규가 신이 된 이후 상업 구역의 그 어떤 상인들보다도 심하게 굽실됐다.
빠른 태세 전환이었다.
이제 녀석은 대규가 새로운 전쟁의 신이 될 거라는 소문이 돌자 아예 대규의 발 앞에서 오체투지를 하고 있었다.
“이 차이니즈 오크는 대규 님이 승리를 기원합니다! 대규 님을 위해선 무엇이든 기꺼이 할 용의가 있답니다!”
저렇게 대놓고 아부하면 쪽팔리지도 않나. 좀 적당히 하지.
하지만 차이니즈 오크는 그러거나 말거나 알랑거리는 목소리로 계속해서 절을 해댔다.
대규가 발이라도 핥으라 하면 핥을 기세였다.
‘그것보다 좀 비켜 주지. 뭐, 너 좋을 대로 해라.’
대규는 헤르메스의 장화를 이용해 황급히 판테온의 상업 구역을 빠져나왔다.
사람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귀찮게 하는 게 짜증 났기 때문이다. 특히 저 차이니즈 오크의 오체투지는 경로를 방해하는 것이 아주 귀찮았다.
상업 구역을 빠져나와 그는 현자 센텐티오가 있는 켄타로우스의 부락으로 향했다.
의뢰해 둔 엘릭서 100병을 받아야 할 때였다.
순간 이동 기술로 순식간에 부락에 도착해 센텐티오가 살고 있는 세계수 나무 밑동 근처로 갔다.
그의 거처에 대고 노크를 하자 센텐티오가 그를 맞이했다.
“오셨군요. 마침 다 완성이 됐답니다.”
그는 대규를 거처 안쪽 실험실로 끌고 갔다. 실험실의 테이블 위엔 거대한 통에 엘릭서가 가득 담겨 있었다.
엄청난 양이다!
“이것이 100병 분량입니다.”
대규는 그 말을 듣고 그의 눈앞에 링거 장치를 내밀며 말했다.
“그럼 센텐티오, 이 안에 엘릭서 50병 분량을 채워 주세요.”
“이게 뭡니까?”
“일종의 링거 장치입니다. 엘릭서를 전투 중에 마시는 것보다 이것을 차고 혈관에 계속 주입하는 편이 훨씬 효율적일 것 같아서요.”
“…대단한 장치로군요.”
센텐티오는 대규의 명령에 따라 엘릭서 50병 분량을 링거 장치 안에 붓기 시작했다.
콸콸콸콸.
정확한 양을 붓고 나머지는 거대한 유리병에 넣어 대규에게 건넸다.
“전쟁에서 승리하시길 진심으로 기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대규는 그에게 인사를 하고 나왔다.
이제 들러야 할 곳은 마지막 한 군데만 남았다.
바로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전이었다.
이 엘릭서 링거는 혈관의 정확한 위치에 바늘을 찔러 넣어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심각한 부작용이 있을지도 몰랐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의술의 신이니 정확히 혈관의 위치를 가늠해 바늘을 찌를 수 있겠지. 만약 그가 내 전투에 함께 대동하지 못한다 해도 그에게 정확한 혈관 위치를 배워올 순 있겠지. 그리고…….’
대규의 머릿속에 한 여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바로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전에 남아 있는 여자였다.
샤우그너 판과의 전투에서 구출됐던, 아기 쵸쵸를 임신했던 임신부였다.
나머지 여자들은 다 배 속의 아기 쵸쵸들을 지우겠다고 했지만, 그녀는 그것을 낳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녀는 잘 지내고 있을까?’
대규는 아스클레피오스를 만나러 간 김에 그녀의 동태도 살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오늘도 자신의 실험실에서 괴상한 실험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는 대규가 다가오자 그를 알아보고 외쳤다.
“대규 님 아니십니까! 여긴 어쩐 일로?”
“부탁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아스클레피오스는 끼고 있던 수술용 장갑을 벗으며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전투 준비 중으로 한창 바쁘실 때가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런데 지금 뭐 하고 계신 겁니까?”
대규는 수술대 위에 놓인 괴상한 생명체를 바라보았다.
대규가 온 걸 알아채기 전까지 그는 평소처럼 수술대 위에서 뭔가를 사부작대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외계인 몬스터의 사체였다.
그런데 처음 보는 외관이었다.
“이게 뭡니까?”
대규가 수술대 위의 사체를 가리키자 아스클레피오스가 대답했다.
“아, 이건 아테나 님이 해치우신 외계인 부대의 몬스터 사체입니다. 해부 실험을 하기 위해 이렇게 얻어 왔지요.”
여전하군.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실험이 거의 막바지라서요. 풀루쓰! 여기 메스를 가져다 줘.”
그 말을 들은 대규는 놀랐다.
지금 대체 누구에게 명령하는 거지? 풀루쓰는 누구일까?
그때 저쪽 구석에서 뭔가가 뽈뽈거리며 다가왔다.
‘저것은!’
바로 아기 쵸쵸였다. 아니, 이제 아기가 아니라 청소년 쵸쵸 정도라고 해야 맞겠지만 말이다.
성인 정도의 성체 사이즈는 아니었고 아기, 혹은 어린이보단 컸다.
“이 녀석은……?”
대규가 묻자 아스클레피오스가 대답했다.
“여기 계셨던 여성분이 낳은 녀석이랍니다. 벌써 청소년이 됐죠.”
“그 여성분은 어디 있습니까?”
아스클레피오스는 청소년 쵸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녀가 출산한 뒤 제우스 님이 직접 제 신전에 방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기억을 손수 지워 주시고 현실 세계로 보내 버렸죠.”
그랬구나. 아주 신속하게 처리를 했군.
“하지만 이 녀석은 여기 남겨 둬 저의 조수로 써도 된다고 특별히 허락을 해 주셨습니다. 항상 이 신전에 저만 있어서 외로웠는데 아주 잘됐습니다. 게다가 제가 그녀가 출산할 때 녀석을 받아서 그런지 저에게 각인이 돼서 아주 잘 따른답니다. 물론 요즘엔 사춘기가 와서 좀 반항을 하려 하는 것 같은데…….”
나머지 쵸쵸들도 대규에게 각인이 돼서 태어나자마자 잘 따랐었다.
‘요즘 그 녀석들을 확인하지 못했잖아.’
대규는 인피니투스를 열어 아기 쵸쵸들을 꺼내 봤다.
녀석들 역시 아기가 아니라 청소년이 돼 있었다.
“@#$%!”
그들을 보자 아스클레피오스를 도와주던 쵸쵸 풀루쓰는 반가운 듯 다가갔다. 그리고 그들은 저희끼리 열심히 놀기 시작했다.
대규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들을 아예 이곳에서 기르는 게 어떨까요? 녀석들 훈련을 잘 시키면 아스클레피오스 님도 든든한 조수들을 얻게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러자 아스클레피오스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말했다.
“흐음… 그건 좀 생각을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어쨌든 우리 풀루쓰가 저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군요. 제가 낳은 건 아니지만, 꼭 제가 아버지처럼 느껴진답니다.”
흐뭇한 표정으로 풀루쓰를 바라보는 아스클레피오스의 얼굴엔 아빠 미소가 번져 있었다.
“그런데 대규 님, 이곳엔 어쩐 일이십니까?”
“아, 부탁할 게 있어서 왔습니다. 이야기를 시작하도록 하죠.”
대규는 자신이 제작해온 엘릭서 링거 장치를 보여 주며 설명을 시작했다.
“…이 장치를 사용하기 위해선 팔뚝의 정확한 혈관 위치에 바늘을 꽂아야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 위치가 어딘지 잘 모릅니다.”
그러자 아스클레피오스는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아주 간단한 일입니다! 우선 혈관을 잘 찾아야죠. 전문 용어론 라인을 잡는다고 합니다만…….”
“그럼 당신이 제 전투 때 와서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아스클레피오스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건 곤란합니다. 이번 전투는 특히나 전쟁의 신 칭호를 얻기 위해 하는 것 아닙니까? 대규 님 말고 저 같은 다른 신이 전투에 개입했다간 나중에 뒷말이 나올지도 모른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