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3
223화 귀아스페룸 (4)
하지만 촉수 꼬리는 이제 대규의 오른쪽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꼬리 끝부분에는 문어나 오징어의 다리에나 붙어 있을 만한 작은 흡착판들이 촘촘히 달려 있었다.
뽁!
흡착판들이 정확히 대규의 오른쪽 눈동자에 붙었다.
“끄악!”
곧 대규가 이식한 크아이가의 눈동자가 흡착판에 붙은 채로 눈꺼풀 안에서 빠져나갔다.
파괴신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입가에 지으며 자신의 눈이 있어야 할 눈꺼풀 안에 대규의 눈동자를 끼워 넣었다.
곧 눈동자를 얻은 파괴신은 눈을 껌뻑거렸다.
대규는 두 손으로 오른쪽 눈을 부여잡고 신음 소리를 냈다. 그때 공략집의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파괴신, 즉 심연의 거주자가 전투를 마치면 눈동자는 다시 돌려줍니다.>
제기랄!
왜 눈을 이식하고 이 녀석을 불러내면 외계인 능력을 랜덤하게 주는지 알겠다.
눈을 이식하고 파괴신을 불러낸다는 게 이렇게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줄이야!
‘아무래도 이 고통에 대한 대가로 외계 능력을 준다는 것 같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이식 안 했다!
‘아니야. 그래도 유용한 능력을 준다잖아. 그게 아직 뭔진 모르겠지만, 일단 참자, 참아…….’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크아이가의 눈동자를 낀 거북이 괴물, 심연의 거주자가 쳘혈의 드래곤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심연의 거주자는 날개가 없지만, 공중 위를 열심히 달려갔다.
거북이처럼 생겨서 느릴 줄 알았는데 제법 스피드가 빨랐다. 심연의 거주자는 드래곤의 모가지를 덥석 물어 버렸다.
하지만 드래곤 역시 지지 않고 꼬리로 심연 거주자의 몸통을 휘둘러 쳤다.
콰아앙!
엄청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심연의 거주자는 거북이 등딱지 껍질로 드래곤의 꼬리를 막아 냈다.
하지만 꼬리가 부딪힌 껍질 부분이 푹 파였다.
‘엄청나군.’
하지만 심연의 거주자는 멀쩡해 보였다.
드래곤은 이제 더더욱 휘청이고 있었다. 구더기들이 온몸을 뜯어먹는 것도 모자라 이제 이 이상한 괴물이 자신을 괴롭히고 있었다.
드래곤은 다시 한번 주둥이를 벌려 브레스를 뿜었다.
까만 입김이 금세 주변에 차올랐고, 대규는 오른쪽 눈의 통증을 느끼며 옵티뭄을 타고 브레스를 피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이래서 파괴신이구나…….’
심연의 거주자인 거북이 괴물은 드래곤을 서서히 제압하고 있었다.
드래곤은 브레스를 뿜어냈지만 조금 전 심연의 거주자에게 목을 물어뜯겨서 그런지 브레스의 위력이 좀 전보다 약해졌다.
입김이 연기처럼 뭉게뭉게 나오지 않고 한풀 꺾여 옅은 안개처럼 나올 뿐이었다.
그래도 그 위력은 위협적이었다.
대규는 방패나 갑옷이 아니었다면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다.
‘그나저나 장관이구나.’
대규는 하늘 높이 날아올라 철혈의 드래곤과 심연의 거주자가 싸우는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거인들의 대장, 기간테스보다도 훨씬 거대한 생물들이 달라붙어 싸우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몸을 잔뜩 키운 신인 자신조차 끼어들 틈이 없는 살벌한 전투였다.
대규는 심연의 거주자에게 명령을 내리고 싶었다. 이제 저 드래곤 녀석의 눈을 공격해 달라고 하고 싶었다. 심연의 거주자가 물어뜯은 녀석의 목보단 눈알이 치명적인 약점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명령을 내려야 하지? 그리고 내가 명령을 내린다고 해서 그걸 들을까?’
크아이가의 눈은 파괴신인 심연의 거주자를 소환하는 능력을 지닌 아이템이다. 하지만 그것을 소환하는 것과 그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그래도 한번 해보자!’
대규는 심연의 거주자를 향해 소리쳤다.
“녀석의 눈을 공격해!”
하지만 그는 전혀 알아들은 것 같지 않았다.
혹시 외계인의 언어로 명령을 내려야 하나?
그때 공략집의 메시지창이 떠올라 이렇게 알려줬다.
<의식을 갖고 텔레파시를 보내면 심연의 거주자가 눈동자를 지닌 사용자의 명령에 복종합니다.>
그렇군.
대규는 속으로 열심히 생각했다.
드래곤의 눈을 공격해. 눈을 공격해라.
그 순간 심연의 거주자가 움찔거렸다. 그리고 여태껏 꽉 물고 놓아주지 않았던 드래곤의 목에서 입을 뗐다.
얼마 후 녀석은 드래곤의 등 위로 올라가 착 달라붙었다.
마치 거북이가 드래곤의 등 위에 올라탄 꼴이 됐다. 곧 대규의 눈동자를 떼 갔던 촉수 꼬리들이 드래곤의 얼굴 쪽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꼬리에 달린 흡착판들이 드래곤의 눈꺼풀에 가서 붙었다.
뽁! 뽁!
그리고 흡착판들은 드래곤의 눈꺼풀을 사방에서 잡아당겼다.
그 바람에 드래곤의 눈동자가 아주 크게 드러났다.
심연의 거주자는 드래곤의 등에서 얼굴 쪽으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입가에는 잔인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러자 드래곤의 목을 물어뜯었던 흉측한 송곳니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뭐 저렇게 생긴 이빨이 다 있냐.’
그것은 이빨인지, 뿔인지 생김새를 분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시커멓고 윤기까지 흐르는 게 보통 이빨은 아닌 것 같았다.
대규는 머릿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저 송곳니도 초월자 등급 무기 재료로 써도 괜찮겠는걸?’
그때 까만 송곳니가 드래곤의 눈동자 한가운데로 파고들었다.
쩌어억-!
심연 거주자의 송곳니는 대규의 사슬검도 뚫지 못했던 드래곤의 붉은 눈동자를 관통해 뚫고 들어갔다.
하지만 눈동자는 완전히 파괴되지 않았다.
눈동자의 내구도에 감탄하고 있는데 공략집의 메시지창이 떴다.
<철혈의 드래곤의 약점인 눈동자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사슬검을 휘둘러 공격하면 눈동자를 완전히 파괴할 수 있습니다.>
심연 거주자의 송곳니는 여전히 드래곤의 눈동자에 박혀 있었다.
대규는 메시지창을 보고 눈동자 쪽으로 얼른 날아가 사슬검을 하늘 위로 높게 쳐들었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눈동자에 검날을 찔러 넣었다.
콰지직!
파열음이 났지만, 눈동자는 아직도 멀쩡했다.
“그래? 그렇다면 이건 어떠냐!”
대규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플로우 상태에 돌입했다는 메시지창이 떠올랐고, 대규의 오른팔과 들고 있는 사슬검이 푸르게 빛나기 시작했다.
대규는 금이 가 있는 붉은 눈동자를 향해 다시 한 번 사슬검을 휘둘렀다.
디오니소스에게 썼던 플로우 검법, 참파(斬波)!
와장창!
드래곤의 눈은 대규의 난도질과 같은 참파에 완전히 깨져 버렸다.
붉게 빛났던 동공은 정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순식간에 회백색을 띠기 시작했다.
끄르르르르…….
거대한 신음이 드래곤의 목 안에서 새어 나왔고, 녀석은 서서히 추락하기 시작했다.
눈앞에 반가운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철혈의 드래곤을 해치웠습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양의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양의 마나를 흡수했습니다.]
[레벨이 5단계 상승했습니다.]
마지막 창의 내용을 본 대규의 눈동자가 커졌다.
‘5단계나 상승했다고?’
신이 된 이후 이런 비약적인 상승은 없었다.
대규의 몸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죽은 드래곤의 몸은 결국 깊고 깊은 땅속 지하로 추락했다.
대규는 밑으로 날아가 깊숙한 땅바닥에 쓰러진 드래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녀석의 몸을 촘촘히 뒤덮고 있는 귀아스페룸 비늘들이 눈에 들어왔다.
‘저것이 거인들의 강철!’
그때 저 위의 하늘 위에서 포탈이 열렸고, 심연의 거주자가 그 안으로 쑥 사라지는 모습이 보였다. 심연의 거주자가 사라지자마자 대규의 눈꺼풀 안에 빠져나갔던 크아이가의 눈동자가 다시 들어왔다.
쑤욱-
빠져나갈 때도 그렇지만, 다시 들어올 때도 상당히 불쾌한 느낌이었다. 눈에 먼지가 들어온 것 같은 이물감이 들었다.
“으윽!”
눈을 몇 번 깜빡거리자 이물감은 사라졌다.
대규는 다시 한 번 드래곤의 사체를 바라보았다.
곧 사체에서 밝은 빛이 나더니 등에 있는 비늘 중 한 부분이 후두둑 벗겨지기 시작했다.
비늘들은 곧 아주 잘 정제된 상태로 대규 눈앞에 떨어졌다.
그것을 바라보니 아이템 설명창이 떠올랐다.
[귀아스페룸(Gyasferrum)(등급 ???)
[티탄신족이 무기로 사용하던 거인들의 강철. 신화 등급을 뛰어넘는 무기를 제조할 수 있으며, 카오스보다도 혼돈스러운 위력을 발휘하는 극강의 철. 너무 위력이 강해 잘못 사용하면 주화입마에 들 수도 있다.]
드디어 얻었구나.
대규는 그 비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런데 그것에 손을 대는 순간 마치 보이지 않는 힘이 그의 손을 빨아들이기라도 한 듯 손이 비늘에 딱 달라붙어 버렸다.
“왜 이래?”
그리고 손을 타고 이상한 기운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규의 손끝이 검은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곧 검은색은 손끝에서부터 손목, 그리고 팔꿈치까지 잠식해 왔다.
몸속의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기분이 들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곧 온몸의 근육을 쥐어짜는 듯한 고통이 대규를 사로잡았다.
‘이, 이게 혹시 주화입마인가?’
아무래도 강철의 위력이 너무 강력해서 자신이 못 견뎌 내는 것 같았다.
다리 힘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고, 의식도 흐려지기 시작했다. 대규는 당장에라도 모든 걸 놓아 버리고 쓰러지고 싶었다.
하지만 쓰러지는 대신 이를 악물며 생각했다.
‘나는 신이다!’
신이라면서 고작 이 주화입마를 못 견뎌 낸다면 어쩌란 말이냐!
대규는 이를 악문 채 자신의 팔을 잠식하고 있는 검은 기운을 노려보며 생각했다.
‘내가 이기나, 네가 이기나 어디 한번 해보자!’
그렇게 마음먹은 순간 대규의 육체에서 밝은 황금빛이 아주 거세게 발산되기 시작했다. 평소엔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면 지금은 아예 자체 발광 수준이었다.
대규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황금빛은 어느새 팔을 서서히 잠식하던 검은 기운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곧 근육을 쥐어짜는 것 같았던 고통과 어지러움이 서서히 사라져 갔다.
마침내 검은 기운은 다 사라졌고, 대규의 손도 비늘에서 딱 떼어졌다.
‘이제 된 건가?’
대규는 다시 비늘에 손을 대 보았다. 하지만 좀 전과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보통의 단단한 비늘일 뿐이었다.
‘아니… 아까보다 촉감이 더 좋은 것 같고, 뭔가 상태가 더 나아진 것 같기도 한데, 나만의 착각인 건가?’
그때 공략집의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귀아스페룸의 시험을 성공적으로 통과했습니다. 거인의 강철이 당신을 진정한 주인으로 인정했습니다.>
<이제 귀아스페룸으로 초월자 등급 무기를 제작할 수 있습니다.>
이 강철… 강철 주제에 주인을 고르고 시험하려 들다니.
‘하긴, 괜히 진귀한 재료가 아닐 테니까. 그래도 건방지군.’
대규는 이제 시스템창으로 남은 시간을 확인했다.
공략집을 통해 수련 장소에서 있을 수 있는 최대 시간은 한 시간이다.
하지만 시간은 이제 1분도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나이스 타이밍!’
얼마 후 곧 대규 주변의 배경이 암흑으로 물들었다. 대규는 성공적으로 카르케르의 심연부를 빠져나왔다.
판테온의 세계로 돌아온 대규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생각했다.
‘그나저나 드래곤이 정말로 있었다니, 놀랄 일이야.’
그럼 이제 귀아스페룸도 얻었으니 헤파이스토스에게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방패도 맡겨야지.’
대규는 어느새 팔찌 형태로 변해 버린 네메시스의 방패를 바라봤다.
방패는 카르케르의 심연부에서 드래곤의 꼬리를 정통으로 맞은 탓에 금이 가 있었다. 팔찌 형태로 변했지만, 금은 여전히 가 있는 상태였다.
‘헤파이스토스는 대장간의 신이니까, 이런 것도 고쳐 주겠지.’
그리고 보관함에 놓인 귀아스페룸을 꺼내 다시 보았다. 까맣고 단단한 강철 비늘엔 윤기가 흐르고 있었는데 꼭 흑요석처럼 아름다웠다.
‘이 강철로 무슨 무기를 만들 수 있을지 기대되는걸. 잠깐만… 그렇다면 내 사슬검은 이제 처분해 버려야 하는 건가?’
대규는 허리춤에 차고 있는 사슬검을 봤다.
만약 저 강철로 새 무기를 만든다면 이제 이 검은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진다.
알고는 있는 사실이지만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그래도 이 사슬검은 판테온 세계에 오기 전, 타르타로스에서 최초로 내가 모루를 이용해 만든 무기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