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0
220화 귀아스페룸 (1)
고개를 돌아 보니 그곳엔 아테나가 서 있었다.
“아테나?”
“대규, 잠깐만.”
“왜 그래?”
그러자 그녀는 그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미안하다.”
“뭐가?”
아테나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대를 의심한 내가 부끄럽구나. 나는 그대가 아이기스 방패를 어깨에 메고 있지 않길래 처분해 버린 것으로 오해했다.”
그래서 아까 서로 눈이 마주쳤을 때 죽일 듯이 째려봤던 건가.
대규는 아테나에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니야, 괜찮아.”
“대규, 혹시 나의 부대 영웅 중에서 스카우트해 간 자가 있지 않은가?”
이렇게 묻는 아테나에게 대규는 솔직히 대답했다.
“맞아. 지영 씨를 데려갔어. 그녀도 허락했구. 괜찮지?”
그 순간 아테나의 눈빛이 흔들려 보였던 건 대규만의 착각이었을까.
곧 그녀는 평소 같은 차가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그럴 줄 알았다. 그래, 그녀는 우리 부대 최고 실력자이기도 하니까.”
“응, 맞어. 너도 잘 알고 있구나. 우리 부대에서 지영 씨는 제2의 아테나 여신이라고 불린다지?”
그러자 그녀는 갑자기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흥, 그래 봤자 제2의 아테나다. 나를 따라잡을 순 없지.”
‘방금 이 말은 왠지 투정하는 것 같은데?’
설마 대규가 자신 앞에서 지영을 칭찬해서 기분이 상한 걸까?
‘에이, 설마! 아니겠지. 여신이 고작 세미데우스 영웅을 질투할 리가 없잖아.’
하지만 아테나의 얼굴은 좀 이상했다.
화가 난 것 같으면서도 부끄러움이 뒤섞인 오묘한 표정이었다.
대규는 호기심에 그녀의 속마음을 들어 봤다.
곧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그런데 왠지 화난 목소리 같기도 했다.
‘정말 대규는 그녀를 좋아하는 것인가? 하긴, 그녀와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같이 있었다지. 뭐랄까, 기분이 좀 나쁘군.’
‘호오, 정말 여신도 질투를 한단 말이야?’
대규는 신기해서 아테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의식한 그녀가 고개를 돌리며 톡 쏘아붙였다.
“왜 그렇게 날 뻔히 쳐다보는 것이냐?”
“아무것도 아니야.”
그때 아테나는 대규를 바라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대규… 좀 전에 디오니소스를 이기고 받은 초월자 등급 징표를 나에게 한번 보여 줄 수 있는가?”
“그건 왜?”
그러자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
“사실 제우스 님을 제외한 우리 판테온의 신들은 전설로만 그 징표에 대해 들어 왔다. 한번 실제로 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뭐, 싫으면 됐고…… 딱히 그대에게 부담을 주고 싶진 않다.”
확실히 이 징표는 판테온의 신들도 귀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니야. 보여 줄게. 보여 준다고 닳는 것도 아니니까. 그리고…….”
대규는 아테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사실 네 덕분에 이길 수 있었는걸.”
“뭐라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는 아테나에게 대규는 이렇게 말했다.
“아테나 네가 아이기스 방패를 나에게 선물해 줬잖아. 비록 방패를 업그레이드해서 벼락의 위력이 강해졌다고 하지만, 애초에 그 방패가 나에게 없었다면 디오니소스에게 그 벼락도 내리지 못했을 테니까 말이야. 고마워, 아테나.”
그 말을 듣자 좀 전에 지영의 얘기를 들으며 굳었던 그녀의 얼굴이 한결 풀렸다.
대규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흠, 꽤 단순한 구석이 있단 말이야. 칭찬을 해 주면 묘하게 좋아하는 것 같고.’
이럴 때는 전쟁터에서 영웅들을 호령하며 적군들을 무자비하게 쓰러뜨리는 차가운 전쟁의 여신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곧 대규는 보관함에서 방금 전 받은 징표를 꺼내 아테나에게 보여 줬다.
까만 블랙홀의 이미지가 박혀있는 인장을 본 아테나가 말했다.
“…이것은 태초의 카오스 문양!”
대규 역시 그간 쌓은 신화 지식으로 그리스 신화 내에서 카오스가 어떤 위상을 차지하는지는 대충 알고 있었다.
그는 아테나에게 물었다.
“카오스는 이곳 판테온 세계에 처음 생겨난 존재라지?”
그러자 아테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다, 그렇다고 한다.”
아테나는 대규에게 태초의 판테온 세계에 대해 대략적으로 설명해 줬다.
“태초에는 혼돈, 즉 카오스만이 있었다. 카오스는 만물의 원천이자 모든 물질의 원형과 에너지로 꽉 찬 공간이었지. 그것은 그 어떤 특정한 형체를 지니고 있지도 않았다. 일종의 비가시적인 에너지의 응집이라고나 할까…….”
“그렇구나.”
“심지어 우리가 싸 웠던 외계인 몬스터들도 원래는 그 카오스의 에너지에 속해 있었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대규는 놀라서 아테나에게 반문했다.
“그 에너지에 속해 있었다고?”
“그래. 자세히는 나도 모르지만, 시간이 흐르고 카오스 에너지는 두 갈래로 분리되기 시작했다. 그중 한 갈래에서는 외계인 몬스터들이 생겨났고, 나머지 갈래에서는 대지의 여신 가이아와 우라노스가 생겨났다. 이후 후자 갈래에서 생겨난 가이아와 우라노스 사이에선 제우스의 아버지 크로노스를 비롯한 티탄 신족들이 태어났지.”
‘그렇다면 외계인과 판테온의 신들은 결국 뿌리가 같은 형제란 뜻인가?’
대규가 궁금해하고 있는데, 아테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크로노스가 외계인들을 부릴 수 있었던 건 애초에 그를 구성하고 있는 에너지와 외계인 몬스터들을 구성하고 있는 에너지가 비슷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우스 님과 우리 세대로 넘어오면서 그 에너지가 상당히 희석돼 버렸기 때문에…….”
“그래서 크로노스만이 외계인들을 능숙하게 부리고 다룰 줄 알았던 거구나.”
“그렇다.”
아테나는 대규가 보여 준 징표에 찍힌 카오스 인장을 넋 나간 듯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이 징표로 제작할 수 있는 초월자 등급의 무기는 그야말로 위력이 어마어마할 것이다. 신들의 아버지이신 제우스 님도 티탄 신족 크로노스를 쓰러뜨리고 나서 이 징표를 얻어 그 전설의 벼락을 만들었으니까…….”
역시 그렇게 된 것이었군.
대규가 징표를 다시 보관함에 집어넣자 아테나는 살짝 볼멘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럼 그대는 이제 나보다 훨씬 좋은 무기를 얻게 되겠군.”
“에이, 아니야. 네가 들고 있는 창도 좋은 무기인걸.”
그때 아테나가 대규를 다시 한 번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그대는 언제 플로우 경지에 이르게 된 건가?”
“그냥… 처음엔 신의 육체를 얻기 위한 시련 때였다. 아틀라스를 맨몸으로 상대하며 미친 듯이 주먹질을 하다 보니까 각성했어. 그런데 집중의 상태에 드는 게 쉽진 않더라고. 안 그래도 매일매일 명상 연습을 했다니까.”
그러자 아테나는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신이 되기도 전에 그 경지에 들었단 말인가? 그건 신들도 몇 년 동안 수련해야 이를 수 있는 것인데…….”
그게 그렇게 대단한 거였구나.
하긴, 조금만 다른 생각을 해도 집중이 깨져 버릴 정도로 까다로운 경지이긴 했다.
“참, 그리고 디오니소스와의 전투에서 그대가 펼쳐 보였던 검법은 훌륭했다. 여태껏 그대와 함께했던 전투에선 본 적이 없는 검법이었다.”
“고마워, 사실 그 검법도 네 덕분에 익히게 된 거야.”
“뭐라고?”
아테나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묻자 대규는 이렇게 대답했다.
“네가 지난번 전투에서 플로우 상태에 들어 창을 휘두르는 창법을 잘 봤거든. 그걸 보고 나도 나만의 검법이 필요할 것 같아서 개발했지. 나도 너 같은 기술을 익히면 좋을 것 같아서. 너의 창법은 정말 훌륭했다.”
대규가 창법을 칭찬하자 아테나의 얼굴이 다시 한 번 살짝 붉어졌다.
하지만 그녀는 얼굴과 달리 냉정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내 창법이 훌륭하긴 하다. 그래, 부대원들은 다 모았는가?”
“대충 모았어. 아직까진 머릿수가 많지 않아. 좀 더 모아야 할 것 같다.”
“그렇군. 내가 도와줄 일은 없는가? 나는 전쟁의 여신이니 실력이 뛰어난 정령들을 그대에게 모아 줄 수 있다.”
그 말에 대규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마음은 고맙지만 사양할게. 나는 정령들은 원하지 않아. 내 부대를 인간 출신 영웅들로 구성하고 싶거든.”
“인간 출신 영웅들로 구성한다고?”
“그래. 나도 인간 출신이잖아. 아테나, 나는…….”
대규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곳 판테온의 신들이 인간 출신에 대해 어떤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최후의 결전에서 인간 출신 영웅들의 저력을 보여 줄 거야.”
“나는 인간 출신을 좋아한다. 물론 그게 강력한 영웅이라면 말이다.”
그 말에 대규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는 당연히 그렇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신도 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 어쨌든 그럼 최후의 결전 때 만나자.”
“그렇게 하도록 하지.”
말을 마치고 대규와 아테나는 헤어졌다.
대규는 옵티뭄의 등 위에 올라타며 생각했다.
‘그럼 이제 해야 할 일은…….’
우선 나머지 부대원들을 모아야 한다. 지금 대규가 모은 부대원은 100명 남짓. 다른 신들의 부대에 비해 지극히 적은 숫자였다.
‘하지만 내가 일일이 다른 신들의 부대를 찾아가며 돌아볼 수도 없잖아. 가만, 라이펑 씨에게 시키면 어떨까?’
중국에서 라이펑과 대화를 해 본 결과, 그는 다른 인간 출신 영웅들과 현실에서도 그럭저럭 교류를 하는 것 같았다. 처음에 만났을 때도 인간 출신 영웅들 사이에 퍼져 있는 대규에 대한 소문들도 알려 주고 했으니 말이다.
대규는 사실 현실세계에선 다른 인간 영웅들과의 교류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 상태였다.
‘심지어 그토록 오래 알고 지냈던 지영 씨와도 이번에 처음으로 현실에서 만날 정도였으니 말 다 했지, 뭐.’
대규는 다른 신들의 부대에 있는 인간 영웅들을 모으는 일은 라이펑에게 맡기기로 결심했다.
이제 그도 대규의 부하이니 이런 명령쯤은 불만 없이 이행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새로운 초월자 등급 무기의 재료를 얻기 위해 모험을 떠난다!’
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카르케르로 가 볼 생각이다.
거인들의 저승이자 지하 감옥이라면 분명 신비한 재료가 숨겨져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 거인 녀석들의 조상은 제우스가 먼 옛날 상대했던 티탄 신족들이니… 분명 강력한 재료들이 있을 거다.’
대규는 기대감에 찬 마음을 안고 공략집을 가동시켰다.
<사용자가 홀로 수련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합니다.>
<수련 장소를 선택해 주십시오.>
<차원의 틈 / 타르타로스 / 하데스의 지옥 / 카르케르(Carcer) / 카르케르의 심연부 / ???>
<사용자의 레벨이 높아질수록 상위의 수련장소들이 개방됩니다.>
<수련 장소를 선택하시면 그곳으로 이동하는 포탈이 열립니다.>
‘어, 잠깐만.’
카르케르 옆에 한 장소가 더 열린 것 같은데.
‘하긴, 신이 되고 나선 공략집의 수련 장소 기능을 열어 본 적이 없었으니.’
대규는 카르케르의 심연부라 적힌 글자를 가만히 바라봤다. 아무래도 심연부라 적힌 걸로 보아 기존의 카르케르보다 더욱 깊숙한 곳 같았다.
왠지 저곳에 가면 더욱 진기한 재료가 있을 것 같아 카르케르의 심연부란 글자를 손끝으로 눌러 봤다.
그러자 그곳에 대한 정보가 대략적으로 떴다.
<카르케르의 심연부>
<거인들의 저승에 위치한 지하감옥의 심연부로 고대 티탄 신족들 중 반역자 혹은 범죄자들이 영원히 갇혀 있는 곳임. 거인들의 강철 귀아스페룸(Gyasferrum)이 자라나고 있음.>
거인들의 강철?
흥미로운 재료 같은걸.
대규는 귀아스페룸이란 글자를 다시 손으로 눌러봤다.
<귀아스페룸(Gyasferrum)(등급 ???)>
<티탄신족이 무기로 사용하던 거인들의 강철. 신화 등급을 뛰어넘는 무기를 제조할 수 있으며, 카오스보다도 혼돈스러운 위력을 발휘하는 극강의 철. 너무 위력이 강해, 잘못 사용하면 주화입마에 들 수도 있다.>
귀아스페룸의 등급은 나와 있지 않았다. 단지 물음표만 적혀 있었다.
그런데 혼돈스러운 위력이라니.
설명만으론 얼마나 대단한 위력인지 잘 와 닿지 않았다. 그보다 대규의 눈길을 더욱 끄는 문구가 있었다.
‘잘못 사용하면 주화입마에 들 수도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