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9
219화 디오니소스 (4)
‘그렇다면 디오니소스의 머리 위로 열린 저 틈이 심연의 결계란 말인가?’
그 순간 허공의 틈 속에서 실처럼 가느다란 붉은 팔들이 나와서 디오니소스의 몸을 부여잡기 시작했다.
“아, 안 돼! 안 돼!”
디오니소스는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자신의 몸을 휘감고 있는 붉은 팔들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 팔들은 더더욱 그의 몸을 죄어 오기 시작했다.
붉은 팔들은 곧 덩굴처럼 그의 몸을 옭아맸다. 얼마 후 디오니소스는 그 붉은 손들에 의해 칭칭 감긴 뒤 심연의 결계 속으로 쑤욱 끌려들어 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그의 몸은 심연의 결계 안으로 끌려들어 갔고, 곧 틈새는 닫혀 버렸다. 디오니소스의 몸은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
대규는 그 광경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오로지 그 광경을 넋 나간 듯 바라볼 뿐이었다.
다른 신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테나, 헤르메스, 아폴론 등 다들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오직 제우스만 빼고 말이다.
그때 제우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됐다, 됐어! 그만하면 됐다!”
제우스는 대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대규여, 네가 이 결투에서 승리했다. 이제 디오니소스를 결계에서 꺼내 주거라.”
“예?”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대규가 그를 바라보자 그가 말을 이었다.
“심연의 결계의 봉인에서 빠져나오는 건 오직 그 결계에 신을 가둔 자만이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대는 디오니소스를 풀어 줄 수 있다.”
그때 대규의 눈앞에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디오니소스에 대한 심연의 결계 봉인을 풀 수 있습니다. 푸시겠습니까? Yes/No]
하지만 대규는 바로 Yes를 선택하지 않고 제우스에게 이렇게 물었다.
“제가 지금 봉인을 풀면 이 봉인 해제는 영구적인 것입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
“제가 그를 풀어 주면 그는 영원히 저 결계에서 풀려나는 것입니까, 아니면 제가 원할 때 그를 다시 저 결계에 가둘 수 있는 것입니까?”
그러자 제우스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재미있는 소릴 하는구나.”
그리고 그는 대규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물론 한번 풀어 주면 영영 풀려나는 것이다. 그를 다시 봉인하려면 그와 나중에 결투를 벌여 또 이겨야 한다.”
“그렇군요.”
그때 제우스는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나는 또 다른 분란은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디오니소스도 이 정도 했으면 말귀를 잘 알아들었겠지. 만약 디오니소스가 또 너에게 무례한 행동을 한다면, 그땐 이 신들의 아버지인 제우스가 그에게 엄벌을 내리도록 하겠다. 내 약속의 징표를 걸고 맹세하지.”
약속의 징표를 건다고 하면 안심이다.
제우스는 계속해서 대규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대는 이제 막 신이 돼서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신들 간의 전투 규율과 서열은 몹시 엄격하다. 그대는 이번 결투에서 디오니소스를 이겼고, 따라서 디오니소스는 그대에 의해 결계에 봉인됐다. 디오니소스의 머리엔 이 사실이 아주 똑똑히 각인됐을 것이다. 따라서 다시 풀려나도 그대에게 허튼짓하진 않을 것이다.”
만약 다시 무례한 행동을 한다 해도 오늘처럼 싸움을 벌여 혼쭐을 내주면 된다.
하지만 제우스는 대규의 그런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엄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대규여, 신끼리의 결투는 흔한 일이 아니다. 오늘은 내가 특별히 허락한 것일 뿐. 신들끼리의 결투는 자칫하면 판테온의 평화를 깰 수 있다. 그건 내가 허락하지 않는다.”
제우스는 그 말을 하면서 무서운 눈빛으로 대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위엄에 눌린 대규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이제 디오니소스를 풀어 주거라.”
“아, 알겠습니다.”
대규는 메시지창에 대고 Yes를 선택했다.
그러자 다시 허공의 틈이 갈라졌고, 디오니소스의 몸이 틈으로부터 쑤욱 빠져나왔다. 마치 결계의 틈은 음식을 내뱉듯 그의 몸을 내뱉었다.
제우스는 대규를 보고 이제 빙긋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승리했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디오니소스를 보면서도 말했다.
“그대가 패배했다.”
디오니소스의 얼굴엔 아직도 두려움이 가득했다. 그의 눈빛엔 더 이상 대규에 대한 분노나 질투는 사라져 있었다.
제우스는 디오니소스에게 다가가 말했다.
“디오니소스 그대는 대규가 그대 부대의 영웅들을 데려간다 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아, 알겠습니다, 제우스 님!”
이렇게 말을 마친 그는 대규의 눈치를 보면서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그러다 대규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 내가 잘못했네. 앞으론 대규 자네에게 그런 무례한 짓, 혹은 언행은 일절 하지 않겠네.”
그 모습을 본 대규 역시 그에게 말했다.
“아닙니다. 나도 좀 지나쳤습니다. 부하들 앞에서 당신의 약점인 출신을 들먹인 건 나도 미안합니다.”
그때 대규의 눈앞에 무언가가 두둥실 떠올랐다.
작은 종잇조각 같은 것이었는데, 그것엔 알 수 없는 이상한 무늬가 새겨진 인장이 찍혀 있었다.
대규는 저도 모르게 종잇조각을 향해 팔을 뻗었다.
그러자 눈앞에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신의 존재와 전투를 벌여 승리했기 때문에 초월자 등급의 무기를 제작할 수 있는 징표가 주어집니다.]
초월자 등급!
파베르가 말한, 신화 등급을 뛰어넘는 등급이었다.
메시지창을 본 대규의 눈동자가 커졌다.
하지만 종잇조각에 새겨진 인장의 무늬는 너무나도 이상했다.
‘이게 뭐람?’
일단 인장 자체는 숯처럼 까만색이었고, 거기 새겨진 무늬는 이상한 소용돌이같이 생겼다. 굳이 비슷한 것을 찾자면 블랙홀의 모양과 비슷했다.
인장이 찍힌 종잇조각을 바라보자 공략집이 떠올랐다.
<초월자 등급 무기를 제작할 수 있는 징표>
<판테온 태로의 카오스(Chaos), 일명 혼돈을 상징하는 인장이 찍힌 징표로 이 징표를 지니고 있으면 헤파이스토스에게 초월자 등급 무기 제작을 의뢰할 수 있습니다.>
그 종잇조각을 본 헤파이스토스가 흥분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흐흐, 그대가 초월자 등급 무기를 제작할 수 있는 징표를 얻었구나! 드디어 초월자 등급 무기를 제작할 일이 생겼군! 이게 대체 얼마 만이람?”
그는 다리를 절면서 대규에게 다가와 이렇게 물었다.
“당장이라도 초월자 등급 무기를 만들고 싶겠지?”
눈빛을 보아하니 초월자 등급 무기를 정말로 만들고 싶은 사람은 대규가 아니라 헤파이토스인 것 같았다.
하지만 대규는 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물론 초월자 등급 무기를 만들고 싶었다. 최후의 결전 전에는 그 무기를 얻어 싸우고 싶었다.
심지어 현재 판테온에서 초월자 등급 무기를 지니고 있는 신은 신들의 왕이자 아버지 제우스밖에 없었다.
헤파이스토스는 제우스를 슥 돌아보며 말했다.
“제우스, 당신은 어떤가? 내가 이 아이에게 초월자 등급 무기를 제작해 줘도 되겠는가?”
그러자 제우스는 쿨한 태도로 이렇게 대답했다.
“징표를 얻었으니 그가 원한다면 그렇게 해야겠지.”
“끌끌… 이거 간만에 실력 발휘를 하겠구만! 그래도 뭐, 초월자 등급 무기를 지닌다고 모든 신이 다 그 무기의 위력을 뽑아 낼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말일세.”
헤파이스토스와 제우스를 제외한 다른 판테온의 신들은 이제 몹시 부러운 눈초리로 대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 역시 저 징표를 얻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간 신과 결투할 일이 없어서 저 징표를 얻지 못했다.
아레스가 투덜거리며 이렇게 말했다.
“대체 왜 제우스 님은 저 자식과 디오니소스를 싸우게 한 거지? 내가 맨날 다른 신 녀석들에게 싸움을 걸고 다니면 좋게 좋게 말로만 타일렀으면서…….”
그러자 아프로디테가 톡 쏘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야 아레스 그대와 대규는 다르니까.”
아레스가 그 말을 듣고 노려봤지만, 아프로디테는 개의치 않았다.
한편 대규는 헤파이스토스에게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조만간 제가 따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흐흐, 그렇게 하도록 하게. 자넨 내 작업장이 어딘지 알고 있으니까 말이야. 하긴, 초월자 등급 무기는 제작 과정도 그렇지만, 무기의 재료를 구하는 것도 고역이지. 어디 한번 멋있는 재료를 가져와 보게.”
그 말을 들은 대규가 놀라서 물었다.
“무기의 재료는 제가 구해야 하는 겁니까?”
“그럼 당연하지. 그리고 초월자 등급 무기인데 아무 재료나 써서는 안 되겠지? 게다가 이 절름발이인 내가 재료를 구해 올 수도 없고. 참고로 제우스 님도 자신이 직접 재료를 구해 왔다네.”
대규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재료를 구하기 적합한 장소로 떠오른 곳은 거인들의 저승이자 지하 감옥 카르케르였다.
‘그곳은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곳이었다. 그곳에 갇혀 있던 외계인 몬스터들도 그렇고…….’
그러니 당연히 재료로 쓸 만한 게 있을지도 몰랐다.
당장 외계인 몬스터 보스들만 해도 해치우면 젬스톤 대신 희귀하고 특별한 아이템을 떨궜다.
‘그리고 그곳 역시 나름 거인들의 지옥이다. 하데스의 지옥이 지옥철 인페리페룸을 지니고 있던 것처럼 분명 그곳에도 그런 금속이 있을지도 몰라.’
대규에겐 이제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그는 숲에 모인 판테온 신들에게 정중히 인사를 하며 말했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죠.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때 디오니소스가 구석에서 꾸물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대규… 호, 혹시 내 부대에서 원하는 영웅이 있었던 건가? 그렇다면 당장에라도 스카우트해 가게.”
그러자 대규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닙니다. 물론 당신 부대의 영웅들은 훌륭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다들 당신이 해 주는 대접에 크게 만족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굳이 그런 영웅들을 당신으로부터 빼앗아 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
그 말을 들은 디오니소스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네. 다만 당신이 휘하 영웅을 시켜 제우스 님의 명령을 거절하려 했던 게 거슬려서 그랬던 것입니다.”
“그럼 부대는 이제 다 꾸린 건가?”
“일단 중요한 인재들은 스카우트했습니다.”
말을 마치며 대규는 아폴론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폴론에게 그의 부대 영웅들을 스카우트했다고 말하기로 했다.
‘지금 말하는 게 낫겠군.’
대규는 아폴론에게 다가가 말했다.
“아폴론.”
“응? 무슨 일이지?”
대규는 잘생긴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당신 부대에 있는 인간 영웅들을 내 부대로 데려가고 싶습니다. 물론 그들은 이미 동의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작게 코웃음을 친 뒤 입을 열었다.
“인간 출신 영웅들 말인가? 고작 100명 정도일 텐데. 하하, 마음껏 데려가게! 내 부대에는 인간 영웅들 말고 다른 뛰어난 정령들이 많으니까 말이야.”
그는 몹시 선심을 쓰듯 말했지만, 대규의 기분은 좋지 않았다.
하지만 눈치 없는 아폴론은 대규의 굳어진 표정을 의식하지 못한 채 이렇게 떠들었다.
“그런데 대규, 의외인걸? 뛰어난 영웅들도 많은데, 왜 하필 인간 녀석들을…….”
그의 목소리엔 여전히 인간들을 무시하는 뉘앙스가 팍팍 담겨 있었다.
하지만 더 열 받는 건 그런 아폴론의 태도엔 전혀 악의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판테온의 신이었기 때문에 인간을 무시하는 태도가 자연스럽고 순수하게 몸에 배어 있는 것이었다.
대규는 차가운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인간 출신들을 무시하지 마시죠.”
그의 목소리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아폴론은 흠칫했다.
그러나 이내 얼굴을 펴며 말했다.
“흠, 어쨌든 마음대로 데려가게. 나는 괜찮으니까. 나야 저 치사한 디오니소스처럼 굴진 않을 테니까.”
애써 웃으면서 사람 좋게 말하는 겉모습과 달리 그의 속마음은 달랐다.
‘흥! 인간들 능력이 다 거기서 거기지. 물론 대규 이자는 좀 특별한 것 같지만… 나머지들은 그렇지 않다. 어쨌든 잘됐군. 인간들을 일일이 챙기기 귀찮았는데… 이자가 이렇게 데려가 주면 나로서는 완전 고마운 일 아닌가!’
그의 속마음을 공략집으로 낱낱이 들은 대규는 속으로 이를 갈며 생각했다.
최후의 결전에서 두고 보자.
내 부대를 최고의 부대로 만들어서 싸우겠다.
속으로 다짐을 한 후 대규는 옵티뭄을 타고 숲을 나서려 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의 팔목을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