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8
218화 디오니소스 (3)
대규의 오른팔이 빠르게 푸른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대규는 마지막으로 디오니소스에 대한 공략집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승전 기원 파티에서 맨 처음 그를 봤을 때와 달리 이번의 공략집엔 그의 스킬과 공격 패턴, 특징들이 설명돼 있었다.
-차원의 틈 공략집-
신 이름: 디오니소스(Dionysus)
특징: 제우스가 인간 여자와의 관계에서 낳은 신으로 포도주의 신이자 기쁨과 광란, 황홀경의 신이다. 세상의 모든 쾌락을 즐기며 도덕률을 무시한다. 그의 부대 영웅들은 그를 신처럼 보시며 광란의 축제를 벌인다. 칼날이 가느다랗고 뾰족한 에페(epee)를 사용하며 그 검으로 검기를 내뿜는다.
광란의 검기-에페에서 발하는 보랏빛 검기가 상대방을 무자비하게 공격함. 레벨이 오를수록 그 검기의 위력도 강력해진다. 마나 소모 500.
<디오니소스 신은 불사(不死)의 존재입니다.>
<디오니소스 신을 죽이는 건 불가능하지만, 심연의 결계에 봉인을 할 수는 있습니다.>
<디오니소스 신을 심연의 결계에 봉인하려면 신화 등급 이상의 무기 아이템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눈을 감고 집중한다.
곧 쪽지창이 떠올랐다.
[온 신경들이 초집중 상태로 각성해 플로우(Flow)의 경지가 개방됩니다.]
물론 대규는 이미 초집중 상태에 돌입한 후여서 메시지창이 떠올랐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현실로 돌아가 지영과 라이펑을 부대원으로 스카우트하는 와중에도 대규는 매일매일 오피스텔의 건물 옥상에 올라 명상을 했다.
명상을 하면서 집중력을 길렀고, 이젠 조금만 노력해도 바로 초집중 상태에 돌입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
플로우 경지에 도달한 이후 대규는 자신만의 검법을 만들어 연습하기 시작했다.
온몸에서 푸른빛이 발생하는 플로우 상태로 들어가면 머릿속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오직 목표를 향해 검을 휘둘러 무참히 베어 버릴 뿐이었다.
1mg의 자비심이나 동정심도 없이 기계처럼 검만 휘두를 뿐이다.
그런 식으로 매일같이 눈앞의 허공을 미친 듯이 베어 왔다.
촥촥촥-
서걱, 서걱, 서걱-
그리고 완성된 대규의 검법은 그야말로 궁극의 참파(斬波)였다.
물론 미친듯이 베어지는 허공엔 항상 불타는 악마의 화염이 뒤따랐다. 하지만 화염은 눈앞에 적이 없어서 그런지 그리 높게 타오르지는 않았다.
플로우 상태에서 검을 휘두를 때 발하는 악마의 화염은 평상시 악마의 화염과는 좀 더 달랐다.
화염은 푸르스름한 기운을 지니고 있었으며, 불길의 위력은 더욱 강한 것 같았다.
그렇게 완성된 참파 검법을 대규는 ‘플로우 검법’이라고 불렀다.
저 멀리 디오니소스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이를 부득 갈면서 온몸으로 노기를 뿜어대며 날아왔다.
하지만 대규의 시야엔 그저 베어야만 하는 한 대상, 혹은 목표물이 가까워지는 정도로만 인식됐다.
그 어떤 두려움이나 떨림 같은 감정은 없었다.
심지어 디오니소스를 향한 적개심조차 없었다. 이제는 디오니소스는 그의 적이 아니었다. 단지 베어야만 하는 목표일 뿐이었다.
대규는 사슬 검을 들고 며칠간 죽도록 연습하며 개발했던 자신의 플로우 검법을 시전했다.
촥촥촥-
불카누스의 사슬검이 모든 것을 경쾌하게 베어 버렸다.
자신을 향해 사정없이 날아드는 악마의 화염을 본 디오니소스는 놀라서 한발 뒤로 물러났다.
‘이 자식이… 어느새 플로우 경지에!’
플로우 경지는 자신도 들어갈 수 있는 경지이긴 했다. 하지만 신인 자신도 그 경지에 들기 위해선 몇 년이 걸렸다.
그리고 지금도 들어가는 게 쉽진 않았다.
‘그런데 이 자식은 신이 된 지 몇 주가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으드득.
디오니소스의 이가 질투심으로 갈렸다. 대규를 향한 분노가 더욱 강해졌다.
‘나는 증명해 보일 것이다! 다른 판테온 신들 앞에서 내가 저 자식보다 훨씬 대단한 존재라는 걸!’
디오니소스는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갔다.
대규 역시 디오니소스를 쫓아 땅으로 하강했다.
날아가는 대규의 얼굴엔 그 어떤 감정도 나타나 있지 않았다. 오직 오른손의 사슬검과 자신만이 세상에 존재할 뿐이었다.
숨을 쉴 때마다 자신이 곧 사슬검, 그리고 검에 붙어 있는 악마의 화염이 된 것 같았다.
화염 안에서 타탁, 타탁, 타오르는 불씨 중 하나가 된 것 같았다.
디오니소스와 대규는 이제 제우스가 만든 격투장 바닥에 서 있었다.
한편 대규의 손에서 영롱하게 발하고 있는 푸른빛을 본 다른 판테온의 신들 역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벌써 플로우 경지에 도달했단 말인가!’
‘대체 어떻게…….’
다들 충격받은 표정으로 놀라고 있었지만, 제우스는 몹시 흥미롭다는 듯 대규를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고 있었다.
대규는 디오니소스에게 다가가며 다시 한 번 사슬검을 무자비하게 휘둘렀다.
디오니소스는 뒤로 물러서나 싶더니 입가에 거만한 미소를 띠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흥, 잘난 척은 이제 끝이다.”
그는 자신의 에페 검을 들고 눈을 감았다.
곧 무시무시한 기운이 그의 몸 한가운데로부터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격투장 주변에 태풍처럼 강한 돌풍이 불기 시작했다.
얼마 후 디오니소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기운은 그가 들고 있는 검에 서려 있었다. 검 주변은 짙은 보랏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받아랏!”
디오니소스는 대규를 향해 자신의 검을 휘둘렀다. 그의 검에서 날카로운 검기가 튀어 나갔다.
검기는 심지어 악마의 화염을 누그러뜨릴 정도로 강력했다.
대규는 자신의 참파를 뚫고 날아오는 디오니소스의 보랏빛 검기를 인지했다.
‘빌어먹을!’
그 검기를 인지한 순간 집중이 깨졌고 플로우 상태가 사라져 버렸다.
대규는 반사적으로 손목을 들어 네메시스의 방패를 불러냈다.
손목에 팔찌 형태로 잠들어있던 방패가 바로 튀어나와 보랏빛 검기를 막아 냈다.
끼에에엑!
그 순간 방패에 박혀있던 괴물뱀 아이기스가 괴상한 소리를 내며 울부짖었고 그 모습을 본 신들은 다시 한 번 놀랐다.
“저건 아이기스 방패에 새겨져 있던 아이기스 괴물뱀 아닌가!”
“그런데 아이기스가 왜 저 황금 방패에 새겨져 있는 거지? 저건 아테나의 아이기스 방패가 아닌걸.”
“이봐, 아테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신들이 아테나에게 물어봤지만, 아테나는 딱히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 역시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아무래도 대규는 자신이 준 아이기스 방패를 처분한 게 아니라 본래 그가 지니고 있던 방패와 합쳐서 업그레이드를 한 것 같았다.
‘그런 건 예상하지 못했다.’
아테나는 대규가 아이기스 방패를 처분했다고 섣불리 판단하고 마음속으로 화를 냈던 자신이 부끄럽게 여겨졌다.
그녀는 대규와 디오니소스의 싸움을 열심히 지켜봤다.
한편 디오니소스는 대규가 자신의 검기를 방패로 막아 낸 걸 보고 이렇게 외쳤다.
“흥! 아테나의 괴물 방패 덕에 살았구나. 하지만 이것도 막아 낼 수 있을까?”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다시 대규에게 맹렬히 달려들었다.
방금 전까진 연회를 벌이며 얼큰하게 술 취했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민첩하고 날렵한 몸놀림이었다.
보랏빛 검기가 이번엔 대규의 온몸을 노리고 동서남북 사방에서 무자비하게 날아들었다.
대규는 재빨리 몸을 돌려대며 방패로 일일이 그것들을 막았다.
물론 그럴수록 괴물뱀 아이기스는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질렀다.
‘계속 이렇게 막기만 하는 데엔 한계가 있다.’
아무리 아이기스 방패와 네메시스 방패의 방어력이 높다고 해도 디오니소스는 신이다. 신의 공격을 무한히 견딜 수 있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그의 검기 공격을 방어하느라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어서 플로우 상태에 돌입할 수도 없었다.
‘플로우 상태에 돌입하지 않으면 지금 나는 디오니소스를 이길 수 없다. 제길, 어떻게 해야 하지?’
공격을 두려워해선 안 돼.
그런 두려움마저도 다 지워야 플로우 상태에 돌입할 수 있다.
대규는 다시 한 번 눈을 감고 집중을 시작했다.
두려움을 없애야 한다.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검기들을 의식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마음이 고요해졌다.
그간 열심히 명상하지 않았다면 도저히 이런 상태에서 집중하는 게 불가능했을 것이다.
곧 대규의 오른팔이 다시 한 번 푸르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때 자신의 등 뒤에서 날아드는 디오니소스의 검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대규는 막지 않았다.
검기는 빠르게 날아오고 있었지만, 정신을 집중하니까…….
‘응?’
검기의 속도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꼭 슬로모션처럼 느리게 날아오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검기의 속도가 줄어든 게 아니라 플로우 상태에 돌입해 대규의 전투 감각이 비약적으로 높아진 것이었다.
대규는 몸을 돌려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검기를 사슬검으로 있는 힘껏 쳐냈다.
까아아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숲 전체가 울렸다.
대규가 자신의 검기를 쳐내자 디오니소스는 크게 당황했다.
이때다.
있는 힘껏 높이 점프를 해 그의 머리에 참파들을 날렸다.
촥촥촥-
“이익!”
디오니소스는 이를 악물고 대규의 참파들을 피했다. 하지만 완전히 피하진 못했고 그의 몸엔 자잘한 상처들이 생겼다.
하지만 참파들은 끝없이 대규의 사슬검 끝에서 날아왔다.
‘빌어먹을, 저 자식은 힘들지도 않나.’
연속 공격을 피하느라 어느덧 디오니소스의 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까진 괜찮다.
디오니소스는 대규의 공격을 피하면서 이렇게 외쳤다.
“흥! 이 정도로 날 해치울 수 있을 줄 아느냐!”
대규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이 정도 공격으론 디오니소스를 해치울 수 없다는 걸.
하지만 이쪽도 다 생각이 있다.
대규는 사슬검을 열심히 휘두르면서도 어느새 팔찌 형태로 줄어든 아이기스 방패를 바라보았다. 팔찌에 새겨져 있는 괴물뱀 아이기스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우르릉, 쾅쾅!
하늘이 어두워졌고, 곧 무시무시한 벼락이 내리치려 했다.
디오니소스는 그 모습을 본 뒤 코웃음 치며 이렇게 말했다.
“흥! 믿고 있는 구석이 그거였나? 아이기스 방패로 소환하는 벼락으론 날 쓰러뜨리지 못한다!”
그런데 이상했다.
벼락이 그 전과 달랐다.
아이기스가 소환할 수 있는 제우스의 벼락은 분명 푸르스름한 빛을 띠는 벼락이다. 하지만 대규가 소환한 벼락은 피처럼 붉은 기운을 띠고 있었다.
붉은 벼락은 그전의 푸른 벼락보다 훨씬 빠르고 강력했다.
“이, 이건…….”
한껏 여유를 부리고 있던 디오니소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게 바로 업그레이드된 벼락이다!
네메시스 방패와 합체하면서 위력이 더욱 강해진 제우스의 벼락!
붉은 벼락은 자비심이 없었다.
디오니소스가 차마 피할 틈도 주지 않고 그의 몸을 순식간에 관통해 버렸다.
“끄아아아!”
벼락을 맞은 디오니소스는 쓰러졌다.
하지만 아직도 온전하게 의식은 남아 있었다.
대규는 그런 그에게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너는 인간 혹은 세미데우스 출신이 너보다 잘나가는 꼴을 못 본다지. 그럼 헤라클레스도 아주 싫어하겠군. 그분이야말로 인간 출신에서 최초로 신이 된 존재이니까 말이야.”
“끄으으…….”
디오니소스가 뭐라 변명할 틈도 주지 않고 대규는 말을 이었다.
“이건 그 헤라클레스 님이 나에게 전수해 주신 스킬이다. 이거나 먹고 심연의 결계로 떨어져라.”
레툼 익투스!
수십 개의 푸른 화염구를 품은 검광들이 디오니소스를 향해 똑바로 날아갔다.
그때였다.
검광들에 의해 디오니소스의 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대신 그의 머리 위에 있는 허공의 틈이 쩌억 벌어졌다.
‘저게 뭐지?’
대규도 깜짝 놀라 허공의 틈을 바라보았다.
한편 디오니소스는 두려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갈라진 허공의 틈 속은 새카만 암흑뿐이었다.
그런데 그 암흑 속엔 기분 나쁘게 생긴 붉은 눈동자가 있었다. 눈동자는 틈 밖에 있는 디오니소스를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아, 안 돼…….”
디오니소스의 입에서 절박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제우스를 제외한 다른 판테온 신들의 얼굴에도 두려운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이제 디오니소스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고, 그의 온몸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대규 역시 등골이 싸늘해지고 무서운 기분이 들었다. 그때 붉은 눈동자가 대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디오니소스와의 전투에서 이겨서 심연의 결계에 그를 가둘 수 있게 됐습니다.]
[심연의 결계가 열리기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