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7
217화 디오니소스 (2)
그런데 평소보다 칼날 끝에서 악마의 화염이 훨씬 더 강력하게 타올랐다.
대규 역시 거세게 치솟은 화염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전보다 두 배는 더 높게 치솟은 것 같은데.’
아무래도 전에 헤파이스토스 대장간에 들렀을 때 수석 대장장이 파베르가 그의 사슬검날을 갈아줬는데 그 위력인 듯싶었다.
대규의 사슬검과 디오니소스의 가느다란 검이 맞부딪혔다.
콰콰쾅!
엄청난 굉음과 함께 주변 공기가 요동쳤고 숲의 나무들이 세차게 흔들렸다.
새들이 놀라서 숲의 나무들 위로 날아올랐다. 짐승들도 놀라서 숲 밖으로 총총총, 달아나기 시작했다.
디오니소스는 칼을 거두지 않은 채 이를 부드득 갈면서 대규를 노려보았다.
“용서할 수 없다! 이 건방진 자식!”
하지만 대규 역시 지지 않고 노려보며 말했다.
“이쪽도 마찬가지다.”
디오니소스는 뒤로 물러났다가 다시금 그의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검 주변에서 보랏빛 검기가 형성되면서 대규의 얼굴을 스쳤다.
“으윽.”
찌릿한 전기가 볼 전체에 오르는 느낌이었다.
대규 역시 사슬검을 휘둘렀고, 디오니소스가 머리에 두르고 있던 포도 덩굴에도 악마의 화염이 붙었다.
화르륵-
화염은 포도 덩굴을 태워 버렸다.
“이, 이 자식!”
그들은 다시 이를 갈면서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그때였다.
숲의 하늘이 어둑어둑해졌고, 먹구름들이 심상치 않게 몰려왔다.
차마 싸움을 말리지 못하고 구경만 하고 있던 정령들과 영웅들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하나둘 자리를 피하기 시작했다.
우르릉! 쾅쾅!
거대한 푸른 벼락이 디오니소스와 대규의 발치에 떨어졌다.
번쩍!
연기가 걷혔고, 그곳엔 신들의 왕 제우스가 서 있었다.
“지금 대체 무엇들 하는 것이냐!”
제우스는 살짝 노기를 띤 목소리로 그들에게 말했다. 대규와 디오니소스는 황급히 무기를 거두고 제우스 앞으로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디오니소스가 대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먼저 제우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자가 먼저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정령들과 영웅들을 불러다가 최후의 결전을 치르기 전, 그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연회를 열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저자가 들어와 다 망쳐 놓았습니다. 저는 억울합니다!”
사기 진작? 애욕의 지옥을 형상화하고 있었으면서.
정령들과 영웅들은 다 술에 취해서 인사불성이 되고 난장판으로 뒹굴어 대고 있었는데 그게 무슨 사기 진작이란 말인가.
대규 역시 지지 않고 디오니소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자가 먼저 제우스 님의 명령을 어겼습니다. 저자는 자신 휘하의 영웅을 시켜서 현실 세계에서 저에게 이렇게 전언했습니다. 자신의 부대 영웅들을 부대원으로 끌어들이지 말라고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은 제우스는 엄격한 목소리로 디오니소스에게 물었다.
“디오니소스, 대규의 말이 사실이냐?”
디오니소스는 살짝 뜨끔하는 것 같았지만 이내 이렇게 변명했다.
“하지만 신들의 아버지시여… 정말 너무하신 처사입니다. 제 휘하 영웅들은 저의 피와 살 같은 존재입니다. 그동안 제가 다 거두어 먹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비록 인간, 정령들이라도 저 역시 그들에 대한 애정이 있습니다. 저는 그 냉정한 아폴론과 다르다는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는 억울하다는 듯 절절한 목소리로 제우스에게 탄원을 계속했다.
“그런데 제가 여태껏 잘 키워 오고 훈련시켜 온 영웅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자에게 내주라니요. 이건 솔직히 불공평한 처사 아닙니까?”
“흐음…….”
디오니소스의 말을 들은 제우스는 생각에 잠겼다.
얼마 후 제우스는 입을 열었다.
“…디오니소스의 말도 일리가 있긴 있다. 하지만 대규의 부대원 섭외 건은 분명 내가 판테온의 신들에게 특별히 명령했던 일이다.”
그 말을 들은 디오니소스의 표정은 사정없이 구겨졌다.
“대신…….”
제우스는 입가에 오묘한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디오니소스, 만약 네가 대규와 결투를 해서 이긴다면 너의 말을 들어주도록 하겠다.”
“예, 예?”
“강한 자가 권리를 갖게 되는 것은 이곳 판테온의 규율! 그렇게 한다면 너도 이의는 없겠지?”
디오니소스의 얼굴은 살짝 굳어졌지만, 그는 곧 쾌활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대규를 있는 힘껏 째려보았다.
대규는 그 말을 듣고 제우스에게 말했다.
“잠깐, 제우스 님. 그럼 저와 디오니소스가 지금 이곳에서 결투를 벌여야 한단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특별히 내가 허락하지.”
제우스는 심지어 몹시 재밌어 하는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덧붙이는 게 아닌가.
“신들끼리 전투를 하는 건 정말 오랜만에 보는구나. 이거 나만 보긴 아쉬운 구경거리인걸. 다른 신들을 불러야겠다.”
그러자 디오니소스는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부르시지요! 저는 좋습니다.”
오히려 다른 신들이 온다고 하니까 더욱 자신만만한 것 같았다.
공략집으로 속마음을 들여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흥, 저 녀석을 다른 신들이 보는 데서 완전히 깔아뭉개 버린다면 저 녀석도 더 이상 건방지게 행동하지 못하겠지. 아주 망신을 톡톡히 주마. 판테온의 신이란 건 그리 만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똑똑하게 알려 주지!’
싸우지도 않았는데 그는 이미 대규를 이겼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제우스는 곧 판테온의 다른 신들을 소환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 숲으로 신들이 나타났다.
아폴론과 헤르메스, 아테나, 그리고 아프로디테와 아레스가 모습을 보였다.
하데스나 포세이돈 등은 보이지 않았다.
제우스는 다른 신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데스나 포세이돈 등은 최후의 결전을 위해 준비를 할 것이 있어서 못 온 것 같군.”
결투를 시작하려는 찰나 헤파이스토스가 나타났다.
그는 다리를 절면서 다른 신들이 앉아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제우스는 의외라는 듯 놀라며 헤파이스토스에게 물었다.
“헤파이스토스, 자네가 올 줄이야. 자넨 작업장에 처박혀서 무기를 만들고 있는 것 아니었나?”
그러자 헤파이스토스는 입가에 씨익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신끼리의 결투를 놓칠 수는 없지! 그리고 분명 저 둘 중에서 승자가 생길 테고. 그렇게 되면 당연히 그 승자는 자네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초월자 등급의 무기를 제작하려고 할 것 아닌가.”
초월자 등급 무기!
아무래도 파베르가 말한, 신화 등급을 뛰어넘는 등급을 지칭하는 것 같았다.
대규뿐만 아니라 헤파이스토스의 말을 들은 다른 판테온 신들의 눈동자도 커졌다.
제우스는 헤파이스토스의 말을 듣고 약간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래, 그렇지. 이긴 자는 심연의 결계에 진 자를 가둘 수 있을 테니까.”
“흐흐, 초월자 등급 무기를 또다시 제작한다니, 벌써부터 손이 흥분으로 근질거리는구만. 그런데 제우스 자네가 신들끼리의 대결을 허락하다니, 정말 이례적인 일인걸?”
제우스 역시 그렇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그는 신들끼리의 대결을 허락한 적이 없었다. 웬만하면 대화나 말, 그리고 재판으로 좋게 좋게 끝냈다.
‘하지만…….’
제우스는 대규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 녀석은 정말 특별한 존재란 말이지. 저 녀석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알아보고 싶군.’
그는 신이 된 대규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알고 싶었다.
한편 제우스의 입에서 심연의 결계, 라는 말이 나오자 디오니소스의 표정은 살짝 굳어졌다.
그러자 제우스는 그를 보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설사 너희 중 누군가가 져서 심연의 결계에 갇힌다 해도 내가 명령해서 꺼내 줄 것이다. 그러니 그 점은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그러자 디오니소스의 굳었던 얼굴이 좀 풀렸다.
대규는 제우스에게 말했다.
“하지만 제우스시여, 이 좁은 숲에서 전투를 벌이기엔 좀…….”
그 말에 제우스는 대답 대신 팔을 들었다.
쿠쿠쿵!
굉음과 함께 숲 한가운데 웅장한 결투장이 만들어졌다.
판테온의 신들은 결투장 한쪽에 설치된 대리석 의자에 앉아 있었다.
신들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디오니소스와 대규를 바라보았다.
특히나 아프로디테는 대규에게 과도한 관심을 보였다.
“어머머, 디오니소스와 싸운다니, 난 솔직히 대규가 이기는 데 걸겠어.”
“아프로디테, 지금 돈을 걸고 도박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헤르메스가 신나서 물었다. 그 역시 도박을 좋아하는 재간꾼 신이었다.
그러자 아프로디테는 농염한 미소를 입가에 띤 채 말했다.
“헤르메스, 멍청하긴. 난 돈 따윈 걸지 않아. 대신 나의 찌인한 키스 한 번을 걸지. 호호호.”
그 말을 들은 그녀의 애인 아레스의 표정이 구겨졌다.
하지만 아프로디테는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옆에 앉은 아테나에게 말했다.
“그런데 아테나, 너는 누구한테 걸 거지? 당연히 대규겠지?”
그러자 아테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이렇게 툭 대꾸했다.
“나는 내기 따윈 하지 않는다.”
“호호, 하지만 너의 얼굴에 다 써 있다. 대규가 이기길 바라는 감정 말이다. 호호호.”
“가만히 있어라!”
아테나는 아프로디테를 향해 언성을 놓였다.
그때 아프로디테가 대규를 가리키며 다른 신들에게 말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그 말을 들은 신들은 모두 대규를 바라보았다.
“뭐가 말이지?”
아테나가 묻자 아프로디테가 오묘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아테나, 네가 저자에게 아이기스의 방패 한 쪽을 줬다고 하지 않았나?”
그 말을 듣자마자 아테나는 죽일 듯한 표정으로 헤르메스를 노려보았다.
헤르메스는 아테나의 시선을 빠르게 피하며 모른 척했다.
하지만 아프로디테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런데 지금 대규의 어깨엔 네가 줬다는 아이기스의 방패가 없구나. 대체 어떻게 된 것이지?”
그 말을 들은 아테나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러고 보니 대규의 어깨에서 자신이 준 아이기스의 방패가 사라졌다.
분명 대규는 그날 자신의 방패를 받아 왼쪽 어깨에 그것을 장착했다.
아테나는 나머지 방패를 자신의 오른쪽 어깨에 장착했었고 말이다. 그것이 서로 두 쪽의 방패를 나눠 가졌다는 징표였다.
하지만 아프로디테의 말처럼 지금 대규의 어깨는 텅 비어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설마 방패를 처분한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니 아테나는 머리의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저런 불경한 녀석을 보았나. 감히 내가 준 선물을!”
그녀는 이성을 잃고 이렇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프로디테는 얄미운 목소리로 아테나 옆에서 이렇게 속삭였다.
“호오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 걸까~?”
그때 아테나는 아주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
“흥, 나도 내기를 하도록 하지. 난 디오니소스가 이기는 데 걸겠다.”
“돈을 걸 건가? 아니지, 아테나 너도 나처럼 키스를 거는 건 어때?”
“웃기지 마라!”
그 순간 디오니소스와 대규의 결투가 시작됐다.
신들은 더 이상 떠들지 않고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그들의 결투를 지켜봤다.
대규는 자신을 바라보는 신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주 흥미진진한 쇼를 보러 온 것 같은 모습이군. 팝콘까지 있으면 딱일 텐데.’
그런데 그중에서도 유난히 아테나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다른 신들과 달리 뭔가 잔뜩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대규와 그녀의 눈빛이 마주쳤다.
하지만 그녀는 대규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몹시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왜 저러지?’
그 순간 디오니소스가 검을 들고 날아왔다.
대규는 아슬아슬하게 그의 공격을 피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이에 질세라 디오니소스 역시 발을 세차게 구르며 하늘 위로 날아왔다.
하지만 대규는 여유로웠다.
디오니소스에 대해 조사를 하면서 그에 대한 모든 정보를 속속들이 알아냈다.
그의 출생 정보뿐만 아니라, 지니고 있는 스킬들과 공격 패턴 등까지도 말이다.
대충 어떻게 싸울지 전략은 세워 놨다.
‘사실 이곳 판테온에 올 때부터 저 녀석과 싸울 거라고 예상하고 왔지.’
하지만 대규는 디오니소스를 향해 악마의 화염이 달린 사슬검을 휘두르는 대신 두 눈을 감았다.
캄캄한 암흑 속에서 온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저 자식, 대체 뭘 하는 거야?’
눈을 감고 있는 대규를 보던 디오니소스는 몹시 당황했다.
“전투를 포기한 것이냐?”
하지만 대규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뭐, 좋다! 단칼에 베어 주마!”
디오니소스는 검을 들고 그를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그때 대규가 사슬검을 쥐고 있는 오른팔과 그의 사슬검 전체가 푸른빛을 강렬하게 발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