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6
206화 전장의 새국면 (12)
한편 차토구아의 유독가스로부터 멀리 날아가 도망친 헤르메스는 회복 마법을 써서 생명력을 올린 뒤 간신히 맑은 공기를 마시고 있었다.
‘대규는 잘 싸우고 있나……?’
그는 저 멀리 독가스가 뿌옇게 낀 곳을 바라보았다.
가스 안에서 꾸물거리는 형체가 보였다. 그곳에서 대규와 차토구아가 싸우고 있는 것 같았다.
헤르메스는 신의 눈을 써서 그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독가스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잘 싸우고 있겠지.’
그때 독가스 사이로 무언가의 실루엣이 드러났다.
그건 이빨들이 잔뜩 달린 주둥이였는데 뭔가를 열심히 잡아먹고 있었다.
‘내가 잘못 본 것인가? 분명 저런 괴물은 없었는데… 혹시 다른 외계인들이 나타난 건가?’
그렇다면 저쪽으로 당장 가봐야 했다.
헤르메스는 독가스가 조금 가시면 바로 날아가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때 독가스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고, 그는 대규를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그곳엔 차토구아와 대규뿐이었다.
‘내가 뭘 본 거지? 분명 이빨들이 잔뜩 달린 주둥이들이 있었는데.’
그런데 마침 대규는 검을 휘두르는 대신 자신이 예전에 줬던 무한의 가방 인피니투스의 뚜껑을 닫고 있었다.
그때 헤르메스는 한순간이지만 분명히 봤다.
가방 끝에서 이빨 달린 주둥이가 살짝 튀어나와 있는 걸 말이다.
분명 좀 전에 봤던 그 괴물의 주둥이였다.
다시 보려고 했지만, 대규가 이미 가방을 닫아 버린 뒤였다.
‘대체 저자는 인피니투스 안에 뭘 넣어 두고 있는 거지?’
헤르메스는 찜찜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대규는 이미 인피니투스를 보관함에 넣었는지 빈손이었다.
헤르메스는 일단 대규 곁으로 날아갔다.
빨리 대규를 도와 저 두꺼비 좀비 외계인 차토구아를 해치워야 한다.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한편 올챙이들이 모두 먹혀 버린 차토구아는 적잖이 당황한 눈빛이었다.
마침 대규의 눈엔 저 멀리서 이쪽을 향해 빠르게 날아오는 헤르메스가 보였다.
몰골을 보아하니 회복 마법으로 멀끔하게 생명력을 채운 것 같았다.
대규는 헤르메스를 보고 말했다.
“이제 공격할 때다, 헤르메스!”
그리고 공략집으로 본 차토구아의 약점을 그에게 말해 줬다.
“헤르메스, 녀석의 약점은 저 혀야. 혀를 완전히 뽑아 버려야 해. 그리고 그곳에 칼을 찔러 넣으면 된다.”
“그런가?”
“응. 내가 아이가스 방패로 녀석에게 벼락을 내릴 테니, 그 틈을 타 네가 혀를 뽑아 버려라.”
“알겠다.”
녀석을 해치우는 건 역시 헤르메스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여태껏 차토구아와 다른 외계인을 상대로 고전했던 헤르메스다.
‘그리고 내가 오기 전에 헤르메스가 차토구아와 싸운 탓에 녀석이 힘이 좀 빠진 상태이기도 했고.’
차토구아는 투투같이 부풀어 오른 볼을 실룩거리며 대규와 헤르메스에게 다가왔다.
“#[email protected]!”
녀석은 반 토막 난 혀를 내밀며 맹렬하게 휘둘러 댔다.
‘최후의 발악이로군.’
대규는 속으로 씨익 웃으며 아이기스의 방패를 든 뒤 방패에 새겨진 괴물 아이기스와 아이 컨택을 했다. 그리고 제우스의 벼락을 소환했다.
번쩍!
아이기스가 눈을 떴고 하늘이 어둑어둑해졌다.
대규에게 다가오던 차토구아는 하늘이 어두워진 걸 보고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걸 깨달았을 땐 제우스의 벼락이 녀석의 몸에 정확히 내리꽂혔다.
우르릉! 쾅쾅!
“이때다!”
헤르메스는 벼락을 맞아 정신줄을 놓고 있는 차토구아를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장갑을 낀 양손으로 녀석의 주둥이를 있는 힘껏 벌렸다.
“#%#!”
주둥이가 억지로 벌어지자 차토구아는 온몸을 흔들면서 괴로운 듯 울부짖었다.
헤르메스는 녀석의 반 토막 난 혓바닥을 장갑 낀 손으로 잡아당겼다.
“크으윽…….”
하지만 녀석의 혀는 쉽게 뽑히지 않았다. 꼭 단단한 강철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그래도 헤르메스는 있는 힘을 다해 그것을 잡아 뽑았다.
팔뚝에서 근육이 꿀렁이며 움직였다.
“흐아압!”
찌지직-
곧 뭔가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단단한 혀뿌리가 서서히 뽑혀 나오기 시작했다.
“됐다!”
혀가 뽑혀 나온 곳엔 거대한 동공이 자리 잡고 있었다. 모든 걸 다 빨아들일 것처럼 새까만 동공이었다.
헤르메스는 그곳을 향해 자신의 황금 칼을 정확히 찔러 넣었다.
“@#$$!”
꿀럭, 꿀럭-
녀석의 목구멍 안에서 검붉은 피가 분수처럼 솟구쳐 나오기 시작했다.
헤르메스의 몸은 녀석의 피를 완전히 뒤집어썼다.
곧 차토구아는 축 늘어진 채 죽어 버렸다.
“휴우…….”
헤르메스는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들을 닦아 냈다.
곧 차토구아를 쓰러뜨렸다는 메시지창이 그의 눈앞에 떠올랐다.
드디어 이 힘든 전투를 끝마친 것이다.
그는 대규에게 날아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수고했다.”
대규는 그가 내민 손을 악수하며 역시 대답했다.
“너도 수고했어.”
“아니야. 나 혼자였다면 녀석을 해치우지 못했을 것이다. 고맙다.”
그들은 이제 평원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미마스와 외계인들이 죽자 적군의 졸개들은 우왕좌왕하며 흩어져 버렸다.
헤르메스 부대의 영웅들은 그 졸개들을 추격해 파죽지세로 쓰러뜨리고 있었다.
그들은 아테나가 누워 있는 곳 근처로 다가갔다.
그런데 그녀 옆엔 추락해서 죽은 줄로만 알았던 헤르메스의 말이 있었다.
말을 본 헤르메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판디아! 살아 있었구나. 이게 대체 어떻게… 혹시 자네가?”
그는 대규를 돌아보며 물었고, 대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토구아가 맨 처음 유독가스를 살포했을 때 대규는 가스 속에서 히이잉거리는 말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공략집의 지도창으로 확인해 보니 헤르메스의 말이 빠르게 평원 바닥을 향해 추락하고 있었다.
재빨리 그쪽으로 날아가 말을 구해 이곳에 내려놓았다.
물론 말을 구하긴 했지만, 피부는 유독가스에 당해 엉망진창인 채 그대로였다.
“추락하는 녀석을 잡아 이곳에 잘 놔뒀다. 하지만 시간이 없어 회복은 시키지 못했다.”
“히힝…….”
헤르메스의 말은 쓰러진 채로 힘없이 울었다. 말의 피부는 산성 가스에 노출되어 벗겨지고 붉은 속살이 군데군데 드러나 있었다.
헤르메스는 말에게 다가가며 외쳤다.
“미안하다, 못난 주인을 둔 판디아 너에게 정말 미안하다!”
그는 그렇게 외친 뒤 손을 들어 말의 등에 올려놓았다.
그의 손에서 은은한 빛이 나기 시작했고, 녹았던 말의 피부가 재생되기 시작했다.
‘저게 회복 마법인가?’
대규가 실제로 회복 마법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얼마 후 말의 상처들은 말끔히 치료됐다. 꼭 생명력 회복 포션을 먹었을 때와 비슷한 효과인 것 같았다.
‘나도 저런 스킬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처음에 차토구아의 혓바닥에 맞았던 말의 엉덩이 상처는 미세하게 남아 있었다.
헤르메스는 말의 엉덩이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건 승리의 상처로 간직하자꾸나.”
그리고 그는 고개를 돌려 대규에게 다시 한 번 감사하단 말을 했다.
“고맙다, 정말 고맙다.”
“아니야.”
“이 일은 내가 제우스 님에게 꼭 말씀드리겠네. 정말 고마워.”
심지어 헤르메스는 대규에게 고개까지 숙이며 고마워했다.
신이 자신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본 건 처음이라 대규는 당황스러웠다.
‘인간, 세미데우스 였을 땐 내가 항상 신들 앞에서 고개를 숙였는데 말이야.’
고개를 든 헤르메스는 말을 이었다.
“자네는 이제 정말 어엿한 판테온의 신일세. 솔직히 이번 전투 전엔 애송이 신이라고 좀 깔봤었는데… 그런 나를 용서해 주게. 정말 미안하네.”
“아니야.”
“난 앞으로 자네를 진정한 신으로 인정하겠어. 자네에게 내 장화를 준 게 영광처럼 느껴지는군.”
그들은 다시 한 번 우호적인 악수를 했다.
“그럼 이제 아테나에게 가자구.”
그들은 누워 있는 아테나 곁으로 다가갔다.
헤르메스는 온몸이 굳어진 아테나의 모습을 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후우, 아테나가 이렇게 얌전하게 굳어 버리다니.”
대규는 헤르메스를 보며 물었다.
“헤르메스, 자네는 하스터의 저주를 풀 방법을 알고 있나?”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이런 석화 공격은 나도 처음 보네. 나도 잘 모르겠네. 어떻게 해야 할까?”
“흠, 큰일이군.”
혹시 공략집이 석화를 푸는 방법을 알려 주지 않을까 싶어 가만히 있어 봤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헤르메스는 누워 있는 아테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아테나도 이렇게 보면 참 예쁜 구석이 있단 말이야. 성격이 지랄 맞아서 그렇지, 솔직히 그녀 정도면 판테온 여신 중 미녀에 속하지. 그만하면 매력도 있고…….”
“그게 지금 무슨 소리인가! 빨리 석화를 풀 궁리나 하게.”
대규가 이렇게 말했지만, 헤르메스는 계속해서 아테나에 대해 평가를 하고 있었다.
“왜, 사실이지 않은가? 평소엔 무서워서 말도 잘 못 붙이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판테온엔 아테나를 짝사랑하는 남신이 꽤 있다구. 아프로디테처럼 남자를 확 끌어당기는 색기 넘치는 매력을 지니고 있는 건 아니지만, 나름 마니아층을 확보하고 있지.”
그러자 대규는 저도 모르게 이렇게 말해 버렸다.
“마니아층? 혹시 헤파이스토스 신 말인가?”
“자네가 그걸 어떻게…….”
헤르메스가 살짝 놀란 표정으로 대규를 바라보며 물었다.
대규는 예전에 헤파이스토스의 작업장에 가서 아테나의 형상을 한 피규어들을 잔뜩 봤던 걸 그에게 얘기해 줬다.
“…그랬군. 뭐, 헤파이스토스의 아테나 짝사랑은 유명한 이야기니까. 그나저나 이 석화 마법을 어떻게 풀어야 한다?”
그들은 아테나를 바라보며 한참 동안 궁리했다.
얼마 후 헤르메스가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흐음… 대규, 나는 인간 세상에 존재한다는 전설이나 신화에 대해서 들어 본 적이 있다.”
“무슨?”
그의 심각한 표정을 보니 왠지 모르게 불안감이 엄습했다.
헤르메스는 대규를 보며 말을 이었다.
“인간 세상엔 그런 전설이나 신화가 있다고 하던데. 여성이 이런 유의 저주에 걸리면 상대 남성이 키스를 해야 저주가 풀린다는…….”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마법에 걸려 영원한 잠에 빠진 공주를 구하기 위해 왕자가 키스해서 깨운다는 그런 이야기도 있지 않은가?”
어이없다는 듯 헤르메스를 바라보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건 동화 속에나 나오는 낭만적인 이야기에 불과하다.
게다가 온몸이 구더기로 이뤄진 그 끔찍한 몰골을 지녔던 외계인 하스터가 건 저주가 그토록 낭만적인 방법으로 풀릴 리가 없다.
대규는 한심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헤르메스에게 물었다.
“자네, 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뭔가?”
그러자 헤르메스는 손사래를 내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 그냥 나는… 말이 그렇다는 걸세. 그런데…….”
그는 대규의 어깨에 달린 아테나의 아이기스 방패 한 짝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테나는 자네를 정말 좋아하나 보군. 평소에 목숨처럼 소중히 아끼는 아이기스 방패 한 짝을 넘겨주고 말일세.”
“자네는 전투에 출전하기 전에도 그런 소리를 했는데, 그게 그렇게 엄청난 일인가? 아테나는 나에게 신이 된 기념과 부대 이별 선물로 이걸 준 것뿐이네.”
“대규, 자네는 아테나가 그 방패를 어떻게 여기는지 전혀 모르고 있군.”
공략집으로 대충 알고는 있다.
아테나가 목숨보다도 소중히 여기는 물건이란 내용을 읽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그 방패를 실제로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본 적이 없었다.
대규는 궁금해져서 헤르메스에게 물었다.
“대체 그녀가 이걸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길래 그러는 건가?”
그러자 헤르메스가 이렇게 말했다.
“크흠… 좀 천박한 비유를 하자면… 남자로 치면 자신이 지니고 있는 불알 두 짝 중 한 짝을 내준 것이나 다름없다고나 할까. 자네도 남자니까 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잘 알겠지?”
헉, 그 정도였단 말인가.
헤르메스는 신이 나서 떠들어 댔다.
“아테나가 그 정도로 호의를 보인 남자는 여태까지 없었네! 이거, 이거, 이 사실이 소문이 나면 판테온에 존재하는 아테나의 마니아층들이 들고일어나겠는걸!”
“그런 쓸데없는 생각 말고, 석화 마법을 풀 궁리나 해 보게!”
그때 아테나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