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4
204화 전장의 새국면 (10)
멀리 있지만 그들의 전투광경이 선명하게 보였다.
크투가는 하스터를 어느새 불길로 맹렬히 공격하고 있었다.
‘좋았어. 곧 따라가서 같이 합세하면 하스터도 해치울 수 있을 것 같다.’
이번엔 딥원 부대들을 살펴볼 차례다.
딥원들을 크아이가와 싸우고 있었는데 역시 호전이었다. 딥원들은 크아이가를 상대로 전의를 불태우며 싸웠다. 정말 그들끼리는 사이가 좋지 않은 것 같았다.
딥원들은 크아이가의 촉수들을 사정없이 물어뜯고 있어서 크아이가는 쪽도 못 쓰고 있었다. 재생 능력이 딥원들의 공격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때 크아이가가 눈동자를 번쩍 뜨려고 했다.
‘안 돼. 분명 파괴신이 내려온다고 했다!’
그 순간 얀슬레이가 크아이가의 눈동자에 날카로운 송곳니를 콱 박아 버렸다.
나이스 어택.
크아이가는 결국 쪽도 못 쓰고 눈을 감았다.
하긴, 딥원 부대는 다 합쳐서 거의 50명에 육박한다. 50 대 1로 싸운다면 아무리 외계인 보스라도 홀로 이기기는 힘들 것이다.
크아이가가 눈을 감자마자 메시지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크아이가를 쓰러뜨렸습니다.]
[많은 양의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마나를 3,000 흡수했습니다.]
[레벨이 한 단계 상승했습니다.]
드디어 레벨이 오르는군.
레벨 업을 했다는 메시지창이 뜨자마자 대규의 몸이 하얗게 빛났다.
고오오오-
곧 하얀 빛이 황금빛으로 변했다.
‘이건 뭐지? 여태까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온몸이 더욱 가벼워지고, 그전보다 뼈대가 훨씬 단단해진 것 같았다. 느낌상일까?
‘아니면 신의 레벨 업은 다른 것인지도 모르지.’
대규는 딥원들에게 다가가 잘했다고 격려한 뒤 이렇게 말했다.
“수고했다. 전투가 끝나면 너희들에게도 보상을 나눠 줄게.”
“아, 아닙니다. 그러실 필요 없…….”
“아니야. 너희는 받을 만해.”
사실 자신은 거의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는데 경험치와 마나가 고스란히 들어왔다. 그리고 딥원 녀석 중에는 크아이가에게 공격을 당해 상처를 입은 녀석들도 있었다.
어쨌든 이들이 힘을 써서 크아이가를 해치운 것이니 그에 걸맞은 보답은 해 줘야 할 것이다.
얀슬레이와 딥원들은 한사코 사양했지만 그들의 표정은 몹시 밝았다.
대규가 인피니투스 가방을 열자 딥원들은 그 안으로 다이빙하듯 몸을 던졌다.
‘그럼 이제 하스터만 남았군.’
대규는 헤르메스의 장화를 이용해 하스터를 향해 날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평원에 떨어져 타 죽은 비야키들의 시체에서 뭔가가 둥실 떠올랐다.
‘저게 뭐지?’
통통하고 단단해 보이는 기다란 소시지같이 생긴 물건이다.
물론 소시지보다는 흉측하게 생겼지만 말이다.
그건 비야키들의 꼬리였다.
갑각류의 껍질로 둘러싸여 있는 단단한 꼬리.
아무래도 녀석들을 해치우면 보상으로 주어진다는 ‘광속의 꼬리’인 것 같았다.
공략집의 내용에 따르면, 녀석들의 저 꼬리엔 특수한 기관이 달려 있다고 했다. 그 기관 때문에 보유 스킬인 쾌속 비행을 사용해 광속으로 날아갈 수 있단다.
꼬리는 두둥실 떠오른 뒤 사라져 버렸다. 아무래도 주둔지로 전송된 것 같았다.
‘그나저나 저 꼬리는 어디에다가 쓰지? 내 엉덩이에다가 달면 비야키처럼 빠르게 날 수 있을까? 하지만 그건 좀…….’
대규는 자신의 엉덩이에 방금 사라진 비야키의 갑각류 꼬리가 달리는 걸 생각해 봤다.
붉은 소시지 같은 꼬리엔 북슬북슬 기분 나쁜 털까지 돋아나 있었다.
‘별로 달고 싶지 않은걸. 어쨌든 하스터를 해치우러 가 보자.’
대규는 마침내 하스터를 향해 날아갔다.
얼마 후 크투가의 불길이 보였고 눈을 감았다.
자칫 잘못해 하스터의 얼굴을 봤다가 몸이라도 굳어지면 낭패였으니까 말이다.
하스터가 비야키를 타고 빠르게 날아다니는 통에 대기의 흐름이 마구 흔들렸다.
대규는 장화로 대기의 흐름을 뚫고 날아간 뒤 좀 전에 복사해 뒀던 미마스의 스킬 다운그레이드를 다시 한 번 시전했다.
쿠구궁-!
마의 돌에서 생성된 기운이 대규의 생명력을 다시 흡수하기 시작했다.
흐음, 두 번째 겪으니까 아까보다 울렁거림이 덜한 것 같… 긴 개뿔, 다시 겪어 봐도 몹시 불쾌한 기분이었다.
‘빨리 흡수해라. 저 녀석이 광속의 속도로 달아나기 전에.’
곧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고, 곧 단단하게 응집된 기운이 하스터와 그가 타고 있는 비야키를 향해 날아간다.
퍼어엉!
기운을 정통으로 맞은 하스터와 비야키의 속도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대규는 흡혈의 화염을 사슬검에 장착하고 휘둘렀다.
휘리릭-
비야키의 약점인 꼬리에 사슬 검날들이 빙 둘러졌다.
“키에엑!”
비야키가 괴로운 듯 울부짖었고, 대규는 사슬검의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화르륵-
녀석의 꼬리에 불이 붙기 시작했고, 균형을 잃은 녀석은 서서히 추락하기 시작했다. 불꽃이 꼬리를 태울수록 대규의 몸엔 비야키의 생명력이 흡수됐다.
“#%%[email protected]”
하스터는 당황해서 소리를 내질렀다.
“이젠 네 차례다!”
대규는 눈을 감은 채 하늘 높이 점프했다.
눈을 감고 있지만, 자신의 아래쪽에 있는 하스터의 녹아내리고 있는 정수리가 보였다.
“레툼 익투스!”
번쩍!
악마의 화염을 품은 화염 구들이 하스터의 몸을 향해 거세게 날아갔다. 그리고 일격의 기운을 품은 화염구는 정확히 하스터의 목에 명중했다.
파아앙!
화염구가 터지면서 하스터의 목은 단번에 잘려 나가 버렸다.
확실히 크투가가 불길로 녀석을 공격한 탓에 녀석의 힘은 꽤 많이 약해져 있었다.
샤샤샥-
녀석의 몸을 구성하고 있던 구더기들은 힘을 잃고 평원으로 우수수 떨어져 버렸다.
하스터가 입고 있었던 황색의 망토과 두건역시 힘없이 천 쪼가리만 남아서 평원으로 흐늘흐늘 내려갔다.
[하스터를 해치웠습니다.]
[많은 양의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마나를 3,000 흡수했습니다.]
[레벨이 한 단계 올랐습니다.]
‘오호, 이런 횡재가.’
또다시 레벨이 올랐다.
대규의 몸에서 하얀빛과 황금빛이 동시에 일기 시작했다.
상태창을 확인해 보니 레벨은 분명 3이 됐다.
‘좋았어.’
대규는 평원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평원에는 거미줄로 눈이 칭칭 가려진 옵티뭄과 아테나, 페가수스가 들어 있는 거대한 거미줄 고치가 놓여 있었다.
일단 옵티뭄에게 다가가 눈에 붙은 거미줄을 떼어 줬다.
옵티뭄은 그간 답답했다는 듯 히이잉, 작은 소리로 울었다.
“됐어, 됐어, 다 끝났다.”
그리고 대규는 아테나가 들어 있는 거대한 고치를 바라보았다.
‘하스터는 이제 죽었는데… 아테나의 석화 상태는 어떻게 풀어야 하지?’
대규는 일단 고치를 사슬 검날로 갈라 보았다.
서걱-
화르륵-
검날을 살짝 휘두르자 고치의 표면에 화염이 붙었고, 화염은 고치를 빠르게 태우기 시작했다.
곧 굳어진 아테나와 페가수스의 모습이 드러났다.
아테나는 몸이 굳어지기 직전 상체를 돌려 대규를 바라봤을 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심지어 무언가를 말하려고 입술을 달싹이는 것까지 그대로 멈춰져 있었다.
‘흐음, 어떻게 해야 하지? 헤르메스와 상의를 하는 게 좋으려나.’
대규는 일단 페가수스의 등 위에서 그녀를 떼어 냈다. 그리고 평원에 눕혔다. 동상처럼 세우고 싶었지만, 그녀의 자세는 도저히 땅에 세울 수가 없는 자세였다.
그는 아테나의 벌어진 입술을 가만히 바라봤다.
대체 그녀는 몸이 굳어지기 직전 대규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그런데 입술 한번 참 붉구나. 여태까진 몰랐는데…….’
화장이라도 한 것처럼 그녀의 입술은 선명한 선홍빛을 띠고 있었는데 몹시 도톰했다.
그 도톰한 입술이 살짝 벌어져서 묘한 느낌까지 풍기고 있었다.
‘이렇게 보니 전쟁의 여신 같지가 않군.’
평소엔 그녀의 얼굴을 이렇게 빤히 쳐다볼 기회가 없었다.
대규는 유심히 아테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녀의 얼굴을 계속해서 바라보자니 가슴속에서 묘한 감정이 일었다.
곧 그는 뭔가에 홀린 듯 그녀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전쟁터를 누비는 전쟁의 여신답지 않았다.
대규는 저도 모르게 흠칫 놀랐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람!’
하지만 그녀는 정말 아름다웠다. 분명 판테온엔 아테나를 짝사랑하는 신도 있을 것이다.
‘헤파이스토스가 있잖아.’
대규는 예전에 저승 레이스에 승리한 대가로 황금 눈물 갑옷을 얻기 위해 헤파이스토스의 작업장에 갔던 일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작업장에서 헤파이스토스가 잔뜩 만들어 놨던 아테나 여신 피규어(?)들을 기억해 냈다.
이렇게 온몸이 굳어져 있는 아테나를 보니 꼭 실제 사이즈의 피규어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헤파이스토스가 이걸 보면 좋아하려나. 보통 마니아들은 피규어 중에서도 실제 사이즈 피규어에 그렇게 환장을 하다던데…….’
그때 북쪽 하늘에서 우레와 같은 굉음이 들려왔다.
쾅쾅!
북쪽 방향이면 분명 헤르메스가 하스터를 피해 날아간 방향이었다.
헤르메스는 아직도 외계인들과 전투 중인 것 같았다.
헤르메스를 도와주러 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빨리 전투를 끝내고 아테나를 원래 상태로 되돌려야 한다.’
대규는 옵티뭄 위에 올라탄 뒤 고삐를 당기며 외쳤다.
“옵티뭄, 가자!”
“히이잉!”
옵티뭄은 앞발을 힘차게 구른 뒤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한편 헤르메스는 북쪽 하늘에서 한 명의 외계인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타버린 고목 같은 외계인은 간신히 물리쳤다. 하지만 두꺼비 좀비같이 생긴 녀석을 상대로 예상외의 고전을 하고 있었다.
‘대규는 어떻게 된 거지?’
전투하면서도 걱정이 가시지 않았다.
솔직히 아테나가 외계인에게 당했다는 얘기는 헤르메스에게 꽤 큰 충격이었다.
‘신의 육체를 돌처럼 단단하게 굳힐 수 있는 석화 공격이라니… 그런 건 들어 보지도 못했다. 여태까지 기간테스들도 그런 마법을 부리는 자는 없었는데!’
대체 이런 외계인들은 누가 풀어놓을 거란 말인가.
헤르메스는 이번 전투 출전 전에 아테나가 지나가듯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렸다.
‘정말로 크로노스가 다시 나타난 걸까? 말도 안 된다. 크로노스가 사라진 건 수천 년 전… 그땐 나와 아테나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의 일이다.’
그때 두꺼비 좀비 같은 외계인 녀석이 헤르메스의 옆구리를 노리고 날아왔다.
녀석은 입을 벌려 끈끈하고 기다란 혓바닥을 채찍처럼 사용했다.
휘리릭!
혓바닥이 헤르메스를 노리고 날아왔다. 하지만 그는 간신히 몸을 돌려 피했다.
조금만 늦었어도 위험할 뻔했다.
하지만 그 혓바닥은 그가 타고 있는 말의 엉덩이를 세차게 후려쳤다.
짝!
“히이잉!”
말이 고개를 쳐들고 괴롭게 울부짖었다.
휘청-
“으읏.”
말이 중심을 잃고 흔들리자 그 위에 타고 있는 헤르메스의 몸도 위태롭게 휘청거렸다.
뒤를 돌아보니 혓바닥 채찍에 맞은 말의 엉덩이 피부가 새카맣게 괴사해 있었다.
‘뭐 저런 게 다 있는가!’
헤르메스는 재빨리 고삐를 잡아당겼다. 말은 간신히 균형을 되찾지만, 힘이 잔뜩 빠진 것 같았다.
헤르메스는 황금 칼을 꺼내 휘둘렀다.
끈끈한 혓바닥을 있는 힘껏 쳐내며 생각했다.
‘이건 말도 안 된다.’
제우스가 판테온의 신들에게 하사한 이 말들은 신의 육체 정돈 아니어도 웬만한 몬스터의 공격엔 끄떡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저 개구리 좀비의 혓바닥만으로 이 말의 피부가 괴사하다니.
헤르메스는 자신의 손을 말의 엉덩이 쪽에 댔다.
곧 그의 손이 빛나면서 괴사한 조직의 피부가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완전히 아물지는 않았다.
말의 엉덩이엔 작은 상처가 남아 있었다.
‘아테나가 돌처럼 굳어진 것도 그렇고, 이 외계인들의 진짜 능력은 대체 어느 정도란 말인가?’
헤르메스는 문득 두려워졌다.
‘기간테스들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들은 다르다. 어쩌면 최후의 결전은 우리 판테온 신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만만한 전투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는 처음으로 판테온의 승리를 의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