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
199화. 전장의 새 국면 (5)
지이잉-
지팡이의 까만 돌 주변에서 공기의 장막이 일렁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장막의 파동은 미마스의 지팡이로부터 사방으로 넓게 뻗어 나갔다.
파동이 대규의 몸에 닿자마자 둔탁한 타격감이 전해졌다.
“으윽!”
그리고 투명해졌던 몸이 본래대로 돌아와 버렸다.
미마스는 드러난 대규를 보며 기분 나쁘게 웃었다.
“흐흐, 거기에 있었군. 으응? 너는 처음 보는 판테온의 신인데…….”
그는 대규를 보자 살짝 당황한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언성을 높이며 외쳤다.
“뭐 상관없다! 죽여주마!”
그때 마침 공략집의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공략집이 미마스를 상대하기 위해 최적의 전략을 알려 주기 시작합니다.>
<소환의 반지로 크투가를 불러내십시오.>
‘맞다. 반지에 저장한 크투가가 있었지.’
대규는 손가락에 낀 소환의 반지를 바라봤다.
그러자 젤리 형태의 반지 몸통이 꿀렁이며 빛이 나기 시작했다. 곧 눈앞에 새로운 메시지창이 떴다.
[소환의 반지에 저장된 몬스터를 소환할 수 있습니다. 소환할 몬스터를 선택해 주십시오.]
[크투가]
이 반지를 이호트로부터 획득한 이후 쓰러뜨린 적이 크투가 밖에 없어서 불러낼 수 있는 것도 그 녀석밖에 없었다.
그래도 크투가의 거센 불길은 꽤 위협적일 것이다.
크투가를 선택하자 마지막으로 확인 창이 한 번 더 떠올랐다.
[크투가를 소환하시겠습니까? Yes/No]
Yes.
그러자 반지에서 빛이 번쩍였다.
화르륵-
“앗, 뜨거!”
반지를 낀 손가락에서 시뻘겋고 거대한 불길이 뿜어져 나왔다.
“#%[email protected]!”
악마의 형상을 한 불길 몬스터 크투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크투가를 본 미마스가 놀라서 소리쳤다.
“이건 분명 우리 거인들의 지하 감옥 카르케르에 갇혀 있는 외계인 종족인데… 네, 네 녀석이 대체 어떻게 이걸 불러낸 거지?”
대규는 미마스의 말을 무시하며 활활 타오르고 있는 크투가에게 명령을 내렸다.
“크투가, 저 녀석을 해치워라.”
미마스가 뭐라고 더 하기 전에 크투가의 불길이 그를 덮쳤다.
화르르륵-
거대한 불길이 허공을 휘감으며 맹렬하게 미마스를 향해 날아갔지만, 그는 마법으로 실드를 쳐서 불길을 막았다.
하지만 온몸에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걸 보니 불길의 열기는 차마 막지 못한 것 같았다.
그는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비, 빌어먹을! 이거나 먹어라!”
말을 마친 미마스는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지팡이의 까만 돌이 다시 번쩍였다.
얼마 후 돌 안에서 검은 안개 같은 기운이 뭉게뭉게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뿜어져 나온 검은 기운 역시 크투가처럼 악마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불길로 만들어진 악마와 연기로 만들어진 악마가 일대일 싸움을 벌이는 꼴이었다.
화르륵-
크투가의 불길이 연기로 만들어진 미마스의 악마를 공격했다.
하지만 미마스의 연기 악마 역시 만만치 않았다.
연기 악마가 팔을 휘두르자 스모그같이 짙은 안개가 허공에 잔뜩 끼었다. 그 때문에 주변이 어두워졌고, 시야가 차단됐다.
대규가 아무리 사방을 둘러봐도 미마스와 연기 악마의 모습은 안개 속으로 자취를 감춘 뒤였다.
그때 미마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으으. 이거나 받아라…….”
번쩍!
대규가 있는 곳을 향해 하얀 빛줄기 하나가 날아왔다.
‘이건 영상으로 봤던 미마스의 보유 스킬!’
스킬 중에서도 혼란의 빛이었다.
대규는 재빨리 눈을 감았다.
공략집 영상에 따르면, 저 빛을 똑바로 쳐다보게 될 경우 혼란 상태에 빠져 넋이 나가 버린다.
어찌나 밝은 빛이었는지 눈을 감아도 섬광이 느껴질 정도였다.
다행히 눈을 감아도 공략집의 지도 창이 떠오른 덕분에 대규는 짙은 안개 속에서도 미마스의 위치를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 안개 속에서 녀석에게 몰래 접근해 주문을 외울 때를 노려, 크투가와 함께 공격을 퍼부으면 승산이 있…….’
그때였다.
대규가 타고 있는 말 옵티뭄이 이상한 목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히히이이잉!”
옵티뭄은 몸을 이상하게 흔들면서 계속 울부짖었다.
‘이 녀석이 있었지! 설마 혼란의 빛을 쳐다본 건가.’
대규는 차마 옵티뭄을 생각하지 못했다.
항상 홀로 싸워 와서 옵티뭄을 생각할 틈이 없었다. 미마스가 쏜 혼란의 빛을 볼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빌어먹을. 내가 생각이 짧았어.’
빛을 본 옵티뭄은 몸을 마구 흔들면서 괴롭게 울었다. 옵티뭄의 몸이 흔들릴 때마다 대규의 상체도 흔들렸다.
이제 완전히 혼란 상태에 빠진 옵티뭄은 날갯짓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 바람에 옵티뭄과 대규의 몸은 평원 아래쪽으로 빠르게 추락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같이 추락한다면 평원에 돋아난 암석에 찔릴 것이다.
대규는 고삐를 세차게 잡아당기며 외쳤다.
“정신 차렷!”
“히히힝!”
하지만 여전히 옵티뭄은 혼란 상태였다.
‘빌어먹을, 말에서 내릴까?’
어차피 헤르메스의 장화를 신고 있으니 말을 버리고 내려서 날아간다면 자신은 무사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옵티뭄은…….’
제우스에게 하사받은 말을 첫 전투에서 이렇게 죽도록 버려둘 수는 없었다. 그것도 자신의 실수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인데 말이다.
‘어쩔 수 없지.’
대규는 보관함을 꺼내 영약 엘릭서를 꺼냈다.
엘릭서는 생명력과 마나를 풀로 채워 줄 뿐만 아니라 그 어떤 상태 이상도 고쳐 줄 수 있는 영약이었다.
대규는 옵티뭄의 주둥이를 벌리고 영약을 들이부었다.
콸콸콸-
영약을 마시자 옵티뭄의 혼란 상태가 거짓말처럼 회복됐다. 녀석은 다시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날기 시작했다.
“히이잉-”
녀석은 대규를 비난하듯 살짝 높은 톤의 울음소리를 냈다.
대규는 그런 녀석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가 미안하다. 앞으론 이런 일 없을 거야. 이제 싸울 땐 널 꼭 고려하도록 할게.”
말을 마친 뒤 다시 미마스가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한편 미마스는 자신이 만들어 낸 검은 안개 속에서 크투가의 불길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젠장! 저 녀석은 분명 최근에 신이 된 애송이 신이 분명하다. 그런데 애송이 신 녀석이 어떻게 카르케르의 외계인을 잡아서 다룰 수 있게 된 거지?’
게다가 거인 감옥 카르케르는 거인이 아니면 출입할 수 없는 곳이다. 심지어 판테온의 신들도 출입이 불가능하다.
미마스로선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크투가의 불길은 엄청났다.
이리저리 너울거리며 춤추는 불길은 미마스를 에워쌌다. 미마스는 이 불길의 열기를 막느라고 다른 저주 마법 공격을 할 틈이 없었다.
게다가 크투가의 불길은 점점 더 강력해지고 있었다.
‘크윽! 이 스킬을 벌써 쓰고 싶진 않지만, 어쩔 수 없다.’
미마스는 이내 결심한 듯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자신의 지팡이를 하늘 위로 번쩍 들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이상한 주문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지팡이에 달린 까만 돌로 이상한 기운들이 스멀스멀 모여들기 시작했다.
“크으윽!”
그는 괴로운 듯 얼굴을 찡그리며 신음을 냈다.
그 기운들은 미마스의 몸에 착 붙어서 그의 생명력을 빼앗고 있었다.
미마스의 생명력을 빼앗아 흡수한 기운들은 점점 그 크기가 커졌고, 얼마 후 한곳에 모여 응집됐다.
응집된 기운들은 이제 악마 형상을 한 불길, 크투가를 향해 날아갔다.
콰콰쾅!
미마스가 쏘아 낸 그 응집된 기운과 크투가가 맞부딪히며 엄청난 굉음이 허공을 울렸다.
그리고 크투가의 불길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 틈을 타 미마스는 고급 생명력 포션을 꺼내 급하게 들이켰다.
꿀꺽꿀꺽-
그러자 절반으로 떨어진 생명력이 다시 차올랐다.
그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크투가를 바라보았다.
크투가는 판테온의 바닷물을 한 바가지 맞은 것처럼 불길의 크기가 현저하게 줄어들어 버렸다.
그리고 강렬하게 뿜어지던 열기 역시 팍 죽어 버렸다.
미마스는 이제 불길의 후끈함을 더 이상 느끼지 않았다.
그는 크투가를 바라보며 여유롭게 말했다.
“후후후, 이건 완전히 귀여운 불꽃이 되어 버렸군. 외계인 종족 중 보스 녀석이라서 내 생명력을 평소보다 많이 흡수시켰더니 효과가 있었군.”
이건 미마스가 보유한 스킬 중 하나인 다운그레이드의 효과였다.
자신의 생명력을 깎아 상대방의 스탯과 능력을 77% 감소시키는 저주였다.
작아진 크투가는 그래도 열심히 불길을 미마스에게 날렸다. 하지만 공격은 전처럼 강력하지 않았다.
안개 속에서 미마스가 아까 불러냈던 연기 형상의 악마가 다시 나타나 작아진 크투가를 향해 다가갔다.
푸슈슉!
연기 악마의 입에서 짙은 스모그 가스가 분말 소화기처럼 강력하게 뿜어져 나갔다.
그러자 크투가가 괴로운 듯 울부짖었다.
“#$$%!”
곧 스모그 가스는 크투가의 불길들을 깡그리 꺼 버렸다.
크투가는 마지막 남은 불길을 필사적으로 태우고 있었다. 그 불길은 손바닥만 한 크기로 아주 작았다.
마지막 불길이 혼신의 힘을 다해 미마스에게 날아왔다.
화륵-
불꽃은 미마스의 상체에 들러붙었다. 하지만 미마스는 별 뜨거움도 느끼지 못했다.
“하하! 이거 따뜻한데? 굳이 꺼 버릴 필요 없이 난로처럼 달고 다녀도 되겠어. 하하!”
미마스는 자신의 승리에 도취돼서 외쳤다.
그때였다.
“레툼 익투스!”
화르륵-
그의 등 뒤에서 까만 악마의 화염이 기습적으로 덮쳐 왔다.
당황한 미마스는 재빨리 화염을 피하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곧 연기 형상의 악마가 대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대규의 사슬검 끝에서 뿜어져 나간 악마의 화염과 연기 악마가 뱉은 스모그 가스가 맞붙었다.
화르르륵-
하지만 악마의 화염이 한 수 더 강했다.
스모그 가스가 밀리며 불타 버리자 미마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대규는 옵티뭄을 타고 거대한 연기 악마를 향해 달려간 뒤 안장 위에서 높게 점프했다.
그리고 사슬검을 머리 위로 치켜든 뒤 연기 악마의 머리 위를 내리쳤다.
화르르륵-
“크어어어!”
사슬검의 불길이 연기 악마의 정수리부터 명치, 배꼽까지를 시원하게 갈랐다.
곧 연기 악마는 재가 되어 허공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뭐 저런 게 다 있어……!”
미마스는 그런 대규를 보고 놀라서 중얼거렸다.
“크윽… 저 자식에게도 다운그레이드를 써야겠어.”
미마스는 다시 한번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자신의 생명력을 또다시 절반이나 깎아야 하는 게 성가셨지만, 그렇다고 그 스킬을 쓰지 않으면 죽을지도 몰랐다.
다시 한 번 이상한 기운들이 지팡이 주변에 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까와 달리 기운들이 충분히 생성되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지?”
그가 보유한 마나량은 충분했다.
그런데 갑자기 온몸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보다 몸이 무거워졌는데…….’
확인해 보니 자신의 생명력이 뭉텅 깎여 있었다.
미마스는 깜짝 놀랐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공격을 받은 적도 없는데!’
심지어 생명력은 지금 이 순간에도 서서히 줄어들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저 녀석이 생명력을 흡수하는 저주라도 건 것인가?’
대규는 당황하는 미마스를 보며 씨익 웃었다.
그리고 미마스의 몸에 붙어 여전히 타오르고 있는 크투가의 마지막 작은 불꽃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크투가의 불꽃이 아니라 대규가 미리 크투가를 소환해 심어 놓은 ‘흡혈의 화염’이었다.
흡혈의 화염은 상대방을 태우면 태울수록 그의 생명력을 흡수하는 신비한 불꽃이었다.
물론 이 불꽃은 크투가의 불길이나 대규 사슬검에 붙어있는 악마의 화염처럼 공격력이 월등히 높지는 않았다.
‘하지만 생명력 흡수 능력 하나는 짱이군! 솔직히 저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미마스는 승리에 도취한 탓에 그 화염이 자신의 생명력을 흡수하는 것도 모르고 계속 달고 다녔던 것이다.
“크으윽! 설마 이 불꽃이 문제인가!”
그제야 알아차린 미마스는 불꽃을 떼어 낸 뒤 다시 짙은 안개를 분사해 시야를 차단했다. 그리고 그 틈을 타 품속에서 생명력 포션 하나를 더 꺼내 마시려고 했다.
떨어진 생명력을 회복해야 다운그레이드 스킬을 쓸 수 있었다.
‘시야를 차단해야 녀석이 내가 포션 마시는 걸 방해할 수 없지.’
하지만 미마스는 모르고 있었다.
아무리 안개가 짙게 껴도 대규는 미마스의 위치를 다 알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미마스가 포션의 뚜껑을 여는 순간 사슬 검날이 휘리릭 날아들었다.
“레툼 익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