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
195화. 전장의 새 국면 (1)
대규가 말의 눈빛에 감탄하고 있는 사이 제우스가 그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럼 헤르메스와 아테나, 대규는 주둔지로 향하도록 하라!”
그들은 제우스의 명령을 받았다.
“알겠습니다.”
그들이 대답하자마자 그들과 대규의 주변에 투명한 이동 결계가 쳐졌다. 얼마 후 그들은 헤르메스의 주둔지에 도착했다.
헤르메스의 주둔지엔 다급한 기운이 풍겼다. 다들 주둔지 근처로 다가온 적들 때문에 정신이 없는 것 같았다.
헤르메스는 아테나와 대규에게 말했다.
“나는 우선 지휘 사령부 천막에 들어가 아군에게 전투 계획을 설명하고 오겠네. 그대들은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게. 돌아와서 우리끼리의 전투에 대해 논의하지.”
그리고 대규에게는 주둔지의 한구석을 가리키며 이렇게 덧붙였다.
“자네의 말은 저곳에 매어 두도록 하게.”
그가 가리킨 곳에는 헤르메스의 말과 아테나의 말 페가수스가 매어져 있었다.
대규는 그곳으로 말을 끌고 가 녀석을 매어 두고 다시 돌아왔다.
이제 헤르메스는 지휘 사령부 천막에 들어갔고 천막 밖에는 아테나 여신과 대규 단둘만이 남아 있었다.
아테나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무표정이었는데 차가움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도무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대규는 그녀를 보며 먼저 입을 열었다.
“여신이시여.”
그러자 아테나가 딱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제 그대는 나와 같은 신이다. 더 이상 나를 존대할 필요가 없다.”
평소보다 10배는 딱딱해진 목소리였다.
“그래도 어색합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여신님의 부하였는데 갑자기 존대하지 말라고 하시면…….”
그때 대규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아테나 여신은 더 이상 차가운 무표정을 하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서글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중앙 신전에서, 그리고 좀 전까지도 지었던 무표정은 오간 데 없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딱딱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제 그대는 나의 부하가 아니다. 그러니 존대하지 마라.”
하지만 서글픈 표정을 지으며 저런 말을 하니 입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대규는 아주 어색한 목소리로 아테나에게 말했다.
“아테나.”
무지하게 어색했다.
아테나는 막상 듣고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고 대규를 바라보았다.
“존대하지 마라 해서 안 했는데 막상 안 하니까 어색하네.”
대규는 이렇게 말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앞에 있는 아테나의 모습은 난생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여태껏 그녀는 대규의 상관이어서 항상 위엄에 넘쳤고, 대규보다 우월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 앞에 서 있는 그녀는 달랐다.
아름다우면서도 전투도 잘하는, 믿을 수 있는 동료였다.
존대를 버리자 어느새 상관을 대할 때 느꼈던 어려움은 사라지고 마음이 편해지기 시작했다.
한편 아테나는 놀란 표정으로 대규를 바라봤다.
‘이제 저자는 내 부하가 아니다.’
존대까지 하지 않으니 정말 그렇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토록 뛰어난 부하를 잃었다는 상실감 때문인지 그녀의 마음속엔 서운함이 일었다.
그녀는 항상 대규와 함께 전투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내 욕심이다. 이제 이자는 신이 됐고, 자신만의 부대를 만들게 될 터인데.’
그녀는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얕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다시 한 번 서글픈 표정이 얼굴에 드러났고, 대규가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표정 짓지 마. 우린 전투를 앞두고 있다. 전쟁의 여신이란 말이 무색하게 그런 약한 표정을 지으면 어떻게 해?”
그 단호한 말을 듣자 아테나는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갑자기 그녀 마음속에서 부끄러움이 치솟았다.
‘과거 부하였던 자에게 따끔한 소리를 듣다니, 내가 너무 마음이 약해졌구나. 나답지 않다.’
아테나는 서글프던 표정을 편 뒤 대규에게 말했다.
“그대 말이 맞다. 고맙다.”
그녀는 대규를 향해 미소를 지은 뒤 자신의 어깨에 달린 아이기스 방패 하나를 떼서 그에게 내밀었다.
“이걸 받아라.”
“이건?”
대규가 묻자 아테나가 대답했다.
“내가 그대에게 주는 선물이다. 신이 된 기념, 그리고 내 부대를 떠나는 이별 선물이다.”
대규는 이 아이기스 방패의 위력을 알고 있었다. 이 방패는 단순히 적의 공격을 막는 방패의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제우스의 벼락을 불러와 상대를 공격할 수 있는 마법이 깃들어 있기도 했다.
심지어 아테나는 이 방패만으로 기간테스를 무찌른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 귀한 걸 자신에게 주다니.
예상치 못한 그녀의 선물에 대규는 넋이 나간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이건 귀한 거 아니야? 이걸 정말 나에게 줘도 괜찮겠어?”
“그대에게 꼭 주고 싶다. 그대는 내 부대에 있을 때도 많은 공적을 세웠으니까. 그리고 그대는 내가 봐 왔던 영웅 중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영웅이었으니까…….”
그 말을 들은 대규의 표정이 환해졌다.
전쟁의 여신인 아테나에게 뛰어난 영웅으로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그 말을 하는 아테나의 얼굴은 묘하게 붉어져 있었다.
‘왜 저러지?’
대규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적잖이 당황했다. 얼마 후 대규의 시선을 의식한 여신은 샐쭉한 목소리로 이렇게 덧붙였다.
“하, 하지만 내가 그대를 뛰어난 영웅으로 인정했다고 자만하지 마라!”
“알겠어.”
대규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하지만 아직도 아이기스의 방패를 건네받진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이 귀한 걸… 그냥 받아도 되는 건가?’
대규의 망설이는 모습을 본 아테나는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
“지금 왜 망설이는 건가? 혹시 나의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냐?”
“아, 아니, 그건 아닌데… 정말 이 귀한 걸 나에게 줘도 되는 거야?”
그러자 갑자기 아테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몹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흐음… 판테온의 남신들에게 그대의 선물로 뭘 해 주는 게 좋을지 물어보니 다들 무기를 주면 좋아할 거라고 했는데…….”
대규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아테나는 항상 근엄하고 고고한 태도를 지닌 여신이었다. 그런데 그 고고한 전쟁의 여신이 자신의 이별 선물을 고르기 위해 다른 남신들에게 조언을 구했다고?’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다른 남신들에게 선물 추천을 받는 아테나의 모습을 생각하니 입가에서 절로 킥, 하는 웃음소리가 튀어나왔다.
“그건 대체 무슨 웃음소리인가!”
아테나가 노한 목소리로 따져 묻자 대규는 황급히 변명했다.
“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면 그대는 혹시…….”
아테나의 얼굴이 다시 한 번 붉어졌다.
“…다른 선물을 원하고 있는 건가?”
“다른 선물?”
대규가 묻자 아테나는 더더욱 얼굴을 붉히며 말을 이었다.
“사실 아, 아프로디테가 남자들은 무기보다 다른 선물을 더 좋아한다고 했다.”
“뭘?”
아테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녀의 얼굴은 이제 붉어지다 못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페가수스를 타고 창을 휘두르며 아군을 호령하는 호기로운 전쟁의 여신 모습은 오간 데 없고 수줍은 소녀의 모습만이 남아 있었다.
“누, 눈을 감아라.”
아테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규에게 말했다. 그녀의 얼굴엔 오만 감정이 다 떠올라 있었다.
부끄러움과 긴장, 어쩔 줄 몰라 하는 당황스러움 등…….
대규는 그 모습을 본 뒤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아니야! 나는 아이기스 방패가 좋아.”
그 말을 듣자 여신은 고개를 돌려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면서 말했다.
“다행이군. 그래, 여기 있으니 받아라.”
대규는 그제야 아테나가 내민 아이기스 방패를 받았다. 방패 한가운데에는 뱀 괴물 아이기스의 얼굴이 거대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 얼굴을 바라보자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아이기스의 방패(신화)]
[아테나가 소유하고 있는 한 쌍의 방패 중 하나로 그녀가 목숨보다도 더욱 소중하게 아끼는 방패. 방패 모드일 때는 적의 공격을 막아 낼 수 있으며, 제우스의 벼락을 소환해 적에게 내리치는 공격 기능도 갖고 있다. 물리 방어력 +100, 마법 저항력 +100]
예상했던 대로 엄청난 효과를 지니고 있지만 설명 창의 내용 중에서 한 부분이 가장 돋보였다.
바로 이 아이기스 방패는 아테나가 목숨보다도 더욱 소중하게 아끼는 방패라는 설명 부분이었다.
‘이런 방패를 나에게 주다니.’
대규는 새삼 아테나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말했다.
“아테나, 고마워.”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돌린 뒤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별것 아니다. 이걸로 내 선물은 끝이야. 그럼 헤르메스를 기다리도록 하지.”
그녀는 새침한 목소리로 말한 뒤 헤르메스가 들어간 지휘 사령부 천막을 바라보았다.
대규는 속으로 웃으며 그런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신의 이런 모습은 난생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전까지 그녀는 대규의 차가운 상관이었다.
하지만 이런 순수하고 수줍은 소녀의 모습이 그 냉혹한 전쟁의 여신 속에 존재하고 있다니.
‘어쩌면 전쟁과 전투만 잘하지 의외로 엄청 순수한 존재일지도 몰라.’
아무래도 같은 신이 되니까 그전보다 그녀의 인간적인 모습이 더 보였다.
그전엔 위엄이 넘쳐났고, 보기만 해도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는데 말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마침 헤르메스가 지휘사령부 천막에서 걸어 나왔다. 그의 표정은 자못 심각해 보였다.
“이리로 오게!”
헤르메스는 손을 들어 아테나와 대규를 불렀고, 그들은 그의 지휘 사령부 천막 안쪽으로 들어갔다.
천막 안으로 들어가자 헤르메스 부대의 영웅들이 잔뜩 서 있었다.
헤르메스는 다급한 목소리로 아테나에게 말했다.
“아테나여, 큰일이다. 이번 적들은 만만치 않은 것 같아.”
“그게 무슨 말이지?”
아테나가 묻자 그는 대답했다.
“영웅들의 정탐에 따르면, 적진엔 하나 남은 거인 대장 미마스뿐만이 아니라 이상한 괴물들이 잔뜩 있다고 하더군. 얘기를 들어 보니 그 괴물들은 판테온의 종족이 아닌 것 같다.”
“그럼 아버지 제우스께 빨리 전갈을 보내야 하는 것 아닌가?”
“안 그래도 이쪽을 정탐했던 영웅들을 조금 전에 중앙 신전으로 보냈다.”
헤르메스는 이제 대규를 돌아보며 물었다.
“대규, 혹시 그대는 이 괴물들에 대해 아는 바가 있는가?”
“거인들의 지옥 카르케르에서 나온 녀석들이 아닙니까?”
아직도 자신에게 깍듯이 존대하는 대규를 보고 헤르메스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이제 존대는 관둬도 되네, 친구.”
맞다. 이젠 헤르메스도 같은 신이지.
존대가 몸에 배어 있어서 저도 모르게 잠깐 깜빡했다.
헤르메스는 대규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맞네. 자네 말이 맞아. 그때 자네와 내가 상대했던 히폴리토스의 몸에 돋아났던 그 이상한 촉수 괴물… 그 괴물과 비슷한 존재의 녀석들인 것 같아.”
하지만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문제는 이걸세. 그 괴물들은 저 거인 대장 미마스 혼자의 힘으로는 풀어놓을 수가 없거든. 이건 뭔가 이상해.”
그때 대규의 머릿속에 켄타로우스 숲의 세계수 꼭대기에서 봤던 불길 괴물 크투가가 떠올랐다. 그 역시 크툴루와 같은 이종족 괴물이었다.
대규는 헤르메스와 아테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사실 말할 게 있습니… 아니, 있어.”
“뭐지?”
대규는 세계수 꼭대기에서 봤던 불길 괴물 크투가에 대해 그들에게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아테나와 헤르메스의 얼굴은 점점 굳어져 버렸다.
헤르메스는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말했다.
“본래 판테온의 존재가 아닌 것들은 이 판테온의 세계에 허락 없이 들어올 수 없다. 그런데 세계수 꼭대기에 있었다고?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아테나는 충격을 받은 헤르메스에게 물었다.
“그런데 헤르메스, 그나저나 적들의 병력은 어느 정도인가?”
아테나가 묻자 헤르메스는 그녀와 대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일단 놀라운 건 미마스가 적군을 통솔하는 대장이 아니란 거야. 녀석은 거인 대장인데도 불구하고 졸개로 전락해 버렸네. 카르케르에서 튀어나온 괴물 녀석이 네 마리나 있는데 녀석들이 거인들과 다른 괴물 졸개들을 통솔하고 있지.”
대규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분명 외계인 괴물들은 거인들의 지하 감옥에 갇힌 죄수였다. 거인들이 오히려 감옥의 죄수들에게 통솔을 받다니, 이건 완전히 주객이 전도된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