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
193화. 신이 되는 길 (5)
본래 근성 스킬은 특정 행위를 반복할수록 강화되는 게 원리다.
그리고 불길을 참아 내는 것 역시 외부의 자극에 대한 신체의 반응이다.
물론 몹시 괴로울 것이다. 방금 전 불길에 손가락을 댔을 때 잠깐이었지만 뜨거워 죽을 것 같았다.
심지어 대규의 몸에는 얇은 토가 한 장만 달랑 걸쳐져 있을 뿐이었다. 불길의 열기로부터 보호해 줄 장비는 아무것도 없었다.
‘만약 내 육체가 견디지 못하고 타 죽게 되면 어떡하지?’
적과 육탄전을 벌이는 전투의 경우 보통 적에게 공격을 받으면 그만큼 생명력이 줄어들고 상태창에 표시돼 대비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불길은 달랐다. 들어가자마자 생명력이 얼마나 빠르게 줄어들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리고 처음 메시지창이 떠올랐을 때 봤던 마지막 내용이 마음에 걸렸다.
[중간에 시련을 포기하시면 저승의 망자가 됩니다.]
저 말이 뜻하는 건 뭘까. 포기하는 게 가능하다는 것 같았다.
‘그만큼 버텨 내기 힘들다는 말인가?’
망자가 돼 버린다는 내용을 보자 예전에 저승에서 봤던, 그리고 저번에 히폴리토스와 싸울 때 구덩이에서 울부짖던 망자들의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다.
꿀꺽.
한순간 두려웠다.
하지만 곧 한심함이 밀려왔다.
‘웃기는군. 내가 이렇게 나약한 인간이었나?’
여태껏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를 몇 번이고 치른 인간이 고작 맨몸이라는 이유만으로 불구덩이 앞에서 망설이고 있다니.
그런 자신의 모습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이럴 시간 없어.’
마음을 다잡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어디, 불길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
저 정도의 불길이 두려워 발을 못 내디딜 정신이었으면 애초 이 시련에 도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대규는 오른쪽 발을 불길 안으로 들이밀었다.
화르륵-
발등을 타고 빨간 불길이 붙기 시작했다.
제기랄. 예상은 했지만 정말 미칠 듯이 뜨거웠다.
너무나도 뜨거운 불의 열기는 이제 고통으로 변해서 온몸의 신경을 괴롭게 자극했다.
아틀라스에게 한 대 얻어맞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런 물리적 충격을 주는 공격은 전투로 단련된 맷집으로 버텨 낼 수 있었지만, 이 불길은 달랐다.
여태껏 마력 저항이 담긴 아이템으로 막아 냈기에 이런 불길은 적응이 되지 않았다.
살갗이 녹아내리고 있는 것 같았다. 사방에서 살이 타는 역겨운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몸에 걸친 얇은 토가는 이미 타 버린 지 오래였다.
머리카락 역시 어느새 다 타 버려 대머리가 됐고, 살갗은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서로 눌어붙기 시작했다.
여태껏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를 했지만 이런 고통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건 이토록 뜨거운 불길이 신체에 고통을 가하고 있는데 생명력은 전혀 줄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무슨 신의 장난이란 말인가!’
생명력이 줄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정상이지만 너무 고통이 강해서 차라리 생명력이 뭉텅 떨어져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때 불현듯 메시지창이 하나 떠올랐다.
[시련을 중도에 포기하실 수 있습니다. 포기하시겠습니까? Yes/No]
활활 춤추는 불길 사이로 또렷하게 포기, 라는 단어가 보였다.
광대뼈 위로 볼살이 녹아내리는 걸 느끼며 대규는 입을 열었다.
“웃기지 마!”
입을 열어 외치자 이번엔 불길이 입안으로 마구 들어와 혀와 입천장을 태워 녹였다.
괴롭다. 당장에라도 의식을 잃고 쓰러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자신은 이겨 낼 것이다.
대규는 발을 들어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뎠다.
그때 눈앞에 새롭게 메시지창이 떴다.
[근성 스킬이 발동됩니다. 새로운 능력 ‘인내’를 익혔습니다.]
[인내 +200]
발을 움직이자 인내가 단번에 200이 올랐다.
아스클레피오스에게 신체 강화 수술을 받았다 하더라도 200이면 비약적인 수치였다.
아무래도 지금 이 상황이 몹시 견디기 힘든 상황이라 그런 것 같았다.
견디기 힘든 상황을 이겨낼수록 수치는 더더욱 많이 오르겠지.
대규는 이를 다시 악물고 심장이 있는 곳을 향해 천천히 걸어 나갔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인내 수치가 상승했다.
+400.
+600.
인내 능력이 상승할수록 신기하게도 불길의 열기가 덜 뜨겁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불이 안 뜨거워진 건 아니었다.
불길을 인내하는 정신력이 강해져 덜 뜨겁게 느껴질 뿐이었다.
대규의 몸을 감싸고 있는 피부는 이제 여름날의 아이스크림처럼 서서히 녹아내리고 있었다.
피부가 녹아 벗겨지기 시작하면서 근육이 드러났고, 곧 근육도 녹아내리면서 하얀 뼈가 드러났다.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자 어느새 백골이 잔뜩 드러난 상태가 됐다.
‘뭐 이런 미친 경우가…….’
자신이 지닌 육체는 나름 반신반인 세미데우스의 육체였다.
‘아니야. 어쩌면 세미데우스의 육체니까 이 정도까지 버티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물론 이놈의 지독한 불길은 반신반인의 육체도 다 녹여 버릴 정도로 뜨겁지만 말이다.
그래도 대규는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백골 상태가 돼 버렸지만, 의식은 아직 남아 있었다. 이 고통이 신의 육체를 얻기 위해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과정이라면 그렇게 하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어느새 저 멀리 신의 심장이 보였다.
심장은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러면서 스스로 박동하고 있었다.
두근, 두근-
다가갈수록 박동 소리는 점점 커졌고, 대규의 두개골을 울릴 지경이었다. 황금빛 심장 표면에 울긋불긋 돋아난 혈관들은 생명력 넘치게 꿈틀거렸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이제 불길은 뼈만 남은 대규를 태우기 시작했다.
인내 능력은 상승할 만큼 상승해서 열기는 더 이상 그를 괴롭히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뼈는 뜨거운 열기 때문에 서서히 녹아내리고 있었다.
뼈가 녹아내리면 자신은 아무런 형체도 없는 무(無)의 상태가 된다.
‘제길, 몇 발자국만 더 나아가면 되는데…….’
발과 발목의 뼈가 무너져 내렸고,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에잇!’
온 힘을 다해 대규는 아직 움직일 수 있는 자신의 상체를 심장이 놓인 곳 쪽으로 날렸다.
뼈만 남은 그의 상체가 땅바닥에 닿으며 산산조각 나는 느낌이 전해졌다.
‘이렇게 죽는 걸까?’
그럴 순 없었다.
대규는 필사적으로 손을 뻗어 신의 심장을 잡았다.
뼈마디만 남은 손가락이 황금 심장의 혈관을 움켜쥐었다.
심장의 표면은 이 불길보다도 더욱 뜨거웠다.
그때 심장에서 환한 빛이 일기 시작했다.
번쩌억!
그리고 거짓말처럼 대규의 몸을 에워싸고 있는 거대한 불길의 바다가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어느새 백골 상태였던 자신의 몸이 원상태로 돌아와 있었다는 것이다.
눌어붙어서 녹아 버린 살갗도 다시 돌아왔고, 불길에 다 타 버린 머리카락도 원래대로 돋아나 있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그러자 눈앞에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신의 심장을 성공적으로 가져왔습니다. 두 번째 시련을 무사히 통과했습니다.]
[보상으로 신의 심장이 주어집니다.]
심장은 대규의 손안에서 여전히 팔딱거리고 있었다.
“하아, 내가 해냈구나.”
아무래도 불길은 자신의 의지력을 시험해 보려는 장치인 것 같았다. 생명력을 깎지도 않고 심장을 잡자마자 불길이 사라져 버리다니.
‘하지만 정말 고통스러웠다.’
대규는 심장을 보관함에 넣어 뒀다.
‘그럼 이제 모든 시련이 끝난 건가?’
그러자 대규의 속마음에 대답이라도 하듯 메시지창이 떴다.
[신의 육체를 구성하는 재료를 모두 모았습니다. 이제 판테온 신들의 주관하에 신의 육체를 얻는 의식에 돌입합니다.]
문득 세미데우스의 육체를 얻기 위해 칼리 여왕에게 갔던 일이 떠올랐다.
‘거기선 여왕에게 잡아먹히고 새롭게 태어났었지. 설마 이번에도 잡아먹히고 다시 태어나야 하는 건가?’
으윽, 살짝 몸서리쳐졌다.
그때 팔다리를 뜯어 먹힐 때 몹시 괴로웠다. 그래도 이젠 인내와 맷집이 올랐으니 괜찮지 않을까?
주변이 암흑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대규의 상상과 달리 그가 도착한 것은 판테온의 중앙 신전이었다.
중앙 신전에는 제우스뿐만 아니라 모든 판테온의 신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제우스를 필두로 신의 상석에 앉아 있었는데 하나같이 놀란 표정으로 대규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우스가 대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설마 했지만… 역시 그대는 두 개의 시련을 모두 통과했군. 그것도 몹시 빠르게 말이야. 신의 육체를 구성하는 재료들은 다 모아 왔는가?”
“그렇습니다.”
대규는 보관함을 열어 아틀라스의 투명 갈비뼈와 황금빛 신의 심장을 꺼냈다.
제우스는 그것들을 유심히 살펴본 뒤 말을 이었다.
“분명 재료가 맞군. 이제 그대는 신의 육체를 얻는 의식을 거친 뒤 신의 존재로 새롭게 태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가 손을 허공에 튕기자 대규의 이름과 징표가 수놓인 운명의 천과 바늘, 실이 나타났다.
“…그대는 이제 신의 존재로 새롭게 기록의 신전에 등록이 될 것이다.”
말을 마친 제우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대규에게 다가왔다.
그의 오른쪽 손엔 처음 봤을 때처럼 그의 상징인 거대한 벼락이 들려 있었다. 벼락은 푸른빛을 발하고 있었는데 끝부분이 뾰족한 게 꼭 검날 같기도 했고, 창끝 같기도 했다.
제우스는 대규의 몸을 찬찬히 훑어보며 말했다.
“그대는 이제 지금의 육체를 버리고 새롭게 태어날 것이다. 저 뼈와 심장이 들어간 육체로 말이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그대의 영혼을 육체와 분리를 해야겠지.”
“분리라면…….”
대규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제우스는 들고 있던 푸른 벼락을 그대로 대규의 심장에 정확히 내리꽂았다.
“커어억……!”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대규의 입에선 한 줄기의 피가 흘러내렸다.
그 순간 여태껏 살아왔던 인생의 주마등이 빠르게 스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제우스는 대규의 가슴에 꽂힌 벼락을 뽑기는커녕 힘을 줘 비틀었다. 그러자 거대한 벼락이 허공에 생성돼 대규의 정수리를 향해 내리쳤다.
콰르릉! 콰쾅!
벼락에 맞은 순간 대규의 육체는 순식간에 잿더미가 돼 버렸다.
말 그대로 존재 자체가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대규의 의식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믿을 수 없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제우스가 자신을 벼락으로 내리친 순간 텔레비전을 리모컨으로 끈 것처럼 시야가 캄캄해졌고, 그 어떤 감각도 느낄 수 없게 돼 버렸다.
하지만 그의 의식은 분명 남아 있었다.
대규는 무(無)의 형태로 신전 허공을 떠돌고 있었다.
그때 제우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그대의 기존 육체는 완전히 소멸됐다. 이제 그대에게 새로운 육체를 내리겠다.”
제우스는 먼저 아틀라스의 투명한 갈비뼈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러자 갈비뼈에서 다른 뼈들이 순식간에 자라나기 시작하면서 곧 완전한 인간의 골격을 만들어 냈다.
이제 그는 신의 심장을 들어 왼편 갈비뼈 가운데에 두었다. 그러자 심장에서 황금빛이 뿜어져 나와 뼈를 물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빠르게 육체가 구성됐다.
처음에 골격만 있을 때는 과학실에 놓인 해골 모형 같았는데 점점 새빨간 근육조직들이 붙기 시작했다. 꼭 인체의 신비전에서 봤던 전시용 인체들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근육조직 위에 반짝반짝 빛나는 얇은 막이 형성되더니 곧 뽀얀 피부가 생겨났다. 눈, 코, 입이 제 위치에 자리를 잡았고, 머리엔 윤기 나는 머리카락이 자라났다.
다 완성된 육체에선 은은하게 황금빛이 발산되고 있었다.
새로운 육체는 대규의 얼굴을 하고 있었으며 눈을 감고 있었다.
제우스는 그 육체 위로 다시 한 번 벼락을 내리쳤다.
두근, 두근!
번쩍!
대규의 눈동자가 뜨였다.
눈을 뜨자 판테온의 신들이 자신을 일제히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대규는 자신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손에선 은은한 황금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나 이제 신이 된 건가?’
그러자 제우스가 말했다.
“마음에 드는가?”
그는 작은 거울을 내밀었다.
거울을 본 대규는 깜짝 놀랐다.
‘엄청 잘생겼잖아! 정말 나 맞아?’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은 분명 자신의 얼굴이었지만, 절세미남으로 변해 있었다. 본래의 얼굴이 지닌 장점은 극대화되고 단점은 사라진 듯한 느낌이랄까.
신의 육체를 얻으면 이렇게 되는 건가.
잘생긴 사람을 보고 괜히 남신이라고 하는 게 아니었군.
대규는 자신의 새로운 육체를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바야흐로 판테온에 새로운 남신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