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
189화. 신이 되는 길 (1)
대규는 일단 흡혈의 화염을 보관함에 잘 넣어 뒀다.
한편 인피니투스는 닫혔지만, 그곳에서 나온 바닷물은 여전히 세계수의 몸통을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바닷물이 나무의 몸통을 휩쓸자, 말라비틀어졌던 세계수가 아주 천천히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시커멓게 변색됐던 몸통은 색이 연해지면서 밝은 고동색을 띠기 시작했고 가지에서도 푸른빛 잎사귀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다행히 크투가가 세계수를 완전히 태워 버리지는 못해서 세계수의 재생 능력이 정상적으로 발휘되는 것 같았다.
“다행입니다. 세계수가 되살아나고 있어요.”
케이른은 밝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어느새 바닷물은 한바탕 몸통을 흐르고 바닥을 향해 떨어졌다. 나무는 이제 완벽하게 원래의 상태로 복구됐다.
대규는 케이른에게 물었다.
“이제 세계수의 수액을 채취할 수 있는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들은 싱싱하게 돋아난 세계수의 굵은 나뭇가지 위에 섰다. 케이른은 허리춤에서 이상하게 생긴 기구를 꺼냈다.
그건 빨대가 달려 있는 유리병처럼 생긴 기구였다. 케이른은 병의 빨대 부분을 굵은 나뭇가지 한가운데 꽂았다.
푹!
빨대가 나무의 몸통에 박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빨대를 타고 수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수액은 진한 호박색을 띠고 있었다.
수액이 서서히 유리병을 채우기 시작했다.
얼마 후 유리병이 수액으로 가득 차자 케이른은 나뭇가지에 꽂힌 빨대를 뽑았다.
빨대를 뽑자마자 나뭇가지에 뚫린 구멍은 순식간에 메워졌다.
‘정말 재생력이 엄청나군.’
케이른은 세계수의 수액이 가득 담긴 유리병을 대규에게 내밀며 말했다.
“대장군님께서 필요하시다고 말했던 수액 500ml입니다.”
“감사합니다!”
유리병을 받아 든 대규의 얼굴이 환해졌다. 유리병을 보관함에 넣고 대규는 케이른과 함께 세계수를 내려왔다.
이제 현자 센텐티아에게 가서 현자의 돌을 얻고 앨릭서의 제조 방법을 알아내 그것을 만들면 된다.
일행과 함께 나무 아래로 내려오니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거의 꼬박 한나절을 세계수에서 보낸 것이다.
내려오니 켄타로우스 족 전체가 모여 있었고 숲의 땅바닥은 비라도 잔뜩 온 것처럼 축축했다. 아무래도 내려간 바닷물들이 땅바닥에 흡수된 것 같았다.
켄타로우스들은 다시 살아난 세계수를 바라보며 절을 올리고 있었다.
“오오! 세계수가 다시 살아났다!”
거의 축제 분위기였다.
대규는 땅에 서서 세계수를 올려다봤다. 여전히 세계수 꼭대기는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몸통에는 수없이 많은 잎사귀가 돋아나 있었다.
푸석푸석하고 말라비틀어졌던 게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나무의 몸통에선 윤기가 자르르 흐르고 있었다.
다른 켄타로우스들은 다들 케이른과 대규를 밝은 얼굴로 맞이했다. 다들 축제 분위기였지만, 유독 케이른만은 낯빛이 어두웠다.
우선 그는 세계수 꼭대기에 있던 불길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건 분명 판테온에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리고 대규가 통솔했던 괴물 부대 역시 그랬다.
케이른은 대규에게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대장군님.”
“네?”
“대체… 우리와 함께 싸웠던 그 존재들은 무엇입니까?”
딥원을 보고 묻는 것 같았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쓸데없이 카르케르까지 언급하고 싶진 않았다. 그곳들은 거인족들의 지하 감옥이고 아무나 갈 수는 없는 곳이다.
만약 그곳을 언급하면 어떻게 그곳에 가게 됐는지도 말해야 한다. 그럼 공략집의 이야기가 불가피해지고 일이 아주 복잡해진다.
대규는 그냥 한마디만 했다.
“그들은 저의 부하입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충성스러운 아군이니까요.”
“…알겠습니다.”
케이른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대규의 단호한 눈빛을 보니 더 이상 말해줄 것 같은 분위기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센텐티아와 상의를 해봐야겠어. 그 괴물들은 대장군님의 부하라니까 그렇다 쳐도 그 불길은 역시 수상하다. 그는 점쟁이니까 뭐라도 알겠지.’
대규 역시 현자의 돌과 앨릭서 제조 방법 때문에 센텐티아를 찾아야 했기에 그들은 함께 센텐티아의 움막으로 향했다.
마침 센텐티아는 움막 밖에서 명상하고 있었다.
그는 대규가 다가오자 흠칫하며 놀랐다.
“대, 대장군님 오셨습니까!”
한없이 공손한 태도지만, 대규는 몹시 불편했다. 그의 눈빛에는 아직도 두려운 기색이 역력했기 때문이다.
케이른이 먼저 그에게 말했다.
“이봐. 세계수 꼭대기에는 이상한 불길이 피어오르고 있었어. 몬스터는 몬스터인데 여태까지 봤던 녀석들과는 달랐다. 거인족도 아니었고. 그게 네가 말했던 불길한 기운인가?”
그러자 센텐티아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맞을 것이다. 지금은 일시적으로 불길한 기운이 물러났지만, 앞으론 더한 것들이 몰려올 것이야…….”
그 말에 케이른이 깜짝 놀라 물었다.
“더한 것들이 몰려오다니! 지금 그게 대체 무슨 소린가? 기간토마키아도 이제 최후의 결전만 남겨두고 있단 말일세.”
하지만 센텐티아는 심각한 목소리로 이렇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어마어마한 것들이 몰려오고 있어. 그것들이 판테온과 신들을 위협하러 온다. 더 이상은 아는 바가 없어서 나도 말해줄 수가 없군.”
“자네는 정작 중요한 건 얘기하지 못하는군. 에잉, 돌팔이 같으니!”
“돌팔이라니! 지금 말 다했나?”
센텐티아가 욱하며 소리쳤지만 케이른은 그를 무시하며 대규에게 말했다.
“저는 이자에게 볼일은 다 봤습니다. 저의 거처로 먼저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케이른은 움막 밖으로 나갔다.
센텐티아는 대규와 단둘이 남게 되자 더욱 두려운 표정을 했다. 대규는 그런 그에게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수액과 인어의 눈물을 가져왔습니다. 이거면 앨릭서 10개를 만들 양이죠. 그럼 현자의 돌과 앨릭서 제조 방법을 알려주시지요.”
“아, 알겠습니다.”
그는 움막 안쪽에 있는 방으로 향했고 대규 역시 그곳으로 따라 들어갔다.
그곳은 마치 중세시대 연금술사의 작업실을 연상케 하는 장소였다.
이런저런 물병과 물약이 주르륵 늘어서 있었고, 거대한 선반 위에는 괴상한 재료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센텐티아는 한가운데 놓인 테이블 쪽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이곳에 인어의 눈물과 세계수의 수액을 꺼내 내려놓아 주십시오.”
대규는 눈물 10개와 수액 500ml가 든 유리병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그는 구석에서 커다란 알코올램프를 가져왔다.
램프 위엔 작은 놋쇠 냄비가 올라가 있었다. 그는 램프에 불을 붙인 후 냄비 안에 수액을 쏟아붓고 인어의 눈물도 그 안에 넣어 녹이기 시작했다.
부글부글-
수액이 끓기 시작했고 수액의 색깔은 호박빛에서 선명한 분홍빛으로 변했다. 아주 아름다운 색깔이었다.
센텐티아는 얼마 후 램프의 불을 끈 뒤 주걱으로 분홍빛 액체를 저어가며 말했다.
“이제 이걸 저어준 뒤 굳히면 현자의 돌이 됩니다. 굳히는 데는 꽤 시간이 걸리지요. 하루면 충분하지만요.”
“그럼 현자의 돌에서 앨릭서는 어떻게 만드는 겁니까?”
그러자 센텐티아는 작업실의 구석에 있는 거대한 기계를 가리키며 말했다.
“현자의 돌을 저기 보이는 추출기에 넣어서 그 엑기스를 추출하면 영약 앨릭서가 됩니다. 현자의 돌 자체도 꽤 영험한 회복력을 지니고 있지만, 그것으로는 모자라기 때문에 저렇게 엑기스를 추출해 그 효과를 더욱 극대화하는 것이죠.”
“그렇군요.”
센텐티아는 살짝 굳은 액체를 동그란 틀에 부으며 말했다.
“앨릭서가 10개 필요하다고 하셨지요?”
“그렇습니다.”
“그럼 내일까지 만들어 놓겠습니다. 혹시 기간토마키아 최후의 결전에 대비해서 앨릭서를 만드시는 건가요?”
“…뭐, 그런 셈이죠.”
굳이 신의 육체를 얻는 시련에 도전한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자신을 이토록 두려워하고 있는데 그 시련에 대해 언급하면 더욱 불편해질 것 같았다.
“…조심하십시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앞으로 더한 것들이 몰려올 것입니다.”
대체 뭐가 몰려온다는 걸까.
계속해서 강조하니 대규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어쨌든 센텐티아는 내일까지 앨릭서 10개를 만들어 놓겠다고 대규에게 약속했다.
대규는 움막을 나와 케이른의 거처로 향했다.
이제 영약 준비도 완전히 끝났고 신의 육체를 얻는 시련에 도전하러 가면 된다.
‘뭔가 떨리는 걸……. 그런데 내가 정말 이 위치까지 오게 되다니.’
신의 육체를 얻는다는 건 그전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을 일이었다.
대규는 자신이 겪게 될 시련이 어떤 것일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어쩌면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신의 육체를 얻을 수 있는 시련이 만만할 리는 없을 테니까.
세미데우스가 되는 시련만 해도 도전해서 성공하는 자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도 안일하게 지금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지. 잘해 보자. 그리고 나에겐 공략집도 있으니까.’
대규는 다짐한 뒤 케이른의 거처로 돌아갔다.
다음 날, 영약 앨릭서가 완성됐다.
센텐티아는 대규에게 완성된 앨릭서 10개를 건넸다.
10개의 조그만 유리병에는 현자의 돌의 엑기스인 영약 앨릭서가 담겨 있었다.
그때 지영이 먹었던 것과 동일한 약이었다.
대규는 보관함을 불러내 앨릭서를 보관해 놓은 뒤 케이른에게 말했다.
“저는 이제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그럼 최후의 결전 때 보겠습니다.”
케이른에게 인사를 하고 켄타로우스의 숲을 빠져나왔다.
이제 시련에 도전할 차례였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하지?
‘시련에 도전하고 싶다고 생각하면 되나?’
시련에 도전하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자 바로 눈앞에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세미데우스 한계 레벨을 달성해 신의 육체를 얻는 시련에 도전하실 수 있습니다. 시련에 도전하시겠습니까? Yes/No]
Yes를 선택하기 전에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했다.
어제 그렇게 다짐했지만, 살짝 긴장되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Yes.
그러자 온 주변이 암흑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이곳은?’
대규가 눈을 뜬 곳은 익숙한 곳이었다.
바로 예전에 승전 기원 파티를 했던 판테온의 중앙 신전이었다.
신전엔 대규 말고 아무도 없었다. 그때 잔칫상이 차려졌던 테이블은 오간 데 없었다.
하지만 신들이 내려왔던 중앙 홀의 계단은 그대로 있었다.
대규는 계단 아래 홀로 서 있었다.
얼마 후 계단을 따라 거대한 그림자가 서서히 내려왔다. 그림자의 주인을 본 대규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바로 제우스 신이었다.
제우스 신은 번개를 들고 어깨엔 애완 독수리를 앉힌 채 천천히 계단을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그는 입가에 연신 흥미로운 미소를 띠며 대규에게 말했다.
“호오. 그대는 결국 이 시련에 도전하러 왔군. 하긴, 그대라면 올 줄 알았다. 고개를 들라.”
대규는 그 말을 듣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위엄에 찬 제우스 신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대규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최후의 결전 전에 도전하러 올 줄이야. 역시 그대는 우리 신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존재로군.”
제우스는 대규 앞으로 다가왔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황금빛에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지금이라도 포기하고 돌아가도 좋다. 시련에 실패하면 그대는 목숨을 잃고 망자가 되어 영원히 저승을 떠돌게 된다. 망자들의 모습은 그대도 본 적이 있겠지.”
하지만 대규는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도전하겠습니다.”
제우스는 그 대답을 듣고 껄껄 웃은 뒤 말했다.
“역시 패기 넘치는 영웅이로다! 그대의 뜻이 그러하다면 시련에 들도록 하라. 그대는 앞으로 총 두 개의 시련을 거치게 될 것이다. 그 두 개의 시련에서 신의 육체를 구성하는 재료를 모아 오면 된다. 물론 이 시련은 그대가 지닌 순수한 역량을 가늠해 보기 위한 것…….”
말꼬리를 흐리며 제우스 신은 허공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러자 대규가 입고 있는 황금 눈물 갑옷과 망토, 아테나 여신에게 받은 전술 장갑, 방패, 그리고 불카누스의 사슬검 등 모든 장비가 공중으로 떠올라 해제됐다.
“…그대는 오로지 순수하게 그대의 육체만을 이용해 이 시련을 통과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