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
188화. 세계수 탐사 (3)
대규는 서서히 부풀어 오르고 있는 크투가의 불길을 바라보았다.
심상치 않았다. 녀석은 공략 영상에서 봤던 대폭발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녀석의 보유 스킬 대폭발은 반경 100미터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릴 만큼 위력적이다.
대규와 케이른, 딥원 부대도 전멸이고 세계수 역시 복구 불가능한 수준으로 타 버릴 것이다.
대폭발은 크투가의 필살기였다.
무조건 상대방에게 치명타를 입히는, 100% 먹히는 공격. 이쪽이 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다 해도 완전히 막을 수 있는 공격이 아니었다.
대규 정도의 실력자라 해도 저 폭발을 정면으로 맞닥뜨리면 생명력이 뭉텅 깎일 것이다. 당연히 공략집의 영상을 보고 깨우친 것이다.
‘빌어먹을… 저걸 어떻게 막지.’
그때 공략집의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크투가의 대폭발은 내부의 불길을 200% 끌어 올려서 폭발시키는 스킬입니다. 판테온의 바닷물만이 오직 그 불길을 소화(消火)할 수 있습니다.>
대규의 눈동자가 커졌다.
이게 정말이라면 망설일 틈이 없다.
당장 헤르메스의 장화를 이용해 바닷가로 날아가 바닷물을 퍼 와야 한다.
공략 영상을 통해 알아본 결과, 녀석이 폭발하기 위해 준비하는 시간은 약 5분 정도였다. 그렇다면 5분 안에 판테온의 바닷가로 날아가 인피니투스 가방에 바닷물을 가득 채운다. 그리고 그곳에서 순간 이동을 해서 바로 이곳으로 날아와 녀석의 불길에 바닷물을 뿌리면 되지 않을까?
‘시간이 없다.’
대책이 나왔으면 빨리 몸을 움직여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크투가의 불길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우우웅-
심지어 불길 안에서는 심상치 않은 굉음도 퍼져 나오고 있었다.
대규는 케이른과 얀슬레이를 불렀고, 그들은 대규 앞에 와서 섰다. 케이른은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외계 어인 괴물 얀슬레이를 곁눈질로 힐끔힐끔 거렸다.
대규는 우선 케이른에게 먼저 말했다.
“녀석의 폭발과 불길을 막으려면 판테온의 바닷물이 필요합니다. 저는 바닷가로 날아가 바닷물을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바닷가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그러자 케이른은 놀란 표정으로 말한다.
“바다 말씀이십니까? 그건 우리 켄타로우스의 숲을 벗어나 북쪽으로 꼬박 하루는 달려야 나옵니다. 만약 대장군님께서 이곳을 비우신다면…….”
“걱정하지 마세요. 5분 안에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케이른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5분 안에 그 멀리 떨어져 있는 바닷가를 다녀온다고? 하지만 지금으로선 대규를 믿는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대규는 속으로 바닷가까지의 거리에 대해 생각해 봤다.
켄타로우스의 말발굽으로 하루 동안 달려야 나온다는 게 얼마나 긴 거리인지 감이 잘 안 잡혔다. 하지만 자신은 9일 밤낮으로 떨어져야 도달한다는 하데스의 저승도 빠르게 날아서 도달한 적이 있었다.
‘헤르메스의 장화로 최대한 빨리 날아가면 될지도 모른다.’
이제 대규는 얀슬레이에게 말했다.
“나는 바다에 잠깐 다녀올 테니 그동안 여기 케이른 영웅님과 함께 힘을 합쳐 저 녀석을 공격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얀슬레이는 고개를 숙이고 공손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연신 생선 눈알을 돌려 케이른을 흘끗 쳐다봤다. 그 역시 하체는 말이고 상체는 인간인 켄타로우스가 특이해 보인 것 같았다.
“그럼 저는 다녀오겠습니다.”
말을 마친 대규는 하늘 높이 날아 켄타로우스의 숲을 빠져나갔다.
하늘 위에서 바라본 켄타로우스의 숲은 몹시 광활했다. 꼭 브라질에 있다는 열대우림 같았다.
‘엄청나군.’
얼마 후, 숲이 끝나는 지점이 나왔고 대규는 북쪽을 향해 미친 듯이 날아갔다.
공략집의 지도창을 보니 생각했던 것만큼 그리 멀지는 않았다. 빠르게 날아가면 금방 도착할 것 같았다.
‘속도를 내 볼까.’
쒸이잉-
날아가는 속도를 높이자 공기의 흐름이 마치 강풍처럼 대규의 얼굴과 온몸을 강타했다.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을 정도였다. 얼굴의 피부는 폭풍을 맞은 것처럼 쓰라렸고 귓가엔 웅웅거리는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아마 공기를 뚫고 날아가는 소리일 것이다.
땅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면 초음속 제트기가 날아가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물론 제트기는 단단한 기체로 공기의 저항력을 막아 내지만, 대규의 신체는 그 정도로 단단하진 않다는 게 문제였다.
그래도 갑옷과 세미데우스의 육체 덕분에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이제 대폭발까지는 3분밖에 남지 않았다.
‘바닷가는 대체 언제 나오는 거야?’
걱정과 달리 얼마 후 바닷가가 보였다.
바다는 켄타로우스의 숲만큼 광활했고 해안은 몹시 넓었다. 바닷물은 사파이어처럼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대규는 재빨리 해안가로 착지했다. 그리고 인피니투스를 연 뒤 바닷물 속에 집어넣었다.
꿀렁꿀렁-
인피니투스가 바닷물을 거세게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꼭 가방 안쪽에 강력한 진공청소기라도 달아 놓은 것 같았다.
‘무한히 들어가는 가방이라지만 설마 이 바닷물을 전부 다 빨아들일 수 있는 건 아니겠지?’
대규는 솔직히 무한히 들어간다는 건 비유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대규의 착각이었다.
몇십 초가 지나지 않아 바다의 해수면이 서서히 낮아지고 있었다.
‘정말 바닷물을 다 삼켜 버리는 것 아니야?’
해안가 부분은 이제 썰물 때가 된 것처럼 바닷물들이 아예 사라져 버렸다.
바닷물이 사라진 자리엔 작은 물고기들과 조개껍데기들, 그리고 반짝이는 돌들이 곳곳에 드러나 있었다.
‘저 반짝이는 돌은 낯이 익은데…….’
반짝이는 돌을 집어 들자 아이템 설명창이 떠올랐다.
[인어의 눈물]
[인어들이 떨군 눈물방울이 굳어진 아이템. 현자의 돌과 영약 앨릭서를 만드는 데 재료로 쓰인다.]
인어의 눈물은 인어를 죽이지 않아도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이었군.
대규는 인어의 눈물을 재빨리 챙겼다. 개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어떻게 7개를 찾아내 총 10개를 채웠다. 이거라면 앨릭서 10병을 만들 수 있는 양이다.
그리고 물고기와 조개껍데기도 챙겼다. 어류를 좋아하는 딥원들의 식량으로 쓸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제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대규는 인피니투스 가방 입구를 닫고 어깨에 둘러멨다.
꿀렁~
가방에 든 바닷물이 물결치는 게 어깨로 전해져 왔다. 놀라운 것은 저렇게 많은 바닷물을 삼켰는데도 가방이 전혀 무거워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방은 아무것도 들지 않은 것처럼 가벼웠다.
대체 이 안에 얼마나 많은 바닷물이 담긴 것인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대규는 헤르메스의 장화를 이용해 세계수 나무 꼭대기로 순간 이동했다.
팟!
대규가 갑자기 나타나자 케이른과 딥원들은 매우 놀랐다.
그들은 대규가 바닷가에 갔다 온 사이 그의 명령대로 크투가를 공격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공격으로 크투가의 대폭발을 막기엔 무리였다.
이제 대폭발은 1분도 남지 않았다.
타탁, 타탁!
불꽃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대규는 녀석의 거대한 불길 위로 올라가 인피니투스를 열려고 했다.
하지만 가방이 열리지 않았다.
‘대체 왜 이러는 거야? 급해 죽겠는데!”
아무래도 바닷물이 가득 들어찬 덕분에 잘 열리지 않는 것 같았다. 이제 대폭발은 코앞으로 다가왔다.
크투가의 거대한 불길이 시뻘건 빛에서 금빛에 가까운 누런 광채를 내기 시작했다. 대폭발 전에 마지막 발광을 하는 것 같았다.
“좀 열리란 말이야!”
대규는 인피니투스의 입구를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그제야 작은 틈이 벌어지고 가방이 열렸다.
쏴아아아-
엄청난 양의 바닷물이 가방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바닷물은 크투가의 불길 위로 사정없이 쏟아졌다. 바닷물은 단번에 크투가의 불길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치지직-
“#%!##!”
불길이 사그라지는 소리가 들렸고, 크투가는 알 수 없는 비명을 질렀다.
딥원들은 바닷물에 휩쓸려 가면서 열심히 헤엄을 치고 있었다.
“갸르륵! 갸륵!”
한편 케이른 역시 바닷물에 휩쓸리면서 비명을 질렀다.
“으악!”
그는 수영할 줄 몰랐다. 어느새 그는 균형을 잃고 세계수 아래로 추락하고 있었다.
대규는 재빨리 날아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쏴아아-
가방 속에선 아직도 바닷물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물은 세계수의 몸통 안쪽으로 들어가 그것을 태우고 있는 불길마저도 적셔 버렸다.
나무껍질 안에서 용암처럼 타오르던 불길들은 곧 힘없이 꺼져 버렸다.
대규는 케이른을 안전한 곳에 내려준 뒤 아직도 용케 살아남아 있는 크투가의 불꽃 뿔을 향해 사슬검을 휘두르며 외쳤다.
“레툼 익투스!”
“$^$#@@!”
바닷물에 젖어 약해진 크투가가 최후의 비명을 질렀다.
대규의 사슬검에서 솟아 나온 악마의 화염이 녀석의 시뻘건 뿔을 화륵, 거리며 절단해 버렸다.
곧 녀석의 비명도 사그라졌고, 시뻘건 불길도 사라졌다.
[크투가를 해치웠습니다.]
[한계 레벨에 도달해 경험치를 획득할 수 없습니다.]
[마나를 1,500 흡수했습니다.]
레벨이 한계치에 도달해서 경험치를 더 이상 얻을 수 없는 것 같았다. 뭔가 아쉬운 느낌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는 거겠지.
그때 새로운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크투가가 소환의 반지 안에 저장됩니다.]
그 순간 크투가가 사라진 곳에서 하얀 빛 덩이가 튀어 오르더니 대규의 손가락에 끼워진 젤리 형태의 소환의 반지 속으로 빠르게 흡수됐다.
하얀 빛 덩이가 흡수되자 반지는 번쩍하고 빛났다. 물론 빛은 이내 사라졌다.
‘이 반지 속에 녀석이 저장된 건가?’
대규는 혹시 몰라서 소환의 반지를 발동해 봤다.
<반지에 저장된 몬스터를 소환하실 수 있습니다. 소환할 몬스터를 선택해 주십시오.>
<크투가>
원래는 하나도 없었는데 이제 크투가가 생겼다.
‘그럼 내가 저 녀석을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불러올 수 있단 말이야? 엄청나군!’
하지만 그보다 더 엄청난 사실은 인피니투스 가방 안에서 바닷물이 아직도 뿜어져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대체 얼마나 바닷물을 담아온 거야?
‘하긴, 해수면이 낮아질 정도였으니 적은 양은 아니겠지.’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꼭 대홍수가 났을 때의 풍경과 흡사했다. 물론 딥원들은 헤엄을 치기 좋아하는 어인 괴물이라 물 만난 물고기처럼 신나서 첨벙거리며 다시 인피니투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들이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 대규는 인피니투스를 잠갔다.
그러자 세계수를 적시고 있는 바닷물 위로 뭔가가 떠올랐다. 손바닥만 한 작은 불꽃이었는데 허공에 떠 있어서 꼭 도깨비불같이 보였다.
불꽃을 바라보자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흡혈의 화염]
[모든 걸 불태우면서 태운 존재의 생명력을 흡수한다. 많은 존재를 태우면 태울수록 많은 생명력을 흡수할 수 있다.]
살로메의 보석과 비슷한, 생명력을 흡수할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하지만 살로메의 보석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살로메의 보석의 경우 그것을 장착한 무기로 상대방을 공격할 시에만 생명력을 흡수할 수 있어서 한 번에 한 명에게서만 생명력을 흡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화염은 달랐다.
불길은 본래 태울 게 있으면 자꾸만 번져 나간다. 거대해진 불길은 수십 명, 아니 수백 명까지 단번에 태워 버릴 수도 있다.
불이 한 곳에 붙기 시작하면 다른 곳으로 옮겨 가는 건 한순간이기 때문이다.
이런 특수한 화염뿐만이 아니라 현실 세계의 일반적인 불 역시 빠르게 번져 나간다.
심지어 거센 불길은 강을 건너(!) 상수도 시설을 파괴하기도 한다.
옛날에 미국의 시카고에서 일어났다는 화재는 시카고 시의 건물 3분의 1을 다 태우고 300명의 생명을 앗아간 뒤 사그라졌다.
불길에서 떨어져 나온 불덩이들은 강 위를 둥둥 떠다니며 건너편의 건물에도 옮겨붙기까지 했다.
‘그 정도로 불길의 위력은 어마어마하다. 크투가의 불길만 해도 이 거대한 세계수를 태워 먹고 수액까지 말라비틀어지게 할 정도였으니까.’
이 흡혈의 화염이란 건 상대를 태우는 데 만족하지 않고 그들의 생명력까지 앗아 오는 불길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악마의 화염이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