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
187화. 세계수 탐사 (2)
사실 이 불꽃은 본래 이곳 판테온에 속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것은 몇천 년 동안 거인들의 지옥인 카르케르의 캄캄한 어둠 속에 갇혀 홀로 외롭게 불길을 태우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엄청난 힘으로 그를 카르케르에서 꺼내 이곳 판테온의 세계수 꼭대기에 소환했다.
불꽃은 이곳이 어디인지도 몰랐고, 자신이 왜 이곳에 있게 됐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아무것도 태울 게 없었던 카르케르와 달리 이곳엔 태울 것이 넘쳐 났다. 불꽃은 사물을 태우면 태울수록 힘을 얻고 희열을 느꼈다.
자신을 이곳에 소환한 게 누군지 모르겠지만, 불꽃은 그에게 고마운 마음뿐이었다.
“@#%@!!”
불꽃이 기쁨에 찬 목소리로 웃을 때마다 세계수의 나뭇가지들은 시커먼 재가 되어 허공에 흩날렸다.
그때 불꽃이 웃음소리를 멈췄다.
무언가가 저 밑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그래도 불꽃은 기분이 좋았다. 새롭게 태워 버릴 제물이 제 발로 걸어온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이제 이 거대한 나무도 거의 다 태워 가는 참이라 마침 잘됐다고 생각했다.
화르륵-
악마의 형상을 한 불꽃의 입가가 묘하게 일그러졌다.
대규가 나무 위로 올라갈수록 열기는 더욱 거세졌다.
갑옷의 비늘이 몸을 보호해 줬지만, 후끈한 느낌은 여과 없이 전해져 왔다.
‘이제 거의 다 왔는데.’
타탁- 타타탁-
대규의 귓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꼭 나무나 장작이 불에 타는 소리였다.
위를 올려다본 대규는 깜짝 놀랐다.
시야가 흔들거리며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서 시뻘건 불꽃이 보였다.
‘뭐야, 몬스터가 아니라 불꽃이었어? 그러고 보니…….’
대규는 자신이 밟고 있는 나무의 커다란 가지를 내려다보았다.
까맣게 말라비틀어진 나무껍질 틈으로 빨간 불길이 용암이 흐르듯 안쪽에서 타올랐다.
아무래도 이 불꽃이 세계수와 그 수액을 말라비틀어지게 만든 장본인인 것 같았다.
‘케이른과 켄타로우스들에게 알려 줘야 하지 않을까?’
몬스터가 아니라면 그들에게 알려 줘서 저 불을 진압하게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그런데 정말 불이 맞는 걸까?’
고작 불길이 이 거대한 세계수 나무를 말라비틀어지게 하였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어쩌면 마법이 담긴 불꽃일지도 모르지. 빨리 케이른에게 말해 주러 가자.’
대규가 몸을 돌려 나무 아래쪽으로 다시 내려가려던 찰나,
화르르륵-!
저 위쪽에서 타오르던 불길이 나무의 몸통을 타고 대규를 향해 빠르게 내려왔다.
‘뭐야?!’
장화를 이용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불길에 휩싸일 뻔했다.
불꽃이 저토록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걸 보아 일반적인 불꽃은 아닌 것 같았다.
‘저걸 조종하는 녀석이라도 있는 건가?’
대규는 불꽃의 근원지를 향해 날아갔다.
근원지의 불꽃은 이상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바로 양 뿔이 머리에 돋아난 악마의 형상이었다.
‘몬스터였나!’
그때 공략집이 떠올랐다.
-차원의 틈 공략집-
몬스터 이름: 크투가(Cthugha)
보상: 흡혈의 화염
특징: 거인의 지옥 카르케르 14층에 갇혀있던 외계 종족. 불꽃의 형체를 하고 있으며 모든 존재를 태우면서 점점 더 강력해진다. 모종의 이유로 세계수에 소환돼 세계수를 태우는 데 열중하고 있다.
보유 스킬-대폭발: 무시무시한 초대형 화염 폭발. 반경 100미터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린다. 마나 소모 200.
<크투가에 대한 공략(하급)을 습득했습니다.>
<크투가에 대한 당신의 공격력이 10% 상승합니다.>
<크투가로부터 아이템을 습득할 확률이 조금 높아집니다.>
<크투가의 약점을 영상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영상을 재생하시겠습니까? Yes/No>
카르케르에 갇혀 있는 외계 종족이 왜 이곳 판테온의 세계수 꼭대기에 있는 걸까.
대규는 공략집의 설명 중 한 부분을 유심히 살펴봤다.
‘모종의 이유로 이곳 세계수에 소환됐다고? 그럼 소환한 자가 따로 있단 말인가?’
이 외계인 녀석들을 그곳에서 꺼내 올 수 있는 건 녀석들을 그곳에 가둔 거인족뿐이라고 알고 있었다.
물론 대규가 꺼내 온 딥원들은 그 경우가 좀 특수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 판테온의 세계는 거인족이 들어올 수 없는 공간일 텐데…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궁금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불꽃은 다시 대규를 공격해 오고 있었다.
화르륵-
하지만 불꽃이라면 이쪽도 지지 않는다.
대규는 허리춤에서 불카누스의 사슬검을 꺼냈다. 사슬 검날 끝에서 새까만 악마의 화염이 맹렬하게 타올랐다.
자신을 향해 마수를 뻗치는 불꽃을 향해 사슬 검날을 휘둘렀다.
“받아라!”
화륵!
악마의 화염이 크투가의 불꽃을 향해 날아갔다.
시뻘건 불꽃과 새까만 불꽃이 맞부딪히면서 엄청난 열기를 생성해 냈다.
펑!
불꽃이 맞닿은 부분의 공기가 일렁이더니 곧 거대한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귀청이 떨어질 정도였다.
악마의 화염은 크투가의 불꽃과 호각을 다퉜지만, 아쉽게도 그보다 더 위력이 강하거나 하진 않았다.
‘공략 영상을 빨리 봐야겠어.’
분신을 불러내서 녀석의 불꽃과 싸우게 만들어 시간을 벌고 그 틈을 타 자신은 공략 영상을 보기로 했다.
대규는 황금 눈물 갑옷을 이용해 분신을 만들었다.
스르륵-
바로 분신이 생겨났다. 분신은 사슬검을 들고 시뻘건 불길 속으로 일말의 망설임 없이 달려들었다.
불길이 분신의 몸을 사정없이 휘감았다. 분신은 몸 이곳저곳에 불이 붙었지만, 열심히 검을 휘둘렀다.
대규는 그사이 공략 영상을 재생시켰다.
크투가는 자신이 지닌 불꽃과 불길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몬스터였다. 기본적인 형체는 뿔 달린 악마의 형체지만 필요에 따라서 몸의 형상도 자유롭게 바꿀 수 있었다.
녀석의 약점은 저 머리에 돋아난 두 뿔 모양의 불꽃.
그곳을 공격하면 녀석은 쓰러진다.
하지만 큰 문제점이 있었다.
바로 공략집에 떠오른 메시지창이었다.
<크투가는 현재 세계수의 90% 이상을 태워 버렸습니다.>
<세계수는 생명력이 샘솟는 존재라 그 조직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재생하지만, 완전히 타 버리면 재생하지 못하고 죽어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세계수의 수액을 얻을 수 없게 된다.
‘녀석이 세계수를 완전히 태워 버리기 전에 해치워야 한다는 건가.’
시간이 얼마 없었다.
그때 공략집이 가동되면서 가장 효율적인 전략을 알려 주기 시작했다.
<불 속성의 몬스터인 크투가는 물 속성의 존재 혹은 공격에 약합니다. 물 속성이 강한 딥원 부대와 함께 싸우면 유리합니다.>
대규는 인피니투스를 꺼내 열고 딥원 부대를 불러냈다.
녀석들은 가방 밖으로 착착 나와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명령을 내렸다.
“당장 저 녀석을 해치워야 한다! 전투에 임하도록!”
딥원들은 신속하게 전투태세를 취했다.
그전보다 더욱 몸가짐들이 민첩해진 것 같았다. 그리고 눈빛도 더욱 비장해졌다.
‘딱히 그전에 비해 녀석들의 능력이 향상된 건 아닌 것 같은데.’
아무래도 식량을 제공받아 대규에 대한 충성도가 올라간 덕분인 것 같았다.
‘역시 부하들의 충성을 얻는 게 중요하구나.’
그런데 크투가를 본 녀석들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특히 딥원의 대장 얀슬레이는 날카로운 이빨을 갈면서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그는 대규를 바라보며 예의 아름다운 중저음의 목소리로 말했다.
“저 녀석과 전투를 하게 해 주셔서 정말 영광입니다, 주인님.”
“저 녀석을 알고 있어?”
“알다마다요. 저 녀석은 우리 종족의 적입니다. 우리가 거인들의 지하 감옥에 갇히기 전, 우리가 사는 서식지의 바닷물을 바싹 말라 버리게 하였던 추악한 놈들이지요.”
나머지 딥원들도 이를 부드득 갈고 있었다.
대규는 얀슬레이에게 물었다.
“감옥에 갇히기 전에 살고 있던 서식지라고? 얀슬레이, 너희도 그렇고, 저 녀석도 그렇고… 카르케르에 갇힌 종족들은 대체 어디서 온 거야?”
얀슬레이가 대답하기도 전에 크투가의 불길이 그들을 향해 덮쳐 왔다. 어느새 불길은 대규가 만든 분신을 다 태워 버린 것 같았다.
얀슬레이는 물갈퀴가 달린 발을 들어 불길을 막으며 외쳤다.
“나중에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얘들아, 가자!”
얀슬레이의 명령을 들은 딥원 부대는 일제히 크투가를 향해 달려들며 주둥이를 크게 벌렸다.
쏴아아-
딥원들의 주둥이 안에서 거센 물줄기가 튀어나왔다.
“#%^#@!”
물줄기에 맞은 크투가의 불길이 일렁이면서 이상한 비명이 튀어나왔다. 여태껏 외계인 종족 보스 몬스터를 상대할 때마다 지겹도록 들었던 그 이상한 전자기파 소리였다.
‘저놈의 소리는 아무리 들어도 적응이 잘 안 된단 말이야.’
대규는 귀를 막은 채 크투가 근처로 다가갔다.
딥원들의 물줄기 공격 덕분에 불길의 열기가 좀 식어서 다가가기 수월해졌다.
눈앞에 녀석의 약점인 두 뿔이 보였다.
물론 진짜 뿔은 아니고 불꽃으로 만들어진 뿔이었지만 말이다.
딥원들의 공격으로 불의 위력이 약해진 지금이 녀석을 해치울 절호의 기회였다.
“레툼 익투스!”
대규는 뿔을 향해 사슬검을 휘둘렀다.
번쩍! 화르륵-
검은 악마의 화염이 크투가를 둘러싸며 맹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크투가는 다시 한 번 이상한 비명을 내질렀다.
“#%$^#@!”
하지만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악마의 화염이 녀석의 몸을 둘러싼 채 타올랐지만, 녀석은 죽지 않고 용케 버티고 있었다.
그때 저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뇌염룡!”
어느새 세계수의 꼭대기까지 올라온 케이른이 자신의 창을 휘두르고 있었다.
우르릉- 쾅!
하늘이 어둑어둑해지고 곧 푸른 벼락이 치며 번개로 만들어진 뇌염룡이 소환됐다.
소환된 뇌염룡은 기괴한 소리를 내며 크투가의 불길을 향해 달려들었다.
“지금이다!”
대규가 딥원들에게 외치자 딥원들은 다시 일제히 입을 벌려 물줄기를 쏘기 시작했다.
그 틈을 타 대규는 크투가를 향해 일격 필살을 날렸다.
화르륵-
서걱!
뿔 모양의 불꽃이 예리하게 잘려 나갔다.
한편, 세계수 꼭대기까지 올라온 케이른은 눈앞에 보이는 두 광경을 보고 넋을 잃었다.
하나는 세계수 꼭대기를 완전히 점령해 버린 거대한 불길이었다.
‘저 불길이 세계수를 말라비틀어지게 한 원흉이란 말인가?’
놀라울 따름이었다. 불길은 분명 거대했지만, 세계수 나무는 그보다 몇십 배는 더 거대했다.
아무래도 정상적인 불길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뒤에 다른 광경을 보고 그는 다시 한 번 놀랐다.
‘대체 저것들은 뭐야?’
대규가 가방을 열자 괴상하게 생긴 괴물 부대가 튀어나온 것이다.
그것들은 물고기에 개구리 인간 형상을 한 괴물들이었다. 케이른은 판테온에서 몇백 년 동안 살았지만, 저런 생물들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케이른은 단언컨대 저것들이 정상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확신했다.
‘심지어 거인 녀석들과도 전혀 다른 종족이다!’
솔직히 말하면 최근의 포르피리온 전투에서 싸웠던 그 끔찍한 촉수 괴물을 봤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건, 대장군인 대규가 저 이상한 괴물들을 부하처럼 능숙하게 다루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어쨌든 그 괴물들은 대규를 도와 세계수를 태우고 있는 저 불길을 공격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일단 저 괴물들에 대해선 나중에 대장군께 물어보도록 하자.’
케이른은 재빨리 창을 꺼내 휘둘러 뇌염룡을 소환했다.
어느새 뿔이 잘려 나간 크투가는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여기서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었다.
아직 불태울 것이 많이 남아 있었다. 이렇게 이곳에서 허무하게 죽으려고 그 어두컴컴한 지하 감옥을 빠져나온 건 아니었다.
위기를 감지한 크투가의 불길이 점점 거대해졌다.
‘이 거대한 나무를 완전하게 태워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고 눈앞에 있는 저 녀석들도 다 태워 버릴 것이다.’
녀석들이 불길에 휩싸여 고통스러워할 모습을 상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희열이 불길 안에서 서서히 차올랐다.
그는 대폭발을 준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