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6
176화 세 번째 징표
“그게 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대규가 묻자 헤르메스가 대답했다.
“아스클레피오스의 뒤끝은 오래가는 편이지. 게다가 그는 의술의 신… 우리 판테온의 신들은 그를 감히 거역하지 못한다.”
“예?”
“나를 비롯한 다른 신들은 누군가의 목숨을 끊을 수는 있지만 되살릴 수는 없다. 심지어 그건 신들의 왕 제우스께서도 할 수 없다. 하지만 아스클레피오스는 다르지. 그는 의술을 이용해 죽은 생명도 되살리는 것이 가능하다. 게다가…….”
헤르메스는 묘한 눈빛으로 대규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의술의 신이라, 상대방을 단칼에 죽이는 것뿐만 아니라 아주 천천히 고통을 주면서 괴롭히는 것도 잘하는 신이다. 좀 음침하고 기분 나쁜 녀석이긴 하지만 실력 하나는 끝내주지.”
점점 들을수록 심각했다.
“아마 그의 부탁을 들어주는 게 좋을 거다. 그대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그가 준 알약이 없었다면 그대는 이렇게까지 쉽게 전투를 끝마칠 수 없었을 거라는 걸 말이다.”
헤르메스는 말을 마친 뒤 이동의 결계를 열 준비를 했다.
헤르메스의 말이 맞다.
아스클레피오스가 준 영약과 알약의 시너지 효과로 업그레이드된 스킬 덕택에 대규는 히폴리토스를 훨씬 쉽게 물리칠 수 있었다.
덩달아 영웅들의 희생도 줄일 수 있었다.
아무래도 아스클레피오스의 부탁을 들어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하지만 말이 쉽지. 내 몸을 해부하겠다고 했잖아.’
역시 쉽사리 결정하기 힘든 부탁이었다.
헤르메스는 팔을 들며 결계를 형성한 뒤 영웅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그럼 이제 모두 주둔지로 돌아가 승리의 연회를 열도록 하자!”
“우와아아!”
헤르메스의 말에 다른 영웅들은 함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하지만 대규는 찜찜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거 정말로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내 몸을 해부하고 들여다보게 해야 하나.’
곧 이동 결계가 생겨나 영웅들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헤르메스 신과 영웅들은 주둔지에 도착했다.
그의 아들들인 실레노스와 판이 그들을 맞이했다.
“아버지, 오셨습니까?”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아버지에게 승리의 축하 인사말을 건네던 그들은 지영과 대규의 모습을 보더니 흠칫 놀라서 뒷걸음질 쳤다. 아무래도 이제 단단히 겁을 집어먹은 모양이었다.
실레노스는 대규와 지영의 눈치를 보며 헤르메스에게 말했다.
“승리의 전갈을 받자마자 제우스 신께서 이곳에 오셨습니다.”
“뭐라고?”
헤르메스는 놀란 표정으로 지휘사령부 천막 안을 향해 달려갔다.
지휘사령부의 천막 안에 놓인 황금 왕좌에는 제우스가 앉아 있었다.
“제우스시여……!”
헤르메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고개를 숙여 신들의 왕에게 예를 표했다.
다른 인간 영웅들은 놀라서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사실 지영과 대규, 그리고 몇몇 뛰어난 영웅이 아닌 자들은 제우스를 제대로 만난 적이 없었다. 사실 평범한 인간 영웅이 제우스를 맞닥뜨릴 일은 거의 없었다.
인간 영웅들은 몸을 부르르 떨며 고개를 깊게 숙였다.
세미데우스도 아닌 한낱 인간의 육체로는 제우스 신의 위엄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기 힘든 법이다.
‘나도 처음엔 그랬지.’
대규는 몸을 떠는 인간 영웅들을 보며 맨 처음 제우스 신을 봤을 때를 떠올렸다.
헤르메스의 왕좌에 앉은 제우스 신은 미소를 지으며 우렁차게 말했다.
“고개를 들라! 그대들의 전투는 아주 잘 봤다. 거인 히폴리토스 녀석이 비열하게도 외계 종족과 융화까지 해서 쳐들어올 줄은 나도 몰랐다.”
그러자 헤르메스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닙니다. 송구스럽습니다. 제가 대비를 제대로 해 가지 못했습니다.”
“아니다. 그대들은 승리하지 않았는가. 이걸로 이제 기간테스 미마스만 해치우면 이 전쟁은 우리 판테온의 승리다!”
제우스의 입에서 승리, 라는 단어가 나오자 모든 영웅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한 번의 전투만 더 버티면 이 전쟁도 끝인 것이다. 더 이상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 목숨을 걸고 싸울 필요도 없다.
운이 좋으면 자신이 속한 부대가 전투를 치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여태까지 기간테스와 벌였던 전투들을 보면 한 부대와 그 부대를 통솔하는 신 한 명이 도맡아서 해왔기 때문이다.
이번 전투만 해도 헤르메스와 그가 통솔하는 인간 영웅 부대만이 전투에 참여했다.
하지만 밝아졌던 영웅들의 표정은 제우스의 다음과 같은 말에 급격히 어두워졌다.
“앞으로 벌어질 기간토마키아 최후의 전투에서는 모든 부대와 영웅들이 힘을 합쳐서 싸우게 될 것이다. 물론 미마스 녀석도 최후의 전투이니 온갖 전력을 끌어모아 올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이고 말이다.”
마지막이라지만 또 한 번 목숨을 걸고 전투를 해야 한다니.
제우스는 살짝 의기소침해진 영웅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뭐,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나는 그대들의 전투를 아주 잘 보았다. 필멸자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그대들은 아주 잘 싸워줬다. 그래서 나는 그대들에게 보상을 내리려고 이렇게 주둔지에 찾아온 것이다.”
제우스는 웃으며 인간 영웅들에게 말을 이었다.
“히폴리토스를 최종적으로 해치운 건 이쪽에 있는 아테나 부대 소속 김대규 대장군이지만… 나머지 영웅들도 녀석을 쓰러뜨리기 위해 노력했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다. 따라서 그대들 모두 각자 경험치를 배분받았을 것이다.”
영웅들은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나 혼자 경험치를 다 가져간 것이 아니었구나.’
그런데도 레벨이 5단계나 오르다니. 대체 히폴리토스는 얼마나 강한 녀석이었던 걸까?
제우스는 다른 영웅들을 보며 말했다.
“그대들에겐 특별히 블랙 등급 젬스톤이 인당 5개씩 주어지고 전설 등급의 선물 상자도 배분될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몇몇 인간 영웅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럴 법도 한 게 그들의 레벨 수준에선 블랙 등급 젬스톤을 구경하는 건 하늘의 별 따기만큼 희귀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대규도 그들의 레벨 수준이었을 땐 고작 레드 등급 젬스톤을 모으느라 혈안이 돼 있었다.
“가, 감사합니다!”
어떤 영웅들은 감격에 겨워서 눈물까지 줄줄 흘리고 있었다.
대규가 중국에서 만났던 영웅 라이펑은 차분한 태도로 보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규는 그런 그의 모습을 주시했다.
아직 인간 영웅이었지만 라이펑의 전투 실력은 꽤 주목할 만했다.
망자들이 달려들자 당황하며 우왕좌왕했던 다른 영웅들과 달리 그는 침착하게 싸워 나갔다.
‘아마 저 사람이라면 나중에 크게 될지도 몰라.’
대규는 중국에서 도와준 일 말고도 이번 전투를 통해 그에 대한 신뢰를 굳히기로 했다.
제우스는 이제 대규와 헤르메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이제 중요한 공을 세운 자들에게 보상을 내려야겠지. 우선 헤르메스!”
“예, 제우스 님.”
“이건 그대에게 내리는 보상이다.”
제우스가 말을 마치자마자 백색 상자가 허공에 생겨났다. 아테나와 아프로디테 여신이 받았던, 판테온의 신들만 받을 수 있는 보상이었다.
혹시나 싶어 내용물이 궁금해 공략집을 작동해 보았지만, 다음과 같은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본 아이템은 신의 육체를 얻은 자만이 확인할 수 있는 아이템입니다. 본 아이템에 대한 설명을 열람하려면 우선 신의 육체를 얻어야 합니다.>
이건 공략집을 업데이트한다고 해서 볼 수 있는 정보가 아닌 것 같았다.
헤르메스는 다른 신들처럼 자신의 부하 영웅에게 상자를 가져가라고 명령했다.
제우스는 이제 대규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이제 가장 중요한 보상을 내려야겠군.”
대규는 흥분 어린 눈동자로 제우스를 바라보았다.
드디어 그가 그토록 바라던 마지막 세 번째 징표를 얻게 된 것이다.
헤르메스는 분명 출전하기 전 이렇게 말했었다.
‘심지어 제우스 님은 이런 약속을 하셨지. 히폴리토스를 최종적으로 쓰러뜨리는 영웅에겐 자신의 징표를 특별히 하사하시겠다고.’
두 번째 징표를 얻은 지 얼마 안 돼서 세 번째 징표를 얻게 되다니, 정말 운이 좋았다.
제우스가 대규에게 말했다.
“이렇게 빨리 징표들을 모으다니. 밸런스에 맞지 않는 것 같긴 하다만,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니 줘야겠지.”
그가 손을 휘두르자 허공에 운명의 실, 바늘, 천이 생겨났다.
제우스는 대규의 이름이 적힌 천에 마지막 징표를 수놓기 시작했다.
세 번째 황금 벼락 징표가 천에 완전히 수놓아지자 천이 강렬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번쩌억-!
그리고 눈앞에 새로운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제우스 신이 하사하는 징표 세 개를 모두 모았습니다.]
[징표를 모두 모아 신의 육체를 얻을 수 있는 시련에 도전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드디어……!’
대규는 감격 어린 눈으로 메시지창의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하지만 맨 마지막에 적힌 내용은 아주 거슬렸다.
[하지만 당신은 아직 세미데우스의 한계 레벨을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먼저 세미데우스의 한계 레벨을 달성해야 시련에 도전할 기회가 주어집니다.]
아스클레피오스의 말을 사실이었다.
내심 사실이 아니길 빌었는데 말이다.
대규는 표정이 살짝 굳어진 채 제우스에게 물었다.
“신이시여, 시련에 도전하는데 대체 왜 한계 레벨이란 게 존재하는 겁니까? 저는 시련에 도전할 수 있도록 세 개의 징표를 모았는데 말입니다.”
대규의 당돌한 모습을 본 제우스는 껄껄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역시 그대의 당찬 태도는 여전하구나. 한계 레벨이 존재하는 까닭은, 말하자면 밸런스 붕괴를 막기 위함이다.”
‘밸런스 붕괴?’
게임에서나 듣던 말을 이곳에서 듣게 되니 뭔가 생소했다.
제우스는 말을 이었다.
“보통의 경우 한계 레벨에 도달할 때쯤이면 징표 세 개를 모으는 게 정상이다. 아니면 그에 도달했지만, 징표를 다 못 모으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대는 그대의 실력에 비해 너무나도 빨리 징표를 모았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뭐, 단순히 운이 좋았다고 일단은 설명해 두지.”
호탕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지만, 제우스의 눈빛은 아주 의심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운이 좋다 해도 지금 그대의 실력으론 신의 육체를 얻기 위한 시련을 이겨 낼 수 없다. 그러니 한계 레벨을 채우고 도전하도록 하라. 그것이 판테온의 법도다.”
그 말을 들은 대규는 살짝 욱하는 마음이 들어 이렇게 반발했다.
“신께서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왜 현재의 제가 이겨 낼 수 없다고 확신하시는 겁니까?”
그러자 제우스는 웃음을 거두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는 순수하게 자신의 힘으로 기간테스를 이긴 적도 없지 않느냐.”
“예?”
제우스는 엄한 목소리로 꾸짖듯이 말했다.
“나는 그대의 전투를 처음부터 다 지켜봤다. 맨 처음 그대가 상대했던 기가스 팔라스는 상대적으로 약한 기간테스였다. 하지만 그 역시 그대가 아니라 그대가 불러낸 마신의 괴물 뱀이 나타나 처리했다. 그리고 저번 전투에서 토온을 상대할 땐 저기 있는 너의 부대 여자 영웅이 전쟁의 축복을 걸어 줘서 겨우 이길 수 있었지.”
“하지만…….”
“그리고 이번엔 아스클레피오스의 영약과 알약을 복용한 덕분에 히폴리토스를 이길 수 있었다. 그 전에 다른 기간테스들은 그대 혼자 이긴 게 아니라 다른 영웅들과 힘을 합쳐서 이긴 거였고.”
할 말이 없었지만, 대규는 이렇게 물었다.
“아이템도 실력 아닙니까?”
그러자 제우스는 차갑게 대답했다.
“미안하지만, 신의 육체를 얻는 시련에선 그런 아이템이나 운 따윈 통하지 않는다. 순수하게 그대가 지닌 육체 그 자체만으로 이겨 내야 하는 시련이다.”
“…….”
“적어도 그대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기간테스를 이길 정도는 되어야 시련에 도전할 실력이 된단 말이다. 그대가 지금 그 정도의 실력이란 말이냐?”
할 말이 없었다.
대규는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괜히 자만심을 부려 신에게 도전했다가 한 방 먹은 기분이었다.
‘내가 너무 들떠 있었어.’
그 모습을 본 제우스는 다시 온화한 목소리를 하며 말했다.
“그러니 한계 레벨을 채워 도전하면 된다. 그리고 이건 그대가 히폴리토스를 쓰러뜨리고 얻어낸 보상이다.”
골드 등급 젬스톤 4개가 대규의 손 위에 떨어졌다. 본래는 2개를 받아야 하지만 미다스의 손 효과 때문에 두 배로 얻었다.
그리고 대규 눈앞에 떠오른 보상은…….
“이, 이건!”
헤르메스와 다른 신들이 받았던 상자와 동일하게 생긴 백색의 상자였다.
‘이것이 대체 왜, 나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