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
174화 히폴리토스 (2)
‘어떻게 해야 할까? 분신을 만들어서 광역 스킬을 써 볼까?’
분신은 물론 본체 능력의 50%밖에 힘을 내지 못한다. 하지만 지금 자신은 영약을 복용한 상태니까 아무리 분신이라도 힘없이 쓰러지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망자들의 수는 엄청나다.
광역 스킬이라 해도 공격 범위는 반경 5m가 한계. 이 망자들을 모두 해치우려면 광역 스킬을 몇 번은 써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 혼자 싸우는 게 아니지.’
영웅들이 고전하고 있다지만 지영과 다른 세미데우스 영웅들은 아직까지 잘 싸워주고 있다.
‘차라리 이럴 거면 라의 목걸이로 파라오의 저주를 써서 망자 녀석들의 능력을 전체적으로 50% 다운시키는 게 전체적으로 봤을 때 이득 아닐까?’
‘차라리 아포피스를 소환해서 단번에 망자들을 없애 버리는 건? 아니지. 단번에 못 없앨 수도 있다.’
골치가 아팠다.
하지만 빨리 결정해야 한다.
그때 눈앞에 이상한 창이 떠올랐다.
공략집의 메시지창이었다. 하지만 처음 보는 내용이었다.
<공략집이 적들의 전력과 사용자의 능력을 고려해 사용자가 행할 수 있는 전략들을 분석합니다.>
<분석 후 가장 효율이 높은 전략을 제공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전략 분석과 제공? 이젠 어떻게 싸우는 게 좋을 것인지 그 방법까지 알려 주는 건가.’
‘이게 업데이트된 내용이구나.’
거의 히어로 영화에서 보던 인공지능 수준이었다.
그런데 저 멀리 커다란 망자 녀석 한 마리가 대규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대규는 재빨리 악마의 화염으로 녀석을 불태워 버렸다.
그때 공략집의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가장 적합한 전략을 제공합니다.>
<기간테스 히폴리토스를 바라보며 아스클레피오스의 알약을 복용하십시오.>
아스클레피오스가 준 알약은 몸집이 크기를 변화시키는 알약이었다. 그것도 싸우는 상대방과 동일한 크기로 만들어 준다.
히폴리토스를 바라보며 알약을 복용하라는 것은 녀석만큼 몸집이 커질 수 있다는 것이다.
‘몸이 커지면 더 유리해지긴 하겠지.’
망자들은 영웅들을 맹렬히 공격하고 있었다. 이상한 울음소리를 내며 영웅들을 집어삼켰다.
“으윽!”
영웅들 몇몇은 구덩이 안으로 추락했다.
지영과 실력자 영웅들 몇몇은 호각으로 잘 싸우고 있었지만, 나머지 영웅들은 그렇지 않았다.
망설일 시간이 없다.
대규는 헤르메스와 싸우고 있는 히폴리토스를 바라봤다.
녀석의 몸에선 촉수들이 끊임없이 뿜어져 나왔고 그들의 무기가 맞부딪힐 때마다 대규가 발을 딛고 서 있는 평원의 땅은 크게 진동했다.
녀석의 촉수 한 개의 크기는 인간 영웅들보다 몇 배는 컸다.
대규는 아스클레피오스의 알약을 꺼내 복용했다.
알약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며 씁쓸한 맛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아스클레피오스의 알약 효과가 발동돼 신체 크기가 변화합니다.]
한편 지영은 망자들을 상대로 열심히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유디트의 보석이 박힌 쌍검을 휘두르며 스킬을 발휘했다. 검에서 푸른빛이 나며 망자들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 새로운 망자들이 꾸역꾸역 나타났다.
녀석들은 베어도 베어도 끝이 없는 것 같았다.
스극-
그녀의 검이 망자들의 몸을 꿰뚫자 쌍검에 박혀 있는 파란색의 보석이 빛나기 시작했다.
보석은 망자들로부터 마력을 흡수했다.
세미데우스가 돼 자가치유능력이 생겼지만, 이 검으로 마력을 이중으로 흡수하니 더욱 편리했다.
‘그래도 힘든 전투야.’
다른 영웅들 역시 몹시 고전하고 있었다. 벌써 구덩이로 떨어져 죽은 영웅들이 대여섯 명이 넘었다.
‘마력을 빨리 회복시켜서 전쟁의 축복 스킬을 아군 영웅들에게 걸어줘야겠어.’
그때 저쪽에서 엄청난 빛이 번쩍였다.
번쩌억!
‘뭐야?’
저도 모르게 두 눈을 팔로 가렸다.
얼마 후 그녀는 눈을 찌푸린 채 천천히 빛이 나온 곳을 바라보았다.
‘저건… 대규 씨?’
대규의 몸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지영은 저도 모르게 상대하던 망자들을 내팽개치고 그를 향해 달려갔다.
타타탓.
대규의 몸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지영은 고개를 들어 올려 그를 쳐다봐야 했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대규는 이제 헤르메스 신만큼이나 몸집이 거대해지고 있었다.
대규 역시 자신의 커진 몸을 보고 깜짝 놀랐다.
순식간에 평원에 서 있는 영웅들이 개미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정말로 자신의 몸집은 헤르메스와 히폴리토스만큼 커졌다.
그 모습을 본 헤르메스 역시 놀라서 대규에게 외쳤다.
“이봐,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네가 어떻게…….”
“아스클레피오스 님이 준 알약을 먹었습니다.”
솔직하게 얘기했다. 굳이 숨길 필요는 없었다. 아스클레피오스가 알약을 비밀리에 전해준 것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 말을 들은 헤르메스의 목소리는 묘하게 변했다.
“뭐라고? 아스클레피오스가 그대에게 직접 알약을 줬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그때 대규의 눈앞에 새로운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아스클레피오스의 알약 효과는 한 전투에만 지속됩니다.]
대규의 발아래 쪽에선 영웅들을 괴롭히는 망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니 그 거대해 보였던 망자들도 장난감 연기처럼 보였다.
하지만 검은 안개가 평원 가득 자욱하게 낀 거로 봐서 망자들의 머릿수는 어마무지 했다.
그때 공략집의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전략을 제공하기 시작한 것이다.
<광역스킬 비산의 결계를 사용하면 망자들의 군대를 한 번에 전멸시킬 수 있습니다.>
<알약의 효과와 영약의 효과가 맞물려 시너지 효과를 발생합니다. 이에 따라 보유하고 있는 스킬들 역시 일시적으로 그 능력이 업그레이드됐습니다.>
여태까지 버프를 받으면 지니고 있는 능력이나 스탯들이 일시적으로 상승했지, 보유한 스킬들의 능력이 업그레이드된 적은 없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대규는 보유 스킬란에서 광역스킬 비산의 결계를 확인해 봤다.
평소 대규가 소유하고 있던 광역스킬 비산의 결계는 반경 5m 내부의 적들을 쓰러뜨릴 수 있는 광역 스킬이었다.
하지만 저 우글우글 몰려 있는 망자들을 단번에 쓰러뜨리려면 반경 5m는 무슨, 적어도 반경 50m는 되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보유 스킬란을 확인해 보니 비산의 결계에 대한 설명이 그전과 달라져 있었다.
비산의 결계(최상급/아이템 효과로 일시적으로 등급이 높아졌습니다)-반투명한 결계를 형성해 반경 50m 내부에 있는 적들을 수많은 검광으로 쓰러뜨린다. 마나 소모 100.
마나 소모량도 그 전보다 훨씬 높아졌다.
하지만 100정도면 지금 보유하고 있는 마나량과 비교했을 때 그렇게 많이 소모하는 것도 아니었다.
업그레이드된 비산의 결계는 그 능력이 어떨지 궁금해졌다.
대규는 불카누스의 사슬검을 꺼내 허공 높게 쳐들었다.
“비산의 결계!”
우르르릉-
갑자기 벼락이라도 칠 것처럼 하늘이 어둑어둑해졌다. 아테나 여신이 아이기스 방패로 제우스의 벼락을 불러일으킬 때의 폭풍 전야와 비슷했다.
지영와 다른 영웅들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대규 씨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대규의 몸집이 하도 커져서 아무리 고개를 꺾어 위를 쳐다봐도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쩌렁쩌렁 울리는 대규의 목소리가 하늘 위쪽에서 들려왔다.
“다들 최대한 멀리 떨어지세요! 50m 밖으로요!”
그 말을 들은 영웅들은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지이잉-
엄청나게 거대한 결계가 대규가 서 있는 곳에서 반경 50m로 형성됐다. 결계의 천장에는 검은 악마의 화염 불씨들이 이글거리며 몰려 있었다.
화르륵-
번쩍!
얼마 후 검은 화염들이 망자들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그으으으…….
화염에 맞은 망자들은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며 사그라졌다.
화염이 빠르게 망자들을 태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니, 태운다기보다 잡아먹는단 표현이 맞는 것 같다.
각 불길 한가운데엔 거대한 주둥이 같은 것이 생겼고, 그 화염 주둥이들은 망자들을 단번에 집어삼켰다.
망자들은 울부짖으며 화염에 잡아먹혔다.
시커먼 연기 같은 망자들을 잡아먹는 까만 악마의 화염 불길은 지옥의 광경 그 자체였다.
지영을 포함한 다른 영웅들은 결계 밖에서 황당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봤다.
‘저 결계 안에 남아 있었다면 어떤 꼴이 됐을까?’
차라리 구덩이 속으로 추락사하는 게 덜 고통스러울지도 모른다.
‘저번에 봤던 검은 화염 파도보다 훨씬 강력하잖아…….’
지영은 화염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순식간에 망자들은 깨끗하게 처리됐다.
그 모습을 위에서 지켜본 대규 자신도 놀랐다.
엄청난 효과다! 공략집의 메시지창대로 영약의 효과와 겹쳐지니까 업그레이드된 스킬의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전에 지영에게 받았던 전쟁의 축복 버프는 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때 엄청난 굉음이 옆에서 들렸다.
째애앵!
“크윽…….”
헤르메스가 히폴리토스에게 밀리고 있었다.
대규는 무릎을 꿇은 뒤 땅에 있는 지영을 향해 소리쳤다. 무릎을 꿇어도 그들의 눈높이 차이는 엄청났다.
“지영 씨! 아군 영웅들에게 전쟁의 축복을 걸어주세요. 광역 범위로요. 모두 힘을 합쳐서 헤르메스 신을 도와 저 괴물 자식을 해치웁시다.”
“알겠어요, 대규 씨.”
지영을 영웅들을 둘러보며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다들 제 주변으로 모여 주세요.”
영웅들은 신속하게 그녀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그녀는 전쟁의 축복 스킬을 발동시키며 말했다.
“여러분의 능력을 더 올려 드릴 거예요. 최대한 가까이 붙어 주세요!”
영웅들의 표정은 좀 전보다 훨씬 밝아졌다.
좀 전에 망자들을 처음 보고 그들과 전투를 벌일 땐 절망적이었다. 구덩이로 떨어져 죽은 영웅들을 보며 자신들도 저렇게 되는 게 아닌가 싶어 자포자기하는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저렇게 거대하게 변한 대규가 망자들을 단번에 해치우자 승리의 희망이 보인 것이었다.
영웅들은 모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김대규 저 남자와 함께라면 정말 이번 전투에서 무사히 살아남아 승리할지도 모른다!’
영웅들이 몰려들었고, 지영은 광역 범위 전쟁의 축복 스킬을 시전했다.
그녀의 두 팔에서 영롱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빛은 스킬의 범위 내에 있는 영웅들의 몸에 빠르게 흡수됐다.
“됐어요, 대규 씨!”
지영이 하늘을 향해 외쳤다. 얼마 후 대규의 목소리가 하늘에서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럼 이제 녀석을 해치워 봅시다. 제가 선봉에 서서 녀석의 급소를 알려 드릴 테니 그곳을 집중적으로 포화해 주세요.”
대규는 무시무시한 외관을 지닌 크툴루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될 수 있으면 원거리 스킬로 공격해 주세요. 가까이 다가가면 위험합니다.”
“알겠어요.”
한편 헤르메스는 히폴리토스와의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저놈의 징글징글한 촉수들이 문제였다.
크툴루의 능력을 지닌 촉수들은 재생 능력을 기본적으로 지니고 있어 베어도 베어도 끝없이 재생됐다.
‘빌어먹을! 저 인간 영웅 녀석 말을 들어야 하는 건가…….’
휘릭-
그때 촉수들이 헤르메스가 들고 있는 황금빛 시미터를 향해 날아왔다.
검기를 형성해 날리기도 전에 촉수들은 그의 검을 칭칭 동여매 버렸다. 찐득한 촉수의 체액이 검을 타고 흘러내려 왔다.
히폴리토스는 촉수들이 뒤덮인 얼굴로 말했다.
“크그극… 판테온의 애송이 신 녀석, 오늘이 너의 제삿날이다.”
그때 검은 화염 불길이 검을 싸매고 있는 촉수들을 향해 날아왔다.
“레툼 익투스!”
촉수들은 힘없이 잘려 나갔고, 덕분에 헤르메스는 자신의 검을 회수한 채 한 발짝 후퇴했다.
“크으윽! 뭐냐!”
히폴리토스는 촉수들을 움직이며 뒤를 돌아봤다.
그곳엔 자신의 몸집만큼 커진 대규가 서 있었다.
그제야 그는 자신의 망자 군대가 전멸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건방진 영웅 자식! 감히 내 망자 군대를……!”
“죽은 영웅들은 내가 불로 깡그리 화장시켜 줬다. 그게 그들에 대한 최후의 예의일 테니까.”
대규는 헤르메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희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신이시여,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헤르메스는 대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렇게 부탁하는 대규의 얼굴엔 왠지 모를 당당함이 넘쳐흘렀다.
분명 자신이 신인데도 불구하고 주눅이 들 정도로 당당한 모습이었다.
신으로서의 자존심이 상하는 기분이었지만 헤르메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존심보다는 전투에서의 승리가 더 중요했다.
헤르메스는 그걸 모를 만큼 멍청한 신은 아니었다.
“…그래,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