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3
173화 히폴리토스 (1)
망자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헤르메스는 구덩이를 향해 고개 숙여 묵념했다.
전쟁에서 싸우다 죽은 그들의 넋을 위로하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망자들은 그를 원망하듯 더욱 기괴하게 울부짖었다.
‘헤라클레스가 홀로 히폴리토스를 무찌르는 데 성공했던 것이 아니구나.’
대규는 망자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헤라클레스의 승리 이면에는 이렇게 많은 영웅의 희생이 있었던 것이다.
망자들을 본 영웅들은 몸을 살짝 떨었다.
어쩌면 자신들이 저 망자들과 같은 처지가 될지도 몰랐다. 영약을 복용해서 능력이 상승했다지만 그에 대한 두려움은 그대로였다.
“그런데 대체 히폴리토스는 어디 있는 겁니까?”
대규가 헤르메스에게 묻자 구덩이 깊은 안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스스스-
그러자 검은 연기 같은 망자들은 어느새 구덩이 한구석으로 몰려가기 시작했다.
“녀석이 나타나고 있다.”
헤르메스가 말을 마치자마자 이상한 것이 구덩이 안쪽에서 뻗어 나오고 있었다.
‘저건?’
대규는 그것이 낯이 익었다.
포르피리온 전투에서 봤던 이계종족 크툴루와 싸울 때 봤던 징그러운 촉수들이었다.
점액이 묻은 촉수들은 구덩이 내벽을 뱀들처럼 기어오르고 있었다. 촉수들 안쪽에는 크툴루가 그랬던 것처럼 작은 가시들이 잔뜩 돋아나 있었다.
‘히폴리토스 녀석도 거인세계 지옥의 괴물들을 풀어 데려온 건가?’
침착하게 생각하는 대규와 달리 헤르메스의 표정은 굳어졌다.
그의 표정은 경악 그 자체였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왜 그러십니까?”
대규가 묻자 헤르메스는 충격을 받은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건 히폴리토스가 아니다. 내가 싸웠던 녀석은 이 녀석이 아니라구.”
그때 구덩이 안쪽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르르르… 오랜만이군, 헤르메스.”
“히폴리토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촉수들은 이제 구덩이 내벽을 기어올라 헤르메스와 대규, 영웅들이 발을 딛고 있는 평원까지 올라왔다.
히폴리토스의 목소리가 구덩이 안쪽에서 들렸다.
“흐흐흐… 네 녀석에게 패하고 난 뒤 나 역시 변했다. 오늘을 위해 절치부심하며 만반의 준비를 했다. 어떠냐! 나의 새로운 모습이 마음에 드느냐? 하하!”
촉수들은 이제 완전히 평원으로 올라왔다.
촉수들이 닿자마자 평원의 땅은 순식간에 괴사해 버렸다.
땅들이 괴사하는 것 역시 크툴루의 촉수들과 똑같았다.
쿠구궁-!
엄청난 굉음과 함께 거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 저게 뭐야…….”
“미친… 말도 안 돼…….”
영웅들은 히폴리토스의 모습을 보자마자 온몸이 굳어졌다.
대규 역시 충격을 받았다.
그는 여태까지 봤던 일반적인 거인 대장 기간테스의 모습이 아니었다.
보통 기간테스들은 흉측하게 생겼어도 두 팔, 두 다리 멀쩡하게 달린 인간형의 모습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이 녀석은 달랐다.
녀석의 몸엔 크툴루처럼 수십, 아니 수백 개의 촉수가 뻗어 나와 있었다.
촉수들은 녀석의 몸을 엄호하듯 뒤덮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저건 분명 크툴루의 촉수인데…….’
그때 대규의 눈에 공략집이 떠올랐다.
-차원의 틈 공략집-
몬스터 이름: 크툴루와 융화된 히폴리토스
보상: 골드 등급 젬스톤 2개, 신화 등급 선물 상자
특징: 거인 대장 기간테스 히폴리토스가 거인의 지옥에 있는 이종족 촉수 괴물 히폴리토스와 융합해서 새롭게 태어났다. 크툴루가 지니고 있는 재생 스킬을 스킬이 아니라 패시브로 갖추게 됐다. 구덩이 속에 살고 있으며 망자들을 조종할 줄 안다.
보유 스킬: 망자의 군대-자신에게 덤볐다가 죽어버린 구덩이 속에 있는 망자들을 조종해 군대처럼 싸우게 한다. 망자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위협적이다. 마나 소모 500.
<크툴루와 융화된 히폴리토스에 대한 공략(하급)을 습득했습니다.>
<크툴루와 융화된 히폴리토스에 대한 당신의 공격력이 10% 상승합니다.>
<크툴루와 융화된 히폴리토스로부터 아이템을 습득할 확률이 조금 높아집니다.>
<크툴루와 융화된 히폴리토스의 약점을 영상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영상을 재생하시겠습니까? Yes/No>
크툴루와 변신 합체라도 한 걸까.
대규는 녀석의 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때 녀석의 명치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엔 대규가 전에 상대했던 크툴루의 반질반질한 문어 대가리가 붙어 있었다.
영웅 몇몇은 히폴리토스의 외관을 보고 속이 메스꺼워졌는지 우욱, 하며 입을 틀어막기도 했다.
두려움도 두려움이지만 녀석의 외관은 솔직히 구역질이 날 정도로 끔찍했다.
대규 역시 저번 전투에서 크툴루와 그 군단을 처음 봤을 땐 토하고 싶을 만큼 역겨움을 느꼈다.
헤르메스는 촉수가 잔뜩 돋아난 히폴리토스의 모습을 보고 할 말을 잃을 정도로 당황한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영웅들에게 명령했다.
“저 녀석은 일단 내가 상대하겠다! 그대들은 내가 신호를 내릴 때까지 기다리고 있거라!”
말을 마치자마자 그의 몸집은 히폴리토스만큼 커졌다. 그가 타고 있는 검은색 말 역시 거대해졌다.
그러자 히폴리토스가 촉수들을 움직이며 골골거렸다.
“크흐흐… 나를 쓰러뜨리겠다고 인간 영웅들을 이렇게 많이 데려왔군. 아니, 인간들이 아니라 곧 내 망자의 군대로 들어올 신입 병사들이지. 흐흐흐…….”
“웃기지 마라!”
헤르메스는 갑옷 허리춤에서 차고 있는 칼을 꺼내 든 뒤 소리쳤다.
대규는 헤르메스의 칼을 보고 놀랐다.
그의 칼은 직선 형태의 칼날을 지닌 일반적인 롱 소드 형태의 검이 아니었다.
곡선형, 초승달 모양으로 살짝 휘어져 있는 검이었는데 꼭 아라비안나이트 같은 곳에서 도적들이 들고 다니는 검같이 생겼다.
시미터(Scimitar) 형태의 검.
그의 무기에서 역시 헤라클레스의 검처럼 은은한 황금빛이 감돌았다.
신이 지닌 무기라서 그런 것 같았다.
“받아라!”
헤르메스는 녀석의 몸을 휘감고 있는 촉수들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그러자 황금빛 곡선 모양의 검강이 촉수들을 향해 날아갔다.
파파팟! 서걱-
칼을 한 번 휘두른 것뿐인데 수십 개의 촉수가 빠르게 절단됐다.
아주 뛰어난 절삭력이었다.
하지만 대규는 저것이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크툴루가 지닌 능력은 재생이다. 곧 잘린 촉수들은 빠르게 재생될 것이다.
대규는 거대해진 헤르메스를 올려다보며 외쳤다.
“헤르메스 님! 그렇게 해선 안 됩니다. 녀석의 촉수들은 더욱 거세게 재생한다구요!”
아니나 다를까.
헤르메스가 잘라 버린 촉수들의 절단면에선 다시 새로운 촉수들이 돋아났다.
“크윽… 저게 대체…….”
헤르메스가 당황하자 대규를 계속해서 소리쳤다.
“녀석의 급소를 노려야 합니다! 촉수들은 자르면 자를수록 재생…….”
“시끄럽다!”
헤르메스는 대규의 말을 막아 버렸다.
“내가 알아서 한다!”
한낱 영웅인 대규에게 조언을 들으니 자존심이 상한 것 같았다.
대규는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신들은 이게 문제다. 자신들의 권위를 침해받는 걸 싫어해서 아랫사람들이 뭘 알려주거나 도와주려 해도 잘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나마 아테나 여신은 인간들의 의견을 잘 반영하는 편이지만, 그녀 역시 자신의 권위나 자존심이 침해받는다고 생각하면 차갑게 돌변했다.
어쨌든 헤르메스는 히폴리토스 녀석을 상대로 계속 싸우기 시작했다.
영웅들은 입을 떡 벌리고 그들의 전투를 쳐다볼 뿐이었다. 대규와 지영, 그리고 몇몇 세미데우스 영웅 빼고 그들은 아직 인간 영웅 상태였다.
따라서 그들은 기간테스와 신의 전투를 이렇게 직접 가까이서 본 적이 없었다.
“으어어… 우리가 저런 녀석을 무찔러야 한다고?”
몇몇은 좌절스러운 표정으로 전투를 지켜봤다.
대규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렇게 넋 나가 있을 시간이 없어. 빨리 저 녀석의 약점을 파악해야 해.’
히폴리토스가 헤르메스 신과 싸우느냐고 정신없는 틈을 타 약점 영상을 보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히폴리토스가 영웅들을 바라보며 이렇게 외쳤다.
“하하하! 이 개미 같은 영웅 녀석들! 몸이 완전히 얼어붙었구나. 그럼 내가 움직이게 해 주지.”
그는 촉수들이 득실득실한 왼쪽 발을 쾅! 하고 굴렀다.
온 평원이 진동했다. 그리고 평원 아래에 위치한 구덩이 안쪽에서 이상한 진동이 느껴졌다.
그으으으-
‘빌어먹을!’
녀석이 스킬을 발동시킨 것이다.
망자의 군대.
망자들의 군대를 조직해 상대방을 전멸시키는 스킬.
얼마 후 구덩이 안쪽에서 망자들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저게 뭐야?”
영웅들은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어리바리하게 방황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저러다간 곧 망자가 돼 버릴 것이다.
대규는 다급하게 외쳤다.
“다들 조심하십시오! 망자들이 몰려올 겁니다. 전투 준비!”
“망자들? 뭐라고?”
대부분 대규의 말에 놀라 우왕좌왕했지만 레벨과 실력이 꽤 높은 몇몇은 차분히 전투를 준비했다. 중국에서 봤던 라이펑 역시 차분하게 준비를 하는 영웅에 속했다.
지영은 긴장한 표정으로 쌍검을 쥐고 있었다. 그때 대규가 그녀에게 다가와 말했다.
“지영 씨, 망자들을 무조건 물리치세요. 저들이 당신들의 육체를 가져가지 못하게 하세요.”
“알겠습니다.”
판테온의 시련에서 겪어 본 결과 망자들은 죽은 자들의 혼령이다.
따라서 그들은 살아 있는 자의 육체를 탐냈다.
하지만 그들이 육체를 얻는다고 다시 생을 얻어 살아 있는 인간으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계속 망자로 남게 되지만 생의 미련을 잊지 못해 끊임없이 살아 있는 다른 인간의 육체를 갈구한다. 그러면서 다른 살아 있는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
끼이이이-!
망자들의 군대가 구덩이에서 용솟음쳐 올라 영웅들을 덮치기 시작했다.
대규는 당황하지 않고 그들을 똑바로 바라봤다.
공략집이 떠올랐다.
-차원의 틈 공략집-
몬스터 이름: 히폴리토스의 망자
보상: 낮은 확률로 블랙 등급 젬스톤 드랍
특징: 히폴리토스를 무찌르려다 희생된 영웅들의 혼령. 한때는 기간토마키아에 참전했던 영웅들이었지만 망자가 돼서 살아있는 자를 공격한다. 물리적 공격은 먹히지 않는다.
<히폴리토스의 망자에 대한 공략(하급)을 습득했습니다.>
<히폴리토스의 망자에 대한 당신의 공격력이 10% 상승합니다.>
<히폴리토스의 망자로부터 아이템을 습득할 확률이 조금 높아집니다.>
<히폴리토스의 망자 약점을 영상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영상을 재생하시겠습니까? Yes/No>
약점 영상을 재빨리 재생했다.
망자들은 육체가 없는 혼령의 상태, 따라서 이쪽의 물리적 공격은 전혀 먹히지 않는다.
오직 마법적인 스킬로 공격해 처리해야 했다.
다른 영웅들은 그 사실을 모른 채 무기로 물리적인 공격을 가했다가 낭패를 보고 있었다.
“으아아…….”
한 영웅이 자신의 무기로 망자의 몸 한가운데를 찔렀지만, 망자로부터 뿜어져 나온 검은 연기가 칼을 휘감았다.
“으악!”
칼이 휘감겨진 인간 영웅은 그대로 구덩이 안으로 추락해 버렸다.
영약으로 모든 영웅이 능력을 높였다고 하지만 공략집에 따르면, 저 망자들은 애초에 엄청난 상급 몬스터였다.
보상이 블랙 등급 젬스톤인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문제는 망자들의 수에 비해 영웅의 수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대규는 영웅들을 바라보며 외쳤다.
“마법, 마법 스킬로 공격하십시오!”
이렇게 소리친 뒤 사슬검을 꺼내 휘둘렀다.
화르르륵-
불의 장막이 화려하게 펼쳐졌다.
휘두르는 검의 궤도를 따라 악마의 화염은 파도처럼 망자들을 덮쳤다.
끼이이이-
망자들은 순식간에 재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이거 엄청난걸. 영약 복용으로 힘이 세진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하지만 안심하긴 이르다. 망자는 아직도 많았다. 그리고 대규를 제외한 나머지 영웅들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괜히 아스클레피오스가 영약을 준 게 아니었다. 영약을 먹은 상태가 돼야 영웅들은 겨우 호각으로 싸울 수 있는 수준이 되는 것이었다.
‘어떡하지? 나 혼자 싸울 수는 없는데.’
저 망자 녀석들을 해치우려면 전략이 필요하다.
대규는 수없이 많은 망자를 물리치기 위해 전략을 세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