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
171화 아스클레피오스 (1)
지영은 저 앞쪽으로 걸어가는 대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같은 세미데우스가 됐는데도… 왜 이렇게 그의 앞에선 항상 쩔쩔매게 되는 걸까.’
어른 앞에 서 있는 아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거나 하진 않았다. 묘하게 설레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차원의 틈 때부터 그랬지.’
하지만 대규는 자신과 여전히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 같았다.
‘이번에도 같이 살아남았으면 좋겠다.’
한편 대규는 천막 안으로 들어가며 생각했다.
‘그녀의 시련은 어땠을까?’
분명 판테온의 시련은 유혹들을 견뎌 내고 나중엔 칼리 여왕에게 잡아먹혀 새로운 육체를 얻어내는 것이었다.
자신이 첫 번째 유혹에서 만났던, 목욕탕에서 그를 유혹했던 여자 악마들이 떠올랐다.
그럼 지영에겐 벌거벗은 남자들이 나온 걸까?
그리고 마지막엔 걸치고 있는 아이템과 옷을 다 벗고 알몸이 돼서 칼리 여왕에게 우적우적 먹히는 고통을 당했을까?
사실을 말하면 그녀가 여왕에게 먹히면서 느꼈을 고통보다 그녀의 알몸이 먼저 떠올랐다.
‘정신을 가다듬자. 동료 영웅의 알몸 상상이라니. 최고의 영웅 칭호가 아깝다.’
대규는 고개를 양옆으로 저으며 천막 안으로 완전히 들어갔다.
그런데 그 안에는 이상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곳은 꼭 넓은 실험실처럼 생긴 곳이었다.
실험실 한가운데엔 수술대처럼 생긴 것이 설치돼 있었고, 알 수 없는 도구들과 약들이 선반에 잔뜩 놓여 있었다.
‘버프 스킬을 걸어 능력을 올려 주는 게 아니었나?’
천막 안은 어두웠고, 섬뜩한 기분마저 들었다.
대규를 비롯한 영웅들의 표정은 굳어졌다. 그러자 천막 안쪽에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
“내 진료실에 온 걸 환영한다, 인간 영웅들이여.”
그는 대머리에 하얀 가운을 입고 있는 남자였는데, 창백할 정도로 온몸이 말라 있었다. 눈가는 움푹 들어가 퀭했는데 그의 푸른 눈빛만은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자 공략집이 떠올랐다.
-차원의 틈 공략집-
신 이름: 아스클레피오스(Asclepius)
특징: 의술의 신. 판테온 최고의 의사며 여러 수술을 행한다. 치료 목적의 수술도 하지만 재생, 혹은 사람을 살려내는 수술도 한다. 여러 인간 영웅들을 살려낸 바가 있다.
<아스클레피오스 신은 불사(不死)의 존재입니다.>
<아스클레피오스 신을 죽이는 건 불가능하지만, 심연의 결계에 봉인을 할 수는 있습니다.>
<아스클레피오스 신을 심연의 결계에 봉인하려면 신화 등급 이상의 무기 아이템이 필요합니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영웅들을 보며 씩 웃은 뒤 말했다.
“그대들이 내 신체개조수술을 받을 영웅들이로군!”
수술이란 말에 영웅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실험실 가운데 있는 수술대는 그런 의미였나.
심지어 몇몇 영웅은 두려운 표정을 짓기도 했다. 그는 그런 영웅들을 보고 음산하게 낄낄대며 말했다.
“별거 아니다. 금방 끝나는 수술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구.”
“대체 무슨 수술입니까?”
대규가 영웅 대표로서 물었다. 그러자 아스클레피오스는 선반에서 얇은 수술용 장갑을 끼며 말했다. 그의 손은 고목나무 가지처럼 앙상했다.
“너희들의 능력을 일시적으로 끌어 올리기 위해 헤르메스 신께선 영약을 내리셨다. 그 영약을 먹으면 너희의 몸은 일시적으로 강해져서 기간테스와 싸울 만한 수준이 되지. 현재 지닌 능력의 최소 10배에서 최대 30배까지 끌어 올려 주는 약이니까 말이다. 물론 올라가는 능력의 차이는 개인의 역량에 달려 있겠지만.”
그 말에 영웅들의 표정이 환해진다.
저 정도로 강해진다면 싸워 볼 만했다. 기간테스에게 찍소리도 내지 못하고 죽진 않을 것이다.
그때 아스클레피오스가 대규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로구나. 최고의 영웅 칭호를 받은 자, 그리고 신들을 놀랍게 만든 자가.”
그는 흥미로운 눈빛으로 대규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너는 영약을 먹으면 기간테스와 일대일로 싸울지도 모르겠군.”
“그런데 약을 먹으면 되지 왜 수술이 필요한 겁니까?”
그러자 그는 대답 대신 여전히 흥미로운 눈빛으로 대규를 쳐다봤다.
그런 그의 눈빛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왜 저렇게 보는 거지?’
곧 그는 입을 열었다.
“…문제는 그 영약을 먹고 난 다음이다. 영약은 매우 독해서 세미데우스의 육체로도 감히 버틸 수 없는 수준이다. 인간 영웅들은 말할 것도 없지.”
“예?”
“너희들의 신체 체계와 기능들은 강력한 영약의 힘에 의해 무너져 버릴 거다. 본래 물의 양이 넘칠수록 그를 담는 그릇도 커야 하는 법. 한마디로 육체가 견뎌내지 못해 과부하가 걸리는 거지. 너희가 수술 없이 영약을 먹으면 곧바로 중추신경계가 무너져 내려 기간테스 녀석과 싸워 보기도 전에 죽어 버릴 거다.”
하긴, 그 정도로 능력을 높여 주는 약이라면 신체에 과부하가 걸릴 만했다.
그는 선반에 놓인 수술용 메스를 집어 들며 말했다.
“이 수술은 너희들의 중추신경계가 약물로부터 버틸 수 있도록 탄탄하게 만들어 주는 수술이다. 이 수술 후에 영약을 복용하면 된다. 영약은 천막 출구 옆에 놓인 테이블 위에 있으니 하나씩 챙겨 나가면 된다.”
그는 출구 쪽에 놓인 작은 유리병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한 개 이상 가져갈 생각은 하지 마라. 헤르메스 신이 지키고 계시니까, 그렇게 한다면 커다란 벌을 받게 될 거다. 흐흐흐.”
그는 콧노래를 부르며 메스를 들고 천막 한가운데 놓인 수술대로 걸어왔다.
“호호호, 이게 얼마 만의 수술인가! 수술대로 올라가라. 레벨이 낮은 녀석들부터 말이지.”
그러자 레벨이 낮은 인간 영웅들부터 수술대 위로 올라갔다.
자연스럽게 세미데우스인 대규와 지영은 맨 나중에 수술을 받게 됐다.
수술은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아주 금방 끝났다.
에피클레오스가 한 명을 수술하는 데는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는 신묘하게 생긴 자신의 날카로운 메스로 영웅들의 등 한가운데를 살짝 가른 뒤 그 안쪽에 메스를 들이밀고 휙휙 재빨리 휘둘렀다.
몇 번 그 동작을 반복하고 난 뒤 영웅들의 상처를 신속하게 꿰맸다.
“다 됐다! 다음 녀석 수술대로 올라와라.”
마취도 안 한 것 같은데 수술을 받고 있는 영웅들은 고통도 못 느끼는 것 같았다.
‘괜히 의술의 신이 아니구나.’
수술을 순식간에 마친 영웅들은 일어나 영약을 지급받은 뒤 천막을 빠져나갔다.
1시간도 채 안 돼서 대규와 지영의 차례가 돌아왔다.
지영이 먼저 수술대에 엎드렸다. 그러자 에피오클레스는 그녀의 몸을 보며 감탄한 듯 말했다.
“인간 여성의 육체로 세미데우스가 되다니… 그것도 이렇게 젊은 여성이! 대단하군. 게다가 이렇게 아름다운 미모의 소유자인데, 전혀 의술의 힘을 빌리지 않았구나.”
의술의 신이라 그런지 성형수술의 여부까지 알 수 있는 것 같았다.
지영 역시 순식간에 수술을 마치고 영약을 받은 뒤 천막 밖으로 나갔다.
이제 마지막, 대규의 차례였다.
천막에 단둘이 남게 되자 에피오클레스의 눈이 다시 반짝였다.
그는 수술대에 엎드린 대규를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왜 그러십니까?”
대규가 수상한 그의 눈빛을 보고 묻자 그가 입을 열었다.
“그대에 대한 얘기는 많이 들었다. 그대는 후보생 시절부터 판테온의 신들을 놀라게 했지.”
“그런데요?”
“다들 그대의 능력의 원천을 궁금해하지. 내가 봤을 때 그대의 육체엔 특별한 힘이 있는 것 같은데… 으음, 꼭 해부해 보고 싶은 몸이야.”
‘뭐라고?!’
해부란 말에 대규는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에피오클레스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나에게 잠깐 그대의 육체를 빌려줄 수 있느냐? 그대의 뇌를 들여다보고 싶구나. 아, 물론 나는 죽은 자를 되살릴 수 있는 의술이 있으니 너를 죽이진 않을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뇌를 들여다본다니. 저게 무슨 끔찍한 말이냐.
그러자 그는 몹시 흥분한 목소리로 대규의 두 손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
“이렇게 부탁하마. 의술의 신으로서 그대같이 특이한 신체를 살펴보는 건 몹시 기쁜 일이니까 말이다!”
그의 퀭한 눈빛엔 엄청난 열정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대규는 차가운 표정으로 거절했다.
“됐습니다.”
“흐음… 알겠다. 그럼 엎드려라.”
에피오클레스는 단호박 같은 대규의 대답에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의 신묘한 메스가 등에 닿았다.
날카롭고 차가운 촉감이 온몸에 전해졌다.
스륵-
칼날이 등을 가르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고통은 하나도 없었다.
메스가 살갗에 닿자마자 저절로 마취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얼마 후 그가 말했다.
“다 끝났다. 일어나라.”
“감사합니다.”
대규가 수술대에서 일어나 마지막으로 남은 영약 병을 들고 천막 밖으로 나서려는데 에피오클레스가 쫓아와 말했다.
“정말 그대의 육체를 아주 잠깐 동안 빌려줄 의향이 없는가? 이번 전투 후에 아주 잠깐이라도 말이다! 대신 내가 빌려준 대가는 확실히 치러 주도록 하마.”
끈질기군.
하지만 그 대가라는 게 궁금하기도 했다. 신이 내리는 대가니까 시시한 건 아닐 것이다.
대규는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대가 말입니까?”
“그대는 아마 마지막 징표를 노리고 있겠지. 여태까지 두 개의 징표를 모았으니까 말이다.”
“그걸 어떻게?”
대규가 살짝 놀란 표정으로 되묻자 에피오클레스는 말을 이었다.
“그대의 존재는 이미 신들 사이에서 유명하다. 그리고 기록의 신전을 살펴보니 그대의 이름 옆에 두 개의 징표가 수놓여 있더구나. 그대는 마지막 징표까지 모아 신의 육체를 얻는 시련에 도전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 아닌가?”
“맞습니다.”
그러자 에피오클레스가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하지만 그대가 모르는 게 있군. 징표를 모두 모은다고 바로 시련에 도전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게 무슨……?”
대규는 굳어진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그대의 능력으론 한계가 있다. 세미데우스지만 그 한계 레벨에 도달하지 못하면 시련에 도전할 수가 없다. 인간 영웅일 때 판테온의 시련에 도전할 때도 그러지 않았나?”
그랬다.
한계 레벨 100을 돌파하자 판테온의 시련에 도전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고 메시지창이 떠올랐었지.
‘젠장, 낭패로군. 징표만 모두 모으면 될 거로 생각했는데. 설마 세미데우스의 경우도 레벨을 100까지 올려야 하는 건가?’
갑자기 좌절감이 들었다.
세미데우스가 된 이후 레벨을 올리는 건 인간 영웅일 때에 비해 아주 어려운 일이 돼 버렸다.
심지어 기간테스인 토온을 해치웠는데도 한 번에 3단계만 오르는 게 고작이었다.
어쩌면 이번 기간토마키아가 끝날 때까지 한계 레벨에 도달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이건 미친 듯이 노가다를 해서 될 만한 수준이 아닐지도 모른다.
에피오클레스는 대규의 마음을 읽은 듯 얄미운 목소리로 말했다.
“신의 육체를 얻는 시련은 그리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리고는 눈을 반짝이며 이렇게 덧붙였다.
“…하지만 내가 도와줄 순 있지.”
“그게 무슨?”
“내가 신체 강화 수술로 너의 레벨을 단번에 끌어 올려 줄 수 있다. 물론 세미데우스의 육체를 지닌 자에게 까지만 가능한 수술이지. 그리고 힘든 수술이기도 하고 형평성에 어긋나기도 해서 제우스 님께서도 엄격하게 시술을 금지하고 있긴 하지만… 너에게 한 번쯤은 몰래 해줄 수도 있다. 물론 아무런 뒤탈 없이 말이다.”
“그게 정말입니까?”
대규가 놀라서 묻자 그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하하, 그래! 대신 그대의 육체를 아주 잠깐 동안 관찰할 수 있게 해준다면 말이다. 아주 잠깐……. 한번 생각해 보거라.”
대규는 그의 말을 듣고 영약을 집어 들며 생각했다.
흐음, 우선 마지막 징표를 얻고 나서 생각해 봐야겠다.
그는 에피오클레스에게 말했다.
“그건 나중에 결정을 내리겠습니다. 지금 확답을 드릴 순 없군요.”
“그래, 그냥 한번 생각해 보라구. 하지만 확실한 건 혼자 힘으로 세미데우스의 한계 레벨을 돌파하는 덴 영겁의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인간의 한계 레벨에 도달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지. 아무나 신의 육체를 얻는 시련에 도전하게 해서는 안 되니까 말이야. 그리고 이건 특별히 내가 주는 선물이다. 요긴하게 쓰일 거야.”
그는 대규에게 둥그런 구슬처럼 생긴 알약을 건넸다.
대규는 영약과 알약을 들고 천막 밖으로 나와서 생각했다.
레벨을 올리는 수술이라니. 그야말로 사기적인 수술 아닌가. 왜 제우스가 엄격하게 금지하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물론 그만큼 리스크가 높고 힘들지도 몰랐다.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남들이 노력할 시간에 이건 수술 한 번으로 끝나는 거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