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0
170화 헤르메스의 필멸자 소환 (2)
하긴, 지영 정도면 시련을 통과할 만하다. 그녀는 그럴 만한 능력을 지녔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녀의 갑옷 등 뒤에는 붉은 망토가 달려 있었다. 오크 대장군 가로쉬의 망토와 닮았다.
‘녀석에게 선물을 받은 건가? 아니다. 그녀는 그런 선물을 쉽게 받지 않는다.’
전에 가로쉬가 건넸던 아이템도 거절했었다.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곳엔 대규와 지영 말고도 다른 영웅이 한가득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왕좌엔 헤르메스가 떡하니 앉아 있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막사 안에는 곳곳에 낯익은 얼굴 몇몇이 보였다.
아테나 여신의 부대로 가기 전 제2 타르타로스에서 봤던 얼굴들이었다. 물론 영웅들의 부대는 각자 다 다른 것 같았다.
여기 있는 영웅들의 유일한 공통점이라곤 모두 인간 출신의 영웅들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대규와 지영을 포함한 세미데우스 영웅은 총 4명이었지만 그들 역시 모두 인간 출신이었다.
오크나 정령, 켄타로우스 족 등 다른 종족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왕좌에 앉아 있는 헤르메스가 일어나 입을 열었다.
“여기로 와줘서 고맙다, 영웅들이여. 미안하지만, 나는 그대들의 상관인 신들에게 양해를 구해 그대들을 이곳으로 미리 불러들였다. 바로 그대들의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대규를 바라보며 말했다.
“역시 그대도 왔군. 내 신발은 아주 잘 신고 다니는 것 같구나.”
헤르메스는 예전에 자신의 신발이었던 대규의 장화를 보고 말했다.
대규는 고개 숙여 인사한 뒤 이렇게 말했다.
“덕분입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일로 저희를 부르신 겁니까?”
그러자 헤르메스는 심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그대들을 부른 이유는, 그대들이 지금 내가 상대하고 있는 적을 쓰러뜨릴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애석하게도 나의 힘만으로는 쓰러뜨릴 수 없는 녀석이라서 말이지.”
신인 헤르메스조차 쓰러뜨릴 수 없는 적이라니.
‘그런데 인간 출신 영웅들이 그런 녀석을 쓰러뜨릴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대규로선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른 영웅들 역시 대규와 비슷한 생각인 것 같았다. 그들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헤르메스를 바라봤다.
대규는 영웅들을 대표해서 헤르메스에게 물었다.
“대체 저희가 무슨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러자 헤르메스는 영웅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대답했다.
“그 능력은 바로 그대들이 ‘인간’이라는 것이다.”
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신의 육체를 지닌 헤르메스가 인간보다 능력이 훨씬 뛰어나지 않은가.
그러자 헤르메스는 인간 영웅들을 다시 둘러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대들은 히폴리토스란 기간테스를 들어 본 적이 있는가?”
대규는 들어 본 적 있었다.
그간 신화 책을 읽으며 쌓은 지식 덕분이었다.
히폴리토스.
녀석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기간테스 중 한 명이었다.
책에는 기간토마키아에서 헤르메스와 전투를 하다 쓰러졌다고 나와 있었다.
대규는 그 내용을 기억하며 헤르메스에게 물었다.
“신이시여, 당신께서 쓰러뜨린 거인 대장 아닙니까?”
그러자 헤르메스가 깜짝 놀라 물었다.
“그대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지? 제1차 기간토마키아는 그대들이 태어나기도 훨씬 전의 일인데 말이다.”
“인간 세상엔 그 전쟁을 기록한 책이 있습니다.”
헤르메스는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역시 인간들이란 신묘하군. 그대 말이 맞다.”
신은 말을 이었다.
“나는 그때부터 녀석과 몇 번이나 싸웠다. 심지어 녀석을 이기기 위해 하데스 신에게 투명 투구까지 빌렸지.”
그러면서 그는 대규의 갑옷에 달린 망토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대의 어깨에 달린 망토와 비슷한 아이템이지. 그대는 정말이지 신묘한 아이템들을 척척 얻어내는구나.”
헤르메스는 히폴리토스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는 기간테스 중에서도 아주 특이한 녀석이다. 일종의 돌연변이로, 신이 죽일 수 없는 기간테스지. 신이 아닌 오직 필멸자(必滅者), 즉 죽을 수 있는 존재만이 그를 죽일 수 있다고 말하는데 그중에서도 너희 인간만 녀석을 죽일 수 있다.”
헤르메스의 말처럼 신은 불멸의 존재였다.
대규는 신들을 볼 때마다 공략집창에 떠올랐던 메시지를 기억해 냈다.
지금도 헤르메스를 바라보면 이런 창이 맨 밑에 떠올랐다.
<헤르메스 신은 불사(不死)의 존재입니다.>
<헤르메스 신을 죽이는 건 불가능하지만, 심연의 결계에 봉인을 할 수는 있습니다.>
<헤르메스 신을 심연의 결계에 봉인하려면 신화 등급 이상의 무기 아이템이 필요합니다.>
‘잠깐, 난 이제 신화 등급 무기를 들고 있잖아. 그럼 이제 헤르메스 같은 신들과 전투를 해서 저 심연의 결계라는 데를 봉인할 수 있다는 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헤르메스가 말을 이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녀석은 인간만이 죽일 수 있다. 그전의 기간토마키아 땐 헤라클레스의 도움을 받아서 녀석을 쓰러뜨렸는데… 직전에 녀석이 아쉽게 도망쳐 버렸지. 그런데 녀석이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헤라클레스도 녀석을 쓰러뜨릴 수 없게 됐지.”
왜냐면 헤라클레스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는 1차 기간토마키아 이후 신의 육체를 얻어서 신이 됐다. 대규는 전에 무한의 격투장에서 헤라클레스를 만났을 때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던 황금빛을 기억했다.
“그래서 이렇게 인간인 그대들을 부른 것이다. 그대들은 녀석을 쓰러뜨릴 수 있지. 그리고…….”
헤르메스는 지영과 대규, 다른 세미데우스 영웅 둘을 보며 말했다.
“그대들 역시 반신의 존재 세미데우스지만, 아직은 불멸의 존재인 신의 육체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그대들 역시 근본은 인간 출신이니 녀석을 쓰러뜨리는 게 가능해서 부르게 됐다. 그대들이 힘을 합쳐 녀석을 쓰러뜨리길 바란다. 이번 전투는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스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평소의 장난기 어린 표정은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그는 대규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대는 잘 알고 있겠지. 그대의 부대인 아테나 여신 부대가 지난번 전투에서 기가스 포르피리온과 토온을 해치워서 이번 전쟁에서 승리의 거점을 점령했다는 사실 말이다.”
대규가 고개를 끄덕이자 헤르메스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신들에게만 알려진 정보인데 말이다. 아테나 여신 부대의 전투 이후 우리 판테온은 완전히 승기를 잡았다. 다른 신들 역시 호전을 치르고 치렀으니까 말이다.”
“……!”
“이제 기간테스 미마스와 이 히폴리토스 녀석만 해치우면 판테온의 승리는 거의 90% 확실해진다.”
미마스는 저번에 아테나와 싸우러 왔다가 도망간 홀쭉한 거인이었다.
판테온이 승리한단 말에 인간 영웅들의 표정이 환해졌다.
아무리 헤르메스가 호전이라고 말했지만, 그간 전투 중 죽은 영웅들은 한두 명이 아니었다.
승리를 위해선 그만한 희생이 있는 법이다.
생각해 보면 당장 지난번 대규가 치렀던 기가스 포르피리온과의 재전투에서도 수많은 희생이 있었다. 영웅들과 카페르 족 산양 병사들의 묘지가 요새 뒤에 설치돼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 모든 전투가 끝난다니, 그것도 승리로 말이다.
다들 표정이 환해질 수밖에 없었다.
헤르메스는 밝아진 영웅들의 표정을 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 히폴리토스 녀석을 해치우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겠나?”
“하지만 고작 인간 영웅의 실력으로 기간테스를 잡는 건 무리 아닙니까?”
대규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당장 인간 출신 영웅 중 가장 뛰어난 실력을 지닌 대규조차 지영의 버프 스킬이 없었다면 지난번 기간테스 토온을 해치울 수 없었을 것이다.
헤르메스는 대규의 물음에 이렇게 대답했다.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번 임무가 중요하면서도 힘들다는 거지. 하지만 나도 그대들과 함께 싸울 것이다. 내가 녀석의 힘을 다 빼놓으면 죽이는 그 순간만큼은 너희 인간 영웅들이 달려들면 된다.”
“아무리 그래도 상대는 거인 대장 기간테스입니다. 아무리 치명상을 입었다 해도 인간 영웅들은 녀석의 공격 한 번에 죽을지도 모릅니다.”
“알고 있다. 그에 대해선 다 대비해 두고 있다.”
헤르메스는 말을 이었다.
“전투에 들어가기 전, 그대들의 능력을 일시적으로 끌어 올려 줄 것이다. 우리 부대에 있는 신 한 명에게 특별히 부탁했다.”
지영의 버프 스킬 비슷한 걸 걸어 주기라도 하는 걸까?
“아무리 그래도 세미데우스도 아닌 다른 인간 영웅들에겐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대규가 묻자 헤르메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능력을 끌어 올리면 일시적으로 기간테스를 상대하는 게 가능하다. 일반 인간 영웅도 말이다. 그리고 전투는 당연히 위험한 것이다. 여태까지 너희들은 목숨을 걸고 싸워왔던 것 아니냐?”
“그건 그렇지만…….”
“이번 전투는 아까도 말했지만, 판테온 전체의 승리를 위해 상당히 중요하다. 그래서 신들의 아버지 제우스께서도 주목하고 계신다.”
제우스가 주목하고 있다고.
대규의 눈동자가 커졌다.
“심지어 제우스 님은 이런 약속을 하셨지. 히폴리토스를 최종적으로 쓰러뜨리는 영웅에겐 자신의 징표를 특별히 하사하겠다고.”
징표란 말을 듣는 순간 대규의 눈빛이 바뀌었다.
대규뿐이 아니었다.
지영과 다른 세미데우스 영웅 두 명의 눈빛도 순식간에 바뀌었다.
그들 역시 제우스의 징표가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살아남은 영웅들에겐 그에 걸맞은 엄청난 보상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살아남도록 해라.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구나.”
“녀석의 전력은 어떻게 됩니까?”
대규가 묻자 헤르메스는 대답했다.
“녀석은 우리를 상대하러 혼자 올 것이다. 녀석의 부하들은 내 부대의 영웅들이 싹쓸이할 것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이제 설명은 끝이다. 그대들은 전투에 참가하기 전에 능력을 끌어 올리러 가야 한다. 일단 천막을 나가 안내를 받도록 해라.”
그 말에 영웅들은 천막 밖으로 우르르 나갔다.
대규 역시 그들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낯익은 얼굴들이 그를 맞이했다.
인간의 상체를 지닌 염소 인간 두 명.
대규가 일전에 헤르메스의 부탁을 받고 감옥에서 구해 왔던 그의 아들들, 판과 실레노스였다.
하지만 그들은 그때 봤을 때와 좀 달라졌다. 건방진 모습은 어디 가고 잔뜩 주눅이 들어 있었다.
아무래도 그 이후 아버지인 헤르메스에게 호되게 혼이 난 모양이었다.
하지만 여자를 밝히는 건 여전한 것 같았다.
그들은 지영의 모습을 보며 음흉한 눈빛을 교환한 뒤 이렇게 말했다.
“흐흐… 아름다운 영웅님은 저희가 특별히 이쪽으로 모시도록 하지요.”
지영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의 발굽이 그녀의 어깨에 닿으려는 순간,
휘리릭-
지영의 어깨에 두른 망토가 녀석들의 발굽을 옥죄기 시작했다.
“으아악! 실레노스 형, 이게 대체 뭐야?”
“나도 모르겠다! 으윽, 아파!”
망토는 구렁이처럼 변해 녀석들의 발굽과 발목을 꽁꽁 싸매기 시작했다.
“으아아, 잘못했습니다!”
그들이 발굽을 그녀 어깨에서 떼자 망토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판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그녀로부터 멀어졌다.
떨리는 목소리로 영웅들을 인솔하기 시작했다.
“…이, 이쪽으로…….”
그들은 영웅들을 주둔지 구석의 거대한 천막으로 안내했다.
대규는 쩔쩔매는 녀석들의 모습을 보며 쌤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지영이 두른 망토가 뭔지 궁금해졌다.
[수호의 망토(전설)]
[망토를 차고 있는 자의 신체를 어떤 물리적 외상으로부터 보호한다. 귀속된 주인에게 충성도가 높은 망토다. 물리 방어력이 80% 상승함.]
지영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대규의 시선을 느꼈다.
살짝 부끄러워하는 표정으로 대규에게 말했다.
“판테온의 시련을 통과하고 나서 보상으로 받았어요.”
“완전 보디가드 망토로군요. 멋있는데요!”
대규가 말하자 그녀는 부끄럽다는 듯 이렇게 대답했다.
“저런 기능이 있는지는 몰랐네요. 단순히 물리 방어력 효과만 있는 줄 알았는데… 좀 부끄럽네요.”
“부끄러운 건 저 음탕한 염소 자식들이죠. 그런 특수한 망토는 희귀한 아이템이니 잘하고 다니면 좋을 거예요. 더군다나 이번 전투는 아주 위험해 보이니까요. 참, 축하드립니다.”
“네?”
“판테온의 시련을 무사히 통과하신 것 말이에요.”
“아,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당신이라면 당연히 통과할 거로 생각했습니다.”
대규는 이렇게 말한 뒤 그녀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안내 받은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