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
161화 포르피리온의 재습격 (11)
여신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토온의 배 속에 있었던 맹장 중 한 명인 케이른의 친구 게니우스가 예의를 차려 여신에게 말했다.
“아테나 여신이시여. 우리는 대규 대장군이 아니었다면 영원히 토온 녀석의 배 속에서 시체 상태로 썩어 갔을 것입니다. 심지어 토온이 죽었다고 해도 저희는 그 몸속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러자 다른 영웅들도 일제히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렇습니다. 대규 대장군은 우리들의 생명의 은인입니다. 부디 화를 가라앉히고 그의 죄를 사하여 주십시오.”
“그게 아니라면 저희에게도 벌을 내려 주십시오.”
이제 토온의 배 속에서 나온 영웅들은 무릎을 꿇고 아테나 여신을 향해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여신은 당황했다.
‘이자들이 이렇게 고마워하다니.’
대규가 군법을 어긴 건 사실이지만 그가 세운 공적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녀는 어떤 판단을 내리는 것이 옳은 것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때 죽음의 평원 하늘이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다.
대규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뭐지? 또 다른 거인들이 쳐들어오고 있는 건가?’
전투 감각을 최대한 끌어올려 적의 사기(邪氣)를 감지하려고 했다.
평원의 중앙에서부터 강력한 기운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은 피비린내 혹은 악한 기운이 아니었다.
‘아니… 이건 그런 것 따위가 아니야.’
그보다 훨씬 강력하고 어마어마한 기운이었다.
곧 두려움과 공포가 대규의 온몸을 지배했다. 하지만 그런 느낌을 느끼는 건 대규뿐만이 아닌 듯했다.
다른 영웅들도 그랬고, 심지어 아테나 여신도 심상치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것은……!”
여신의 눈동자가 커졌다.
얼마 후 어두운 하늘에서 푸른 벼락이 내리치기 시작했다.
우르릉! 콰콰쾅!
신들의 아버지이자 왕인 제우스가 이곳으로 친히 강림한다는 신호였다.
아니나 다를까.
곧 거대한 제우스의 독수리가 날아와 여신의 발치에 착지했다. 독수리는 놀란 여신의 얼굴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곧 제우스 님께서 이곳으로 행차하실 겁니다. 다들 예를 갖춰 주십시오.”
“아버지가… 대체 왜……?”
아테나가 말을 다 끝마치지도 못했는데 그녀의 발치에 거대한 벼락이 떨어졌다.
콰콰쾅!
치이익-
벼락을 맞은 평원의 땅이 깊게 파였고, 검푸른 연기가 뭉게뭉게 솟아올랐다. 곧 연기 속에서 거대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을 본 영웅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큰절을 올렸다.
신들의 왕 제우스가 죽음의 평원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아테나 여신 역시 제우스 앞에서 깍듯하게 고개를 숙인 뒤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제우스시여…….”
제우스는 말없이 영웅들을 돌아봤다. 그리고 얼마 후 아테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는 판테온의 중앙 신전에서 아테나 그대와 그대의 부대가 행한 전투를 잘 지켜봤다. 아테나, 그대와 그대의 부대는 기가스 포르피리온의 비열한 술수에도 불구하고 아주 잘 싸워줬다. 하지만…….”
제우스는 매서운 눈빛으로 대규를 바라봤다.
대규는 그 눈빛을 보자마자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제우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황금빛 때문에 눈이 부실 지경이었지만 차마 그 앞에서 눈을 찌푸릴 수는 없었다.
제우스는 말을 이었다.
“…이 부대에는 상관에게 불복종하고 군법을 어긴 대장군이 있는 것 같군.”
그러자 아테나가 급하게 끼어들었다.
“아버지 시여, 그건…….”
“끼어들지 마라.”
제우스는 엄한 목소리로 아테나에게 말한 뒤 대규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대장끼리의 전투에 끼어든 것,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하고 제멋대로 행동한 것, 그리고 대장군이란 지위를 이용해 자신의 부하 병사에게 스킬을 무리하게 요구해 그 병사를 빈사 상태로 만든 것…….”
아무래도 부하 병사의 스킬을 무리하게 요구한 건 지영을 말하는 것 같았다.
‘제우스 신은 정말로 이 전투를 전부 다 지켜본 건가?’
대규는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이 고압적으로 지영에게 스킬을 요구하진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그녀가 무리한 스킬 시전 때문에 쓰러진 건 더할 나위 없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제우스가 앞에 말한 두 가지 죄 역시 모두 사실이었다.
제우스는 무서운 표정으로 대규를 쏘아봤다.
그의 눈빛을 보자 다시 한 번 두려움이 엄습했다. 아테나 여신에겐 어떤 처벌이든 달게 받겠다고 말했지만, 막상 제우스의 입으로, 그의 엄격한 목소리로 자신의 죄상을 낱낱이 들으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대장군은 고개를 들라.”
제우스의 말에 대규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뭐라고 변명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마치 당장에라도 자신에게 벼락을 내리칠 것만 같았다.
그때 아테나 여신이 끼어들며 이렇게 외쳤다.
“아버지시여! 이건 부하를 다스리지 못한 저의 잘못도 있습니다. 부디 그 대신 저를 벌하여 주십시오.”
‘지금 여신이 자신의 편을 들고 있는 건가?’
제우스가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대규의 죄를 질책하던 그녀였다.
그런데 제우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지어졌다.
‘내가 잘못 본 걸까?’
아니었다.
미소는 점점 선명해졌고, 제우스는 이제 호탕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대는 아군의 부대를 승리로 이끌었고, 그간 희생된 줄 알았던 수십 명의 판테온 영웅들을 구해 냈다! 그리고 그대가 없었다면 나의 딸 아테나도 기가스 포르피리온의 비열한 술수에 휘말려 고전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제우스가 말을 마치자마자 대규 주변에 긴장한 채 서 있던 영웅들은 와아아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제우스는 대규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대 말대로 먼저 규율을 어긴 것은 기가스 포르피리온이었다. 아테나를 도우러 가기 직전 그대가 말했던 말은 아주 인상 깊었다.”
“…예?”
“거인들이 단지 심성이 비열해서 규율을 어긴 것이라면 그대도 아군을 위해서 얼마든지 비열해지겠다고 한 말 말이다.”
자신을 말렸던 케이른에게 쏘아붙였던 말이었다.
그땐 몰랐는데 남의 입으로 들으니 상당히 낯부끄러운 대사가 아닐 수 없었다.
“승리는 항상 아름다운 가치들의 토대 위에서만 쟁취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때론 비열하고 이기적인 일도 벌여야 하는 법이지. 그대는 타고난 전략가이다.”
“…감사합니다.”
대규는 떨리는 목소리로 제우스에게 대답했다.
신들의 왕 제우스에게 이런 칭찬을 받다니,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그런 모습을 본 제우스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어쨌든 그대들이 이번 전투에서 승리해서 기분이 좋다. 기가스 포르피리온과 토온을 둘 다 쓰러뜨리다니.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우리 판테온은 전체 승리의 거점을 거머쥐게 됐다. 이 전투에 대한 보상은 내가 친히 내리도록 하마. 다들 아테나의 부대 주둔지로 이동하도록 하지.”
말을 마친 제우스는 손을 휘둘러 거대한 포탈을 열었다.
그리고 독수리와 함께 제일 먼저 포탈 속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페가수스를 탄 아테나 여신이 포탈로 향했다.
여신은 대규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대체 저자는 세미데우스에 불과하면서 어떻게 이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거지?’
신인 자신이 봐도 놀라울 지경이었다.
놀라움을 넘어서서 살짝 두려운 마음이 일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을 도와 싸워준 게 고맙기도 했다.
제우스의 말처럼 대규가 없었다면 그녀는 이 전투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 거인 녀석들에게 치명상을 입고 포로로 잡혀갔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포탈에 들어가기 직전 대규와 눈이 마주쳤다.
어느새 여신의 얼굴에 대규를 나무라는 기색은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복잡하고 미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규는 좀 전에 제우스 신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려 했던 여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죄를 범한 대규 대신 자신을 벌해 달라고 했던 그 모습을 떠올리며 여신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본 순간, 아테나 여신은 차갑게 고개를 홱 돌려 포탈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여신이 포탈 안으로 사라진 후 대규는 다른 영웅들을 보며 말했다.
“먼저들 가세요. 전 나중에 가겠습니다.”
하지만 대장군이 대규보다 감히 먼저 포탈에 들어가려는 영웅은 없었다.
그때 케이른이 다가와 자신의 말발굽이 달린 다리를 굽히며 이렇게 말했다.
“대장군, 이리로 올라타십시오.”
그러자 그의 켄타로우스족 친구 게니우스가 깜짝 놀라 외쳤다.
“케이른! 그게 지금 뭐 하는 짓인가! 누군가를 등에 태우다니, 천한 노새도 아니고!”
게니우스뿐만 아니라 다른 켄타로우스 족 영웅들 역시 케이른의 행동을 보고 입을 떡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본래 켄타로우스 족은 천성이 몹시 고고한 종족이다. 그들은 절대로 누군가를 자신의 등에 태우지 않았다.
대규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정중한 목소리로 거절했다.
“케이른, 괜찮습니다.”
하지만 케이른은 요지부동이었다.
“아닙니다. 빨리 타십시오. 이건 저의 의지입니다.”
그리고 다른 켄타로우스 족 영웅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이분은 우리 부대를 승리로 이끄신 대장군이다. 아까 제우스 님의 말을 듣지 못했어? 이분을 태우는 게 천한 노새가 되는 거라면 난 기꺼이 그렇게 하겠어. 대장군, 빨리 타십시오!”
대규는 그렇게 말하는 케이른에게 감동받았다.
그의 행동에서 진실된 충성심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고마워요, 케이른.”
그는 결국 케이른의 등에 올라탔다.
이 이상 거절하는 것도 그의 성의를 무시하는 행동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근육이 잘 발달된 케이른의 몸은 단단하면서도 안정적이었다.
안장이 없어도 살이 쓸리거나 하지 않았다.
대규의 고맙다는 말에 케이른은 발굽을 자랑스럽게 딱딱거리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 모든 게 다 대장군 덕분인데요. 참고로 제 등에 탄 건 대장이 최초입니다. 제 애인 실비아도 태운 적이 없습니다.”
‘케이른의 등의 순결을 자신이 최초로 빼앗은 게 돼 버리는 건가?’
이렇게 생각하니까 기분이 좀 이상했다.
말을 마친 케이른은 포탈 안으로 들어갔다.
아테나 부대 주둔지에선 승리의 축하연이 거하게 열리고 있었다.
산양 병사들은 춤을 추고 풍악을 울렸다.
주둔지의 이곳저곳에서 맛있는 음식들과 함께 주연(酒宴)이 벌어지고 있었다. 파견 나온 아레스 부대의 영웅들 역시 신나서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한편 요새의 막사에 있었던 오크 대장 가로쉬와 지영도 깨어나 주둔지에 무사히 도착했다.
전투에 참여했던 모든 영웅은 지휘사령부의 천막으로 들어갔다.
그곳의 왕좌엔 아테나 여신 대신 신들의 왕 제우스가 앉아 있었다.
아테나 여신은 그 앞에 황금 갑옷을 입고 서 있었다.
제우스가 영웅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럼 이번 전투의 공적에 대해 보상을 하도록 하겠다.”
제우스는 제일 먼저 아테나 여신을 불렀다.
“아테나여, 이번에도 수고가 많았다. 아까도 말했지만, 이번 전투에서의 승리로 인해 판테온은 거인들로부터 승리의 거점을 취하게 됐다. 이 전투는 이미 기록의 신전에 기록됐다. 후대 판테온의 신들은 이 전투를 ‘검붉은 평원 전투’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기록의 신전에 기록될 전투면 확실히 대단할 것 같았다.
검붉은 평원 전투가 된 이유는 아테나 여신이 기가스 포르피리온을 죽였을 때 그가 흘린 피가 죽음의 평원 바닥을 검붉은색으로 물들였기 때문이다.
아테나 여신은 제우스를 향해 고개를 숙인 뒤 이렇게 대답했다.
“황송하옵니다.”
“아니다. 이건 내가 그대에게 내리는 보상이다.”
그러자 아테나 여신의 눈앞에 백색의 상자가 생겨났다.
그건 전에 여신이 보상으로 받았던 상자와 동일했다. 그리고 아레스를 구하러 갔던 전투에서 승리한 아프로디테 여신이 받았던 상자와도 똑같았다.
아테나 여신은 상자를 공손하게 받았다. 그리고 옆의 정령에게 그 상자를 잘 보관해 두라고 지시했다.
정령은 백색 상자을 받아 든 뒤 천막 입구를 향해 쪼르르 나가 버렸다.
‘대체 저 상자 안에는 뭐가 들었을까?’
대규는 정령이 들고 있는 상자를 열심히 눈으로 좇았다.
공략집의 아이템 정보창이 뜨길 바랐다.
하지만 뜬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본 아이템은 신의 육체를 얻은 자만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본 아이템에 대한 설명을 열람하려면 우선 신의 육체를 얻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