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
157화 포르피리온의 재습격 (7)
“크으으… 이 빌어먹을 계집! 으으…….”
기가스 포르피리온은 이를 악물고 자신의 어깨를 뚫은 여신의 창날을 반대편 손으로 붙잡았다.
“크아악!”
그리고 완력을 발휘해 아테나 여신의 창을 뽑아 버렸다.
하지만 여신은 다시 창으로 공격해 왔다. 그녀의 얼굴엔 그 어떤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감정이 사라진 그녀의 얼굴은 오히려 인상을 쓰거나 화가 났을 때보다 훨씬 무서웠다.
기가스 포르피리온은 그 모습을 보며 한발 후퇴했다.
물론 어깨에 입은 부상은 치명상이 아니라 죽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에게 확실히 밀리고 있었다.
‘크으… 자존심 상하지만, 어쩔 수 없군! 나도 이번 전투에선 무조건 이겨야 한다. 어떤 짓을 저질러서라도!’
그는 비열한 숨소리를 내며 눈을 감고 다른 동료들에게 전언을 보내기 시작했다.
“저게 뭡니까?”
오우거 영웅이 하늘 저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멀리서 가고일 두 마리가 날아오고 있는 게 보였다.
그 위에 타고 있는 건 거인들 같았다. 하지만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잘 보이진 않았다.
두 마리의 가고일은 아테나 여신과 기가스 포르피리온이 싸우고 있는 곳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대규가 놀라서 외쳤다.
“지금 저게 무슨 상황입니까!” 원래 대장끼리의 전투의 룰은 일대일이고, 그 전투에 누군가가 끼어드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는 것 아니었습니까?”
케이른이 말한다.
“워, 원칙적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건…….”
두 명의 거인은 기가스 포르피리온을 도와 여신을 몰아세우며 공격하기 시작했다.
‘비열한 자식들!’
대규는 헤르메스의 장화를 이용해 하늘 높이 날아오르려 했다.
그러자 케이른이 말렸다.
“대장군! 영웅은 저 전투에 끼어들 수 없습니다! 영웅의 몸으론 상대도 되지 않을뿐더러 저 전투에 끼어들면 규율을 어겼다고 해서 판테온의 신들에게 엄중한 처벌을 받을 겁니다.”
그 말에 대규는 어이없다는 듯 외쳤다.
“그런 멍청이 같은 규율이 어디 있습니까? 그럼 저 거인 대장들의 행동은 뭡니까? 단순히 저들이 비열해서 그렇다고 하면 그에 대한 답이 되는 겁니까?”
“그, 그건…….”
“그럼 저도 아군을 위해서 얼마든지 비열해지겠습니다. 말리지 마세요.”
대규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우리 역시 전투에서 이기기 위해 열심히 싸웠습니다. 지영 씨와 가로쉬 장군은 그로 인해 부상을 입었고요. 그런데도 그깟 규율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애초 규율을 어긴 건 저자들입니다. 나는 여신을 도와 저들을 해치우겠습니다.”
한편 요새의 막사로 옮겨진 지영은 서서히 눈을 떴다.
정신을 차려 보니 자신은 막사 안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자신은 분명 대규가 크툴루를 해치우는 건 본 뒤 온몸에 힘이 빠져 검은 불바다로 추락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몸에는 붉은 이불이 덮여 있었다.
정확히는 이불이 아니라 붉은 천이었다.
“그르릉…….”
옆에서 들리는 이상한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오크 대장군 가로쉬가 세상 편한 표정으로 잠을 자고 있었다. 심지어 드르륵 이빨까지 갈고 있었다.
그의 몸을 본 지영은 깜짝 놀랐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에 군데군데 뼈가 보일 정도로 살갗이 녹아내려 있었다.
본래 몸의 상처 따윈 신경 안 쓰는 가로쉬지만, 그녀가 여태 봤던 그의 부상 중에서도 그 정도가 너무 심했다.
그제야 지영은 자신이 덮고 있는 붉은 천이 가로쉬의 갑옷에 달린 망토라는 걸 깨달았다.
‘날 구해 준 게 가로쉬 장군이었구나.’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자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고맙기도 했다.
지영이 손을 들어 그의 털투성이 이마를 쓰다듬으려고 하는 찰나,
‘이래도 되는 걸까? 그는 다른 부대의 영웅이다.’
전쟁이라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 사사로운 감정에 휩쓸리는 건 영웅으로서 할 짓이 못 됐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전쟁에서 뿐만이 아니다. 그녀가 속한 현실에서도 그랬다.
현실에서도 사사로운 감정에 휩쓸리면 항상 중요한 일을 그르치게 된다.
그녀가 가로쉬의 이마로 뻗은 손을 거두려는데 갑자기 요새의 막사 문이 열렸다.
그곳에는 대규와 케이른이 서 있었다.
“대, 대규 장군님?”
지영이 바라보자 대규는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영 씨,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염치 불고해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꼭 좀 들어주십시오.”
“예? 그게 무슨…….”
대규는 지영에게 다가가 말했다.
“저에게 다시 한 번 전쟁의 축복 스킬을 걸어 주십시오.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말을 마친 대규는 그녀 앞에서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본 주변 영웅들이 깜짝 놀랐다.
대장군이 부하 영웅에게 고개를 숙이는 건 군법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대규도 그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마나가 다 떨어져서 힘을 잃고 쓰러진 그녀에게 이 부탁은 무리한 것일지도 몰랐다.
아무리 자신이 그녀의 윗사람이라도 그런 무리한 부탁을 당연하다는 듯 하고 싶진 않았다.
“아테나 여신께서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녀에게 달려든 기간테스 대장 녀석들을 해치워야 합니다.”
지영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제 마나는 지금…….”
“여기 있는 케이른이 상급 마나 회복 포션을 드릴 겁니다. 그럼 가능하겠습니까? 꼭 좀 부탁드립니다.”
“…알겠어요.”
결국 지영은 비장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케이른 역시 결국 대규에게 설득되고 말았다. 전쟁의 규율이 중요하기도 했지만, 대규의 말대로 이번 전쟁에서 지게 되면 그 규율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케이른은 자신의 보관함에서 포션을 하나 꺼내 지영에게 건넸다.
그런데 그건 상급 마나 회복 포션과 좀 다르게 생겼다.
지영이 포션을 받아 들고 물었다.
“케이른 장군님, 이거 마나 회복 포션 맞습니까?”
그러자 케이른은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흠흠, 이건 단순한 마나 회복 포션이 아니다. 우리 켄타로우스족 사이에서만 전해져 내려오는 영약 엘릭서(Elixir)다.”
대규 역시 케이른이 건넨 신비한 포션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영약 엘릭서(Elixir)]
[전설의 현자가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영약. 복용하는 것만으로도 생명력과 마나가 완벽하게 풀로 차오른다.]
엄청 귀한 영약이군.
“마나 회복력 포션만으로도 괜찮습니다.”
지영이 거절하자 케이른이 크게 꾸짖으며 이렇게 말했다.
“어림없는 소리! 전쟁의 축복 스킬은 그 자체가 높은 등급의 스킬이다. 마나 소모량도 엄청나지만, 인간의 신체로 단기간에 계속 시전하게 되면 너의 신체는 서서히 망가질 것이다. 오늘도 벌써 두 번이나 사용하지 않았느냐. 그래서 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부작용이 생긴 것이다.”
지영은 그 말을 잠자코 듣기만 했다.
생각해 보면 대규 역시 인간의 몸일 때 저토록 마나 소모량이 높은 스킬은 사용해 본 적이 없었다.
“네가 빨리 세미데우스의 육체를 얻지 않으면 스킬의 부작용은 서서히 너를 망가뜨릴 것이다. 하지만 이 영약을 복용하면 그 부작용을 조금이나마 막을 수 있지.”
결국 지영은 그가 건넨 영약 엘릭서를 한 모금 마셨다.
마시자마자 그녀의 몸에서 레벨 업을 한 것처럼 하얀빛이 강렬하게 뿜어져 나왔다.
온몸에 활력이 돌기 시작했다.
그녀는 대규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리 오십시오, 장군.”
대규가 다가가자 그의 어깨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곧 순식간에 뜨거운 열기가 어깨로 전해졌다. 크툴루를 무찌르러 가기 전에 느꼈던 기분과 동일했다.
“다 됐습니다. 지속 시간은 10분이니 빨리 가서 싸워 주세요.”
“고맙습니다, 지영 씨.”
대규는 꾸벅 인사를 하고 요새 막사 밖으로 나갔다.
하늘로 날아올라 가기 전 케이른과 영웅들에게 이렇게 말해 놨다.
“제가 녀석들을 공격해 추락시키면 여러분은 아래에서 공격을 사정없이 퍼부어 주세요. 광역 공격이 닿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대규는 기간테스들과 여신이 있는 곳으로 날아올랐다.
한편 지영은 대규가 나간 막사의 입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도 같이 싸우고 싶다.’
하지만 스킬을 시전하자 그녀의 몸은 무거워졌다.
엘릭서를 복용했지만, 하루에 세 번이나 전쟁의 축복을 사용한 탓인지, 그녀의 몸에 무리가 오기 시작한 것이다.
‘대규 장군님이 제발 이기기를…….’
그녀는 손을 맞잡고 기도를 올렸다.
그때 그르르, 하며 가로쉬가 다시 이빨을 갈았다.
그 소리에 그녀는 가로쉬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가까이서 찬찬히 그의 얼굴을 살펴보니 평소에 봤던 것보다 더욱 흉측해 보였다.
얼굴에는 털들이 수북이 자라났고, 송곳니는 투박하며 날카로웠다.
하지만 그의 얼굴을 보자 희미한 미소가 지어졌다.
‘정말 단순 무식한 남자다.’
하지만 그의 단순 무식함 때문에 자신은 목숨을 건졌다.
지영은 케이른이 건넨 엘릭서 병을 들었다. 병에는 아직 영약이 조금 남아 있었다.
그녀는 오른손으로 가로쉬의 입을 벌렸다.
큼직한 송곳니가 위로 들렸고, 벌어진 입의 틈 사이로 남은 엘릭서를 들이부었다.
‘어쨌든 나를 구해 줬잖아. 그럼 보답을 해야지.’
딱히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이러는 것은 아니다.
영약이 입안으로 흘러들어 가자마자 가로쉬의 몸에서 하얀빛이 뿜어져 나왔다.
상처가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지만, 그는 세상모른 채 깊은 잠에 빠져들어 있었다.
좋은 꿈이라도 꾸고 있는지 그의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었다.
한편 아테나 여신은 맹렬하게 기가스 포르피리온을 창으로 공격하고 있었다.
그녀는 오직 창으로 표적을 공격하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표적이 늘어났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그녀의 집중이 깨져 버렸다.
기가스 포르피리온은 그녀의 표정 변화를 감지했다.
“크크크, 당황했나 보군.”
어느새 가고일을 타고 날아온 다른 두 명의 거인이 여신의 눈에 보였다.
다른 거인 대장들인 미마스(Mimas)와 토온(Thon)이었다.
미마스는 홀쭉하고 멸치같이 빼빼 마른 거인이었지만, 그의 마른 몸은 단단한 근육들로 이뤄져 있었다.
반면 토온은 비대한 몸집을 지닌 거인이었다. 핑크빛의 후덕한 몸집에 이마엔 더듬이 같은 게 나 있었다.
사악하게 생긴 다른 거인 대장들과 달리 능글맞고 후덕한 인상이지만, 녀석이 무서운 위력을 지니고 있다는 걸 아테나 여신은 잘 알고 있었다.
“이 비열한 자식! 다른 거인들을 끌어들였구나.”
그러자 기가스 포르피리온은 호기롭게 웃으며 말했다.
“전쟁에서 비열한 게 어디 있겠는가! 이기는 게 전부다. 크하하!”
이제 그들은 셋이서 한꺼번에 여신을 공격해 오기 시작했다.
여신은 머릿속의 잡념을 없애고 다시 한 번 플로우 창법을 쓰려 했다.
하지만 3 대 1의 싸움이라 너무 불리했다.
적들이 쉴 새 없이 공격해 오니 창을 휘두르기는커녕 방패로 막아 내기에 급급했다.
그럴수록 잡념이 머릿속으로 들어왔고, 창법은 힘을 잃어버렸다.
“비열한 자식들!”
아테나가 악에 받친 목소리로 외치자 기가스 포르피리온이 말했다.
“흐흐! 난 네년이 그렇게 화를 낼 때마다 기분이 좋더라고.”
마침 거인 미마스와 토온이 한꺼번에 그녀의 코앞까지 달려들었다.
그들의 공격을 피하기엔 너무 늦었다.
그 순간,
“레툼 익투스!”
대규의 목소리가 들렸다.
“크윽!”
그들은 신음을 내지른 뒤 자신을 공격한 녀석을 보려고 고개를 뒤로 돌렸다.
믿을 수 없게도 엄청나게 작은 영웅 한 명이 공중에 떠 있었다.
그들 거인대장 기간테스들은 몸집이 보통 영웅보다 몇십 배는 컸다. 따라서 그들에게 대규는 거의 파리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이익! 영웅 자식이 감히…….”
그런데 영웅이 한 거라곤 믿기지 않는 공격이었다.
보통의 영웅이라면 그들에게 티끌만큼의 상처도 입히지 못했다.
거대해진 아테나 여신 역시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대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대규의 능력으론 이 기간테스들을 절대 이 정도로 공격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