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
156화 포르피리온의 재습격 (6)
가로쉬가 평소 걸치고 있는 갑옷의 등 뒤에 달린 붉은 망토가 지영의 몸에 둘둘 말려 있었다.
그의 몸이 완전히 만신창이가 된 반면 망토 속의 지영은 멀쩡했다. 살갗이 살짝 붉게 달아오르고 그을린 자국이 있지만 가로쉬 정도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저 망토는 악마의 화염을 어느 정도 막아 낼 수 있는 마력 저항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가로쉬가 그렇게 공격을 받아 내고도 버틸 수 있었던 건가.’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망토를 지영에게 내준 탓에 그의 몸은 완벽하게 부상투성이였다.
저렇게 걸어오고 있는 것조차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는 괴로움을 꾹 참으며 우렁찬 목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빨리 지영 자매를 치료하도록 하라!”
당신이 먼저 치료받아야 할 것 같은데.
“가로쉬 대장님!”
가로쉬의 모습에 놀란 고블린, 오우거 영웅들이 재빨리 뛰쳐나갔다.
“나는 괜찮다! 빨리 지영 자매를 먼저 치료하도록 하라니까아…….”
가로쉬는 말을 잇지 못하고 쓰러졌다.
쿵!
대규는 아레스 부대의 영웅들에게 말했다.
“빨리 요새로 둘을 옮겨 가십시오.”
아레스 부대 영웅들은 그들을 요새의 막사로 옮겨 갔다.
대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들을 지켜보는 데 케이른이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가로쉬 대장이 괴수 군단의 반 이상을 홀로 처리했습니다. 저분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분명 고전을 면치 못했을 겁니다.”
‘그랬구나.’
대규는 아테나 여신이 가로쉬의 공적을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타 부대의 대장군임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싸워 줬다.
아레스 부대의 영웅들에게 실려 가면서도 가로쉬는 안고 있는 지영의 몸을 절대 놓지 않았다.
솔직히 처음에는 계속 지영에게 눈치 없이 들이대기만 해서 그가 좀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저번 전투에서 지영의 공격을 대신 막을 것도 그렇고, 이번에 지영을 구해 준 것도 그렇고, 지영을 향한 그의 마음은 진심인 것 같았다.
‘대단하다. 나 같으면 그렇게 일방적으로 꾸준히 호의를 보이지 못할 텐데. 이게 바로 인간과 오크의 종족 차이일까?’
아마 아닐 것이다.
모든 오크가 저렇진 않을 것이다. 가로쉬니까 할 수 있는 거겠지.
‘존경스러울 정도로군.’
대규는 이제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테나 여신은 아직도 기가스 포르피리온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호각인 듯싶었지만 여신 쪽이 좀 더 우세한 것 같았다.
대규는 그 모습을 보며 케이른에게 물었다.
“케이른, 우리는 이제 이렇게 여신이 전투를 끝내길 기다리고 있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장군. 저들의 싸움에 우리 영웅들이 끼어드는 건 전투의 규율을 어기는 것이니까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분명 여신께서 승리를 쟁취해 오실 겁니다.”
물론 그럴 것이다.
하지만 왜 이렇게 불길한 느낌이 드는 걸까.
아마도 기가스 포르피리온이 몹시 비열한 녀석이라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녀석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선 무슨 짓도 할 녀석이었다. 승리를 위해 거인들의 지옥에서 저 괴수 외계 종족들을 끌어들인 것만 봐도 그랬다.
불안한 마음을 좀처럼 감출 수 없었다.
“대규 장군, 그런데 좀 이상합니다.”
아테나 부대의 영웅들 사이에 서 있던 한 오우거 영웅이 앞으로 나서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뭐가 이상하다는 겁니까?”
대규가 묻자 그는 납작하게 생긴 들창코를 킁킁거리며 말했다.
“죽음의 평원에 심상치 않은 기운이 몰려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몹시 진한 피비린내가 북풍을 타고 오고 있습니다.”
“피비린내라구요?”
본래 오우거들은 다른 종족들에 비해 후각이 뛰어나다고 들었다.
대규는 그 말을 듣자마자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자신의 전투 감각을 최대한 끌어 올렸다. 오감의 감각 중 후각을 극대화시킨 뒤 평원의 냄새를 맡아 봤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바람에 실려 온 미세한 피비린내가 대규의 코끝에 느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피비린내는 점점 진해지고 있었다.
한편 기가스 포르피리온과 아테나는 허공에서 맹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기가스 포르피리온은 검을 휘두르며 비열한 웃음을 흘렸다.
“크흐흐… 너에게 복수하기 위해 오늘만을 기다렸다.”
그러자 아테나 여신은 코웃음을 치며 그의 검을 막아 낸 뒤 이렇게 말했다.
“이런, 너의 복수는 실패할 것이다. 아래를 내려다보시지.”
기가스 포르피리온은 아래쪽을 봤다.
“……!”
그의 눈동자가 커졌다.
어느새 거인의 지옥 카르케르에서 데려온 크툴루와 괴수 군단은 검은 불바다에 휩싸여 불타고 있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크윽, 쓸모없는 자식들!”
기가스 포르피리온은 그 광경을 보자 머리의 피가 거꾸로 솟구칠 지경이었다.
“어렵게 카르케르에서 꺼내 왔건만, 저깟 영웅 자식들에게 죽임을 당해?”
아테나 여신은 기가스 포르피리온이 평원의 불바다에 눈길이 가 있는 틈을 타 그의 옆구리를 노리고 창을 찔렀다.
“크윽!”
기가스 포르피리온은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창을 피했다. 하지만 창끝에 그의 얼굴이 살짝 스쳤다.
여신은 창을 다시 한 번 잡고 전투태세를 취하며 경멸스러운 목소리로 툭 내뱉었다.
“기가스 포르피리온, 그대는 정말로 비열하다. 설마설마했는데 카르케르에서 괴수들을 데려올 줄이야. 카르케르에 갇혀 있는 괴수들은 예전에 그대들의 거인 세계를 무너뜨리려고 했던 고대 외계인들 아니었는가.”
챙!
여신은 다시 창을 휘둘렀고, 포르피리온은 이를 악문 채 그녀의 공격을 막았다.
그의 방패는 그가 쓰고 있는 투구처럼 새까만 색이었다.
하지만 아테나의 경멸에 찬 일갈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비열한 웃음을 띠며 말했다.
“그게 뭐가 중요한가? 이 유도리 없는 계집아,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승리하는 것이다! 명색이 전쟁의 여신이면서 뭣이 중헌지도 모르는가? 크하하!”
“정말이지, 너는 거인 대장으로서 최소한의 명예도 없는 놈이구나.”
여신이 혐오스럽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자 기가스 포르피리온은 그 틈을 타 칼로 아테나의 어깨를 노리며 말했다.
“너의 잘난 아버지 신 제우스도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적으로 사로잡았던 우리 거인 형제를 1차 기간토마키아 당시 병사로 내보냈었다! 네년의 말에 따르면, 너희 아버지 신 제우스 역시 최소한의 명예도 없는 불한당 같은 녀석이구나, 하하하!”
그러자 아테나는 눈을 부릅뜨며 일갈했다.
“감히 아버지 신을! 제우스 님을 모욕하지 마라!”
기가스 포르피리온이 제우스의 욕을 하자마자 항상 차가웠던 그녀의 눈동자에 시뻘건 적의가 깃들었다.
그 모습을 본 기가스 포르피리온은 속으로 씩 웃었다.
‘저 차분한 아테나 계집은 감정에 동요가 일어나야 빈틈이 생긴다. 도발이 먹혔군!’
아테나에게 아버지 제우스 신은 단순한 아버지가 아니라 그녀 인생을 다 바쳐 존경하는 롤 모델이었다.
‘저 자존심 강한 계집은 제우스를 욕하면 이성을 잃게 되지. 게다가 분노를 더욱 주체하지 못하고 저렇게 날뛰는 이유는… 바로 내가 말한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하하!’
사실 포르피리온이 제우스에 대해 한 말은 사실이었다.
아테나 역시 제우스 신이 1차 기간토마키아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적이었던 거인 병사 몇몇을 회유해 아군으로 만들어 싸웠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오로지 판테온의 승리를 위해서였다.
더욱 큰 차원에서 보면 거인 녀석들의 승리는 판테온, 그리고 이 전체 세계를 위협하는 커다란 악(惡)의 승리였다.
제우스, 즉 그녀의 아버지는 그 악을 제거하고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피치 못하게 그런 방법을 쓴 것이었다.
그녀는 이렇게 생각하며 이를 악물고 속으로 외쳤다.
‘저 비열한 거인 녀석과 나의 아버지 신 제우스는 다르다!’
그러자 기가스 포르피리온은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이렇게 말했다.
“네년은 지금 너의 위대하신 아버지 제우스와 나 같은 거인 대장은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군.”
“당연한 거 아니냐! 이 악당 녀석아!”
“과연 그럴까? 크흐흐…….”
휘릭-
기가스 포르피리온은 맹렬하게 칼을 휘두르며 여신의 몸 쪽으로 파고들었고, 여신은 페가수스의 고삐를 재빨리 잡아당겨 그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하지만 그녀의 황금 갑옷에 작은 흠집이 생기고 말았다.
“크윽…….”
자신을 약 올리듯 도발하는 기가스 포르피리온을 도저히 봐줄 수 없었다.
여신은 어깨에 있는 아이기스의 방패를 떼서 높게 쳐들었다.
“또다시 통구이로 만들어 주마!”
곧 사방이 어두워지며 먹구름이 끼었고, 제우스의 벼락이 구름 쪽으로 몰려왔다.
우르릉- 쾅쾅!
하지만 지난번과 달리 기가스 포르피리온의 얼굴은 몹시 여유로웠다.
“멍청한 계집! 내가 또 당할 것 같으냐!”
벼락은 그의 머리 위로 정확히 떨어졌다.
그 순간 그가 쓰고 있는 검은 투구에서 빛이 나면서 투명한 막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벼락은 그 막을 뚫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네년이 부르는 그 벼락, 제우스의 벼락이라지만 진짜 제우스가 내리는 벼락에 비하면 그 파워가 아주 약한 열화판에 가깝지. 이 투구는 그 정도의 가짜 벼락은 막아 낼 정도로 단단한 것이다. 크크크!”
기가스 포르피리온은 당황하는 아테나 여신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을 이었다.
“네년은 제우스의 벼락이 없으면 고작 이 비열한 거인 대장 하나도 이기지 못하는구나. 아버지가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어린 딸내미에 불과하군! 크하하!”
“우, 웃기지 마라!”
여신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기가스 포르피리온은 계속해서 여신을 도발했다.
‘더 이상은 안 된다. 녀석의 도발에 말려들면 안 된다.’
여신은 마음을 가다듬고 찌푸렸던 인상을 풀기 시작했다.
녀석에게 화를 내고 분노를 보일수록 자신이 약하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었다.
그녀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생각했다.
‘나는 강한 여신이다! 아버지 제우스 신의 도움 없이도 저깟 거인 자식쯤은 무찌를 수 있는!’
그 순간 평온함이 그녀 내부에 찾아왔다.
그녀는 창을 들고 휘두르기 시작했다.
아까와는 사뭇 달라진 그녀의 태도에 기가스 포르피리온은 당황했다.
“이 못난이 계집아! 어디 한번 덤벼 봐라! 하하!”
그는 일부러 그녀를 향해 큰 목소리로 도발했다.
하지만 여신은 좀 전과 달리 그의 도발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휘릭-
그녀는 기가스 포르피리온을 향해 창을 휘둘렀다.
창을 휘두르는 동작은 전혀 화려하지 않았다. 모든 동작이 절제돼 있고 몹시 단순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빠르고 정확하게 적의 급소만을 노리고 있었다.
기가스 포르피리온이 방패로 막기도 전에 여신의 창은 그의 명치를 노리고 날아갔다.
그는 재빨리 가고일의 고삐를 잡아당겨 위로 날아갔다.
덕분에 창은 그의 명치 대신 가고일의 눈동자를 찔렀다.
“키에엑!”
눈에 창날을 맞은 가고일이 괴성을 질러 댔다.
어느새 그녀의 창은 다시 기가스 포르피리온의 명치를 노리고 들어왔다.
‘뭐 저런 게 다 있어?’
방패를 들던 기가스 포르피리온은 아테나 여신의 눈동자를 보고 온몸이 굳어졌다.
그녀의 눈빛은 그전과 달랐다.
차갑다 못해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것이 꼭 로봇 같았다.
오직 목표물을 향해 정확히 창을 휘두를 뿐인 로봇 말이다.
실제로 여신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오직 창만 휘두르고 있을 뿐이었다.
잡념과 지독한 자아를 버리고 자신과 창이 일체(一體)가 되는 경지!
그것이 바로 그녀의 창술 스킬 ‘플로우(Flow) 창법’이었다.
플로우(Flow)란 완전한 몰입으로 무언가에 흠뻑 빠져 있는 심리적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그녀는 초고도로 집중해 창을 휘두르는 일에 심취한 무아지경의 상태에 다다랐다.
주위의 모든 잡념과 방해물을 차단하고 자신의 원하는 목표를 겨냥하는 데만 온 정신을 집중한다.
플로우 창술을 시전하면서 그녀의 전투 감각은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존재조차 잊고 있었다.
제우스의 딸이자 전쟁의 여신 아테나라는 자각, 평소 지녔던 자존심이 사라지자 오롯이 이 세상엔 창날과 그녀만 남았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창을 휘둘렀다.
휘릭-
창이 그녀고, 그녀가 곧 창이었다.
자신이 저 뾰족한 창날이 되어 포르피리온의 어깨를 향해 정확히 날아가고 있었다.
곧 그녀가 기가스 포르피리온의 어깨를 꿰뚫었다.
“크허어억……!”
갑옷을 뚫고 걸쭉한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