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
138화 알로아다이 형제 (1)
“이 쥐새끼 같은 영웅 녀석!”
오리온은 이렇게 외치며 철퇴를 집어넣은 뒤 대규에게 달려들었다.
빠르다.
거대한 주먹이 대규의 얼굴을 스쳤다.
휘릭.
스친 공기가 칼날이 되어 뺨을 가르는 것 같았다.
‘이럴 때가 아니지!’
대규는 갑옷의 분신 옵션을 발동시켰다. 순식간에 분신이 생겨났다.
“저게 뭐냐?!”
오크들이 분신을 보고 놀라서 외쳤다. 그들은 피를 줄줄 흘리며 서로 떠들어 댔다.
“형제! 저자가 두 명이 됐다. 누가 진짜지?”
“난 왼쪽 녀석이 진짜라는 데 1,000제르를 걸겠다.”
“쩨쩨하게 1,000제르가 뭐냐! 난 오른쪽에 5,000제르를 걸겠다.”
지금 그런 내기를 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
대규는 저들이 저런 기력이 있으면 피가 철철 흐르는 상처나 먼저 치료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리온 역시 대규와 분신을 보자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 둘 중 하나에게 달려들었다.
바로 본체인 대규였다.
‘잘 찍었군. 하지만 소용없지.’
대규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거대한 오리온을 가만히 바라만 봤다.
스스륵-
투명화 옵션이 발동돼 그의 모습은 사라졌다.
그러자 오크 형제들은 다시 한 번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나가 사라졌다! 형제, 우리가 헛것을 본 것인가?”
오리온은 결국 사라지지 않은 나머지, 대규의 분신을 향해 달려들며 외쳤다.
“죽어라!”
거대한 주먹이 분신의 명치를 정확히 강타했고, 분신이 몸은 허공을 그리며 힘없이 날아갔다.
‘그럴 만하지. 분신은 내 능력의 절반만 지니고 있으니…….’
절반의 능력이어도 정예군 거인은 그럭저럭 버텨 냈지만 거인 사냥꾼 오리온에겐 턱도 없는 것 같았다.
날아가는 분신의 모습을 보며 오크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어? 저자가 저렇게 약할 리가 없는데…….”
“당연하지.”
어느새 대규는 오리온의 등 뒤로 가서 사슬검의 손잡이로 그의 굵은 목덜미를 후려쳤다.
퍽!
급소를 맞은 오리온이 신음을 내며 주춤거리고 있었다.
“으으!”
이때다.
대규의 양손에서 거미줄이 수없이 뿜어져 나왔다.
‘더 이상 공격할 필요는 없지. 여신은 생포만 해오면 된다고 했으니까.’
거미줄들은 오리온의 그 거대한 몸뚱이를 순식간에 감아 버렸다.
스르륵-
오리온은 팔을 들어 자신의 몸을 포박하고 있는 거미줄을 잡아 뜯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거미줄들은 점점 그를 옥죄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아프로디테 여신이 놀라서 외쳤다.
“그건 아라크네의 거미줄 아닌가?”
거미줄은 점점 더 오리온을 옥죄었고, 어느새 그는 거대한 고치로 변해 가고 있었다.
대규는 새삼 거미줄의 위력에 놀랐다.
거미줄은 저런 거인도 꼼짝 못 하게 만들 만큼 끈끈하고 단단했다.
아테나 여신이 아라크네를 그토록 싫어했으면서도 이 거미줄을 채취하고 싶어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거대한 누에고치가 돼 버린 오리온은 하늘에서 땅바닥으로 추락해 버렸다.
쿵!
천지가 거대하게 울렸고, 고치가 떨어진 땅 주변에 금이 갔다.
어느새 아프로디테 여신은 몸을 작게 줄여 땅에 놓인 고치를 향해 달려갔다. 고치는 이제 작아진 그녀의 몸집의 약 10배는 돼 보였다.
그녀는 뾰족하게 잘 다듬어진 자신의 손톱으로 고치의 가장자리를 살짝 뜯어 흠집을 냈다.
그 모습을 본 대규가 물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숨은 쉬게 해 줘야 할 것 아니냐. 호호.”
표정을 보아하니 어지간히 저 잘생긴 오리온에게 마음을 뺏긴 듯싶었다.
아프로디테는 매혹적인 표정으로 거대한 고치를 손끝으로 살살 애무하듯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대는 여태까지 내가 가져본 전리품 중 최고의 전리품이다. 호호.”
여신은 고개를 돌려 대규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주 잘했다. 전투가 끝나고 부대로 돌아가면 너에게 큰 상을 내리도록 하겠다. 그런데 의외로구나. 냉정한 아테나가 너에게 그 귀한 거미줄을 주다니…….”
여신은 눈을 가늘게 뜨며 대규의 얼굴을 샅샅이 훑으며 말을 이었다.
“하긴, 저번에 승전 기원 파티에서 네가 영웅 중 가장 먼저 저승을 통과했을 때도 아테나는 몹시 기뻐했었지. 그녀는 너를 꽤 총애하나 보구나. 그 목석같은 아테나가! 호호!”
곧 여신은 모여 있는 영웅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그럼 영웅들이여! 나머지 거인 정예군들을 싹 쓸어버려라!”
오리온이 고치가 되어 버리자 사실상 정예군 거인들은 기가 죽은 상태였다.
이에 아군의 영웅들은 더욱 힘을 얻어 맹렬하게 싸워 나가기 시작했다.
대규는 가장 선봉에 서서 정예군 거인들이 우글우글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녀석들이 마법이 담긴 무기를 들고 공격해 왔지만 일일이 막아 쳐낼 필요는 없었다.
아이템들, 특히 황금 눈물 갑옷으로 높아진 마법 저항력이면 녀석들의 공격을 모조리 막기보단 몇 대 맞아 주면서 스킬을 발휘하는 게 더 유리했다.
게다가 이 갑옷과 왼팔의 네메시스 방패는 반사 데미지까지 갖추고 있으니 녀석들은 대규를 공격하는 것만으로도 데미지를 입게 된다.
대규는 정예군들의 공격을 온몸으로 받으며 불카누스의 사슬검을 길게 휘둘렀다.
휘리릭-
화르륵-
검신에서 사납게 일어난 불꽃이 정예군들을 잡아먹었다.
“끄으으…….”
대규의 모습을 본 우르크와 가로쉬는 감탄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형제! 저걸 봐라. 저자는 우리처럼 적들의 공격을 두려워하지 않는군. 역시 진정한 영웅이다.”
“역시 최고의 영웅 칭호를 받은 자답군! 우리도 적의 공격에 개의치 말고 열심히 싸우자!”
공격을 두려워하지 않는 게 아니라 이 뛰어난 갑옷이 다 막아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크들은 자기 좋을 대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뭐, 그렇게 생각하게 내버려 두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어느새 남아 있던 거인 정예군들은 다 박살이 났다. 아군의 손실은 거의 없었다. 대신 영웅 중에선 부상을 입은 자들이 있었다.
대부분 아레스 부대의 영웅들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오히려 본인들은 부상을 입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크게 기뻐하는 것 같았다. 케이른의 말에 따르면, 아레스 신 부대 영웅들은 큰 부상을 입을수록 자신이 전투에 참여해 공을 세웠다고 생각한단다.
“그럼 이제 우리는 저 암석 안으로 들어가는 겁니까?”
대규는 산 위에 위치한, 상층부가 갈라져 있는 암석을 가리키며 아프로디테 여신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호호,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그대는 밀당을 모르는가? 전장에서 적들을 상대하는 건 이성을 유혹하는 것과 같다.”
여신은 매혹적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쪽에서 가만히 있어야 상대는 애가 달아서 저절로 튀어나오게 되는 법이지. 호호호.”
밀당이란 말을 전쟁에 써먹으니까 좀 이상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들어 보니 묘하게 맞는 말 같기도 했다.
“그런 것도 모르는 걸 보니 그대는 연애를 해 본 경험이 없는 것 같구나. 호호, 귀여워라.”
자신을 애 취급하는 여신의 모습을 보자 기분이 나빠진 대규는 이렇게 대꾸했다.
“저 고치의 거미줄을 풀어 드릴까요? 이 장갑을 이용하면 저 단단한 거미줄을 풀어 버리는 건 능사도 아닙니다만.”
그러자 여신은 소리 높여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호호호! 재미있는 영웅이로구나. 지금 판테온의 여신을 감히 위협하는 것이냐? 싸움만 잘하는 줄 알았는데 기개와 배짱도 꽤 있구나. 보기보단 섹시한걸.”
섹시라니,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대규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섹시하다는 그녀의 칭찬, 나쁘진 않은걸?’
한편, 암석 속에 있는 알로아다이 형제들은 똥 씹을 표정으로 긴급회의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오리온이 포로가 되고 정예군 50명이 다 박살 난 걸 보고 열이 있는 대로 뻗친 상태였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형, 봤어? 저 미친 거미줄 말이야! 무슨 저런 게 다 있어?”
“저런 건 생각 못 했다.”
“제기랄, 우리가 나가야 할 차례인가 봐.”
형인 오토스는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우야, 그래야겠다. 저 여신 계집을 아주 호되게 혼내 주고, 이곳으로 끌고 와 온갖 혹독한 일을 겪게 해야겠다.
“그래. 아까 공중에서 싸울 때 보니까 몸매 하나는 정말 죽여주더라구!”
그 말을 하자 구석에 놓인 청동 항아리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챙챙챙!
오토스는 오만상을 찌푸리면서 청동 항아리를 거세게 던져 버렸다.
“시끄럽다!”
항아리는 데굴데굴 굴러가더니 구석에 박혀 버렸다.
아우인 에피알테스가 오토스에게 물었다.
“형, 그럼 우린 어떻게 싸우는 게 좋을까?”
“내가 저 여신 계집을 맡아서 싸우겠다. 어쨌든 우리는 그 오리온 녀석보다 상위종인 거인 대장 기가스들이다. 여신은 오리온처럼 우리를 쉽사리 해치울 순 없다.”
“그럼 나는?”
“너는 저 빌어먹을 영웅 자식들을 싹쓸이해 버려라. 저들이 한꺼번에 덤벼도 널 쉽게 이길 수 없을 거다. 게다가 우리에겐 ‘그 녀석들’이 있으니까.”
“알겠어, 형.”
그들은 전투에 나가기 위해 거대한 몸을 일으켰다.
에피알테스는 구석에 박혀 있는 청동 항아리를 집어 들며 말했다.
“혹시 누군가가 여기 쥐새끼처럼 숨어들어 올 수도 있으니 이 청동 항아리는 잘 숨겨 두자고.”
“그래, 그렇게 하도록 하자.”
항아리가 반항하듯 다시 요란하게 울렸지만 에피알테스가 주먹으로 한 차례 가격하자 이내 잠잠해졌다.
그는 자신이 서 있는 흙바닥을 손으로 파낸 뒤 그 속에 청동 항아리를 잘 묻어 뒀다.
“그곳에서 잠이나 푹 자라구, 아레스!”
“그럼 슬슬 출전하도록 하자.”
거인 형제들은 손가락을 입에 넣고 휘파람을 세차게 불었다.
휘익-
그러자 괴상하게 생긴 생물체 두 마리가 형제들이 있는 곳을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그르릉…….
이상한 숨소리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생물체들은 몹시 혐오스럽게 생겼다.
등 뒤에는 거대한 박쥐 날개 같은 것이 돋아났고, 얼굴이 있어야 할 곳엔 거대한 입만 있었다. 마치 식충 식물 같았다.
입 안쪽에는 송곳니들이 뾰족하게 돋아나 있었고, 몸통을 따라 근육질의 다리 여섯 개가 붙어 있었다.
각 발끝에 나 있는 발톱들은 벨로시렙터처럼 거대하고 날카로웠다.
그으으…….
그것들이 숨을 쉴 때마다 불쾌한 느낌이 전해졌다.
형제는 그 혐오스러운 생물체를 마치 귀여운 애완견 만지듯 사랑스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유, 이 귀여운 것들. 출전할 때가 왔단다.”
“저 밖을 보거라. 너희들의 먹잇감이 잔뜩 있단다.”
“형, 그럼 출발해 볼까.”
“오케이.”
턱.
형제들은 각자 그 생물체의 등에 올라탔다.
그것들은 날개를 활짝 펴고 암석 밖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저게 뭐야?”
켄타로우스 족 영웅 중 하나가 암석의 틈에서 나오는 무언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암석의 갈라진 균열 틈에서 두 마리의 괴상하게 생긴 생물체가 나와 하늘을 날고 있었다.
“새인가? 그런데 좀 징그럽게 생겼는걸.”
그것들을 본 아프로디테 여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드디어 나타났구나, 알로아다이 형제!”
형제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다.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런지 대규가 봐도 공략집은 아직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멀리서 봐도 형제들과 그들이 탄 저것들이 징그럽게 생겼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여신은 이제 단순히 불쾌한 표정이 아니라 분노 치밀어 오른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저런 추한 것들은 이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없다!”
오리온을 상대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너무 외모지상주의 아닌가?’
여신은 영웅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봐라! 나는 형인 오토스 쪽을 상대할 것이다. 그대들은 아우 에피알테스를 상대하라!”
말을 마친 여신은 자신의 몸을 키우기 시작했다.
스스스.
오리온을 상대할 때만큼 몸집이 커진 그녀는 하늘 위로 날아올라 오토스를 쫓았다.
곧 거인과 여신 사이에서 불꽃이 일기 시작했다.
알로아다이 형제와의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