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
137화 황금 눈물의 분신
그때 공략집의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분신은 본체가 지닌 능력치의 절반만 지니게 됩니다. 분신의 지속 시간은 15초입니다.>
두 명의 대규를 본 거인 정예군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대규는 순식간에 갑옷의 투명화 옵션을 발동시켜 몸을 숨겼다.
그러자 정예군들은 분신을 공격하러 일제히 달려들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분신의 실력이 보고 싶었다. 자신이 지닌 능력치의 절반을 갖고 있다는데 혹시 15초가 다 지나기도 전에 죽는 거 아냐?
하지만 예상외로 분신은 꽤 잘 싸우고 있었다. 능력치의 절반이라고 해서 바로 죽는 것 아닌가 걱정했는데 상상 이상이었다.
분신은 대여섯 명의 정예군을 상대로 날아오는 그들의 칼날을 척척 막아 냈다.
물론 자신에 비해 민첩성은 좀 떨어졌다.
‘그렇다면 본체인 내 실력이 그만큼 강하다는 뜻이구나. 그런데 이렇게 보고 있으니 기분이 좀 묘한걸.’
자신과 똑같이 생긴 분신이 싸우고 있는 걸 보자니 유체 이탈이라도 해서 자신의 모습을 관찰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느새 지속 시간의 15초 중 10초가 지나고 있었다.
‘시간이 없군.’
대규는 대여섯 명의 거인 정예군이 분신을 공격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 그들의 뒤로 돌아가 여유롭게 스킬을 날렸다.
“레툼 익투스!”
살기와 불꽃을 품은 검광들이 녀석들의 등을 향해 날아갔다.
녀석들은 이상함을 느끼고 재빨리 뒤를 돌아 불꽃 검광들을 필사적으로 쳐내기 바빴다.
하지만 진짜 일격의 기운은 녀석들의 급소를 향해 정확히 날아들어 갔다.
서걱-
화르륵-
“끄으으…….”
녀석들의 머리통들에 불이 붙었고 깔끔하게 잘려 나갔다.
곳곳에 떨궈진 아이템들은 바로 공중으로 떠올라 사라졌다. 아마 부대로 전송됐을 것이다.
‘그런데 이 분신 옵션, 생각보다 쓸 만한걸.’
대규가 아무리 강하다고 하지만 그와 호각을 겨루는 적을 만나면 손쉽게 스킬을 쓸 수 없었다.
적이 스킬을 쓸 틈을 주지 않고 계속 공격해 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킬을 쓸 틈을 찾기가 쉽지 않은데 이 분신을 만들면 그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분신으로 적의 시선을 끌고 그 틈을 타 본체인 자신은 녀석들이 보지 못하는 사각지대를 노려 여유롭게 스킬을 쏘면 된다.
‘좋았어. 그럼 본격적으로 싸워 볼까!’
대규는 거인 정예군들을 차례차례 쓰러뜨리기 시작했다.
다른 영웅들이 힘을 합쳐 1명의 정예군을 겨우겨우 쓰러뜨릴 시간에 혼자서 10명이 넘는 정예군을 해치우고 있었다.
실로 압도적인 차이였다.
지영은 그런 대규의 모습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대규 씨가 괜히 최고의 영웅 칭호를 받은 게 아니구나.’
하지만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는 항상 자신을 포함한 다른 영웅보다 월등히 뛰어났다.
그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행동한다.
‘나도 더욱 힘내야지.’
지영은 저 멀리서 달려오는 정예군 거인을 향해 쌍검을 휘둘렀다.
서걱-
쌍검이 적군의 팔을 갈랐고 비릿한 피 냄새가 코끝에 스며들었다.
“형제, 저것 좀 봐 봐!”
열심히 싸우던 가로쉬가 우르크를 부르며 하늘을 가리켰다.
그곳엔 아프로디테와 오리온이 대치하고 있었다.
“우르크 형제, 그런데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아직도 대치만 하고 있는 상태다. 저 여신이 아무리 성격이 건방지고 이상하다 해도 판테온의 신이다. 오리온 정도는 벌써 해치워야 정상이다.”
“확실히 이상하군. 잠깐! 저것 좀 봐, 가로쉬 형제!”
우르크는 투박한 손가락으로 저 멀리 하늘에 떠 있는 아프로디테 여신을 가리켰다.
두 오크는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지, 지금 저 여자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아프로디테 여신은 오리온을 유혹하고 있었다.
땅 아래에서 올려다봐서 확실하진 않지만, 그녀의 몸동작은 상대를 공격하는 게 아니라 유혹에 훨씬 가까웠다.
그녀는 무기를 들고 휘두르긴커녕 오리온의 주위를 뱅뱅 돌면서 야릇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크윽! 형제, 나는 저 여자가 오리온이 잘생겼다는 얘기를 듣고 음탕한 눈빛을 빛낼 때부터 알아봤다…….”
“저런 지조 없는 여자를 봤나! 아레스 신의 애인이면서 어떻게 저런 경박한 행동을 할 수 있는 거냐?”
오크들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자신들이 충성을 다해 모시는 아레스 신이 모욕당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옆에 있던 고블린 영웅은 분위기 파악도 못 하고 이렇게 떠들어 댔다.
“취릭- 헤헤, 대장! 그래도 저 모습이 꽤 삼삼한데요… 취릭!”
“멍청한 녀석! 넌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가로쉬는 도끼의 손잡이로 고블린의 정수리를 있는 힘껏 내리쳤다.
한편, 오크들의 예상대로 하늘 위에서 아프로디테 여신은 오리온을 유혹하는 중이었다.
미의 여신인 그녀는 미남을 아주 좋아했다.
‘저 정도의 미남이라면 정말 죽이기 아깝지.’
그녀는 오리온을 설득해 자신의 부대로 들어오게 만들고 싶었다.
여태 그녀의 부대엔 남자 영웅은 한 명도 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저렇게 잘생긴 미남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이었다.
‘게다가 애인으로도 사귀고 싶은걸. 욕심이 나네, 호호.’
현재 그녀에겐 애인인 아레스가 있지만 그녀는 사랑과 애욕의 신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에게 애인이 한두 명 더 생기는 것쯤은 놀랄 일도 아니었다.
아프로디테는 자신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그녀의 무기는 창이나 칼, 방망이 같은 것이 아니었다. 선홍빛 색의 손잡이엔 똑같은 색으로 만들어진 기다란 가죽 끈들이 총 아홉 갈래로 늘어져 있었다.
“캣 오 나인테일즈(Cat-o’-nine-tails) 채찍!”
휘릭-
여신은 채찍을 허공에 휘두르며 오리온에게 매혹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호호, 오리온이여… 나는 그대와 싸우고 싶지 않구나.”
그녀는 기다란 채찍의 끝으로 오리온의 건장한 신체를 훑으며 말을 이었다.
“그대만 좋다면 나는 그대를 내 부대의 영웅으로 들이고 싶구나. 어떠냐? 추악하게 생긴 알로아다이 형제들 밑에서 평생 썩느니 판테온의 신인 내 아래로 들어오는 게 훨씬 좋지 않겠느냐?”
그러자 오리온은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그녀의 채찍을 밀쳐냈다.
“웃기는군! 나는 자랑스러운 거인족이다!”
말을 마친 그는 여신을 향해 철퇴를 휘둘렀다.
철퇴에 달린 사냥개들의 목이 쭉쭉 늘어나면서 여신을 향해 날카로운 송곳니를 들이밀었다.
하지만 여신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귀여운 수캐들이로구나, 후후.”
그녀는 유연하게 몸을 돌려 자신을 향해 목을 쭉 내밀고 이빨을 드러낸 사냥개 머리들을 피했다.
그리고 들고 있던 선홍빛 갈래 채찍으로 사냥개들의 머리를 거세게 내리쳤다.
짜아악!
차진 소리가 하늘에 울려 퍼졌고, 채찍에 맞은 사냥개의 머리들은 정신을 잃었다.
하지만 사냥개들은 곧 정신을 차렸다.
오리온은 다시 그녀를 향해 철퇴를 휘둘렀고, 사냥개들의 목이 늘어났다.
“끼이잉…….”
“헥헥…….”
채찍에 맞았던 사냥개들은 좀 전처럼 난폭하게 그녀를 공격하기는커녕 이상한 신음 소리를 내며 침을 질질 흘리기 시작했다.
여신은 그런 사냥개들이 귀엽다는 듯 그들의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호호, 채찍의 마법이 먹힌 모양이구나.”
사냥개들은 이제 바로 옆에 있는 다른 사냥개 머리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으르렁! 컹컹!”
당황하는 오리온에게 여신이 웃으며 말했다.
“이 채찍은 수컷과 남자들의 마음속의 욕정을 건드려서 부풀어 오르게 만들지. 녀석의 눈엔 내가 세상에서 제일 매력적인 암컷 강아지로 보이고 있을 거야. 호호.”
여신은 다른 녀석들을 향해 사납게 울부짖는 사냥개의 머리를 다시 쓰다듬었다. 그러자 그것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얌전해졌다.
“호호, 다른 수컷들에게 나를 뺏기고 싶지 않아서 귀엽게 굴었구나. 하여튼 수컷들이란… 호호.”
“크윽…….”
인상을 구기는 오리온에게 아프로디테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의 이 철퇴가 몹시 강한 무기라는 것도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판테온의 여신이다. 그대는 나를 상대하기에 약하다.”
“웃기지 마라!”
오리온은 철퇴를 거둔 뒤 맨손으로 그녀를 제압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날렵하게 그의 팔목을 잡아 꺾어버린 뒤 늘씬한 다리를 그의 허벅지에 걸어 쓰러뜨려 버렸다.
어느새 쓰러진 오리온의 몸에 올라탄 여신은 그의 단단한 허벅지를 손끝으로 부드럽게 훑으며 관능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준마에 올라탄 것 같은 탑승감이다. 참으로 단단한 허벅지로구나.”
그녀는 몸을 숙인 채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아직도 내 부하로 들어올 마음이 생기지 않은 거냐?”
“크윽…….”
한편 아래쪽에서 그들을 지켜보던 오크 우르크는 기가 막힌다는 듯 소리쳤다.
“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거인 정예군을 향해 도끼날을 휘두르면서도 그는 여신의 행보를 주시하고 있었다.
“형제! 저들의 자세가 아주 심상치 않다!”
가로쉬 역시 자신의 등에 달라붙은 정예군을 떼어낸 뒤 내동댕이치며 말했다.
“저 자세는 전투의 자세가 아니라 번식할 때 자세인 것 같은데!”
하지만 여신의 생각과 달리 오리온은 쉽게 넘어오지 않았다.
여신은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를 어떻게든 자신의 부하로 만들고 싶었지만 그는 넘어오지 않았다.
이제 그녀는 적장인 그를 죽이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가 마음에 들어도 그녀는 기간토마키아에 참전한 판테온의 신이고, 그는 적군이었다. 자신이 사심을 품고 그를 살려주면 신들의 왕 제우스에게 무서운 벌을 받을지도 몰랐다.
‘고민이군. 이자가 항복하지 않으면 내 손으로 죽여야만 하니……. 잠깐, 영웅들이 그를 죽이지 않고 생포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래서 그녀에게 생포한 오리온을 넘겨준다면?
그럼 별문제가 안 될 것이다. 신이 적군과 직접 싸울 땐 그 적군을 무조건 죽이거나 항복을 받아 내야 했지만, 영웅들이 생포하거나 잡아 온 적의 처분은 신이 내리는 것이 전쟁의 관례였다.
그녀는 전쟁터에서 싸우고 있는 영웅들을 향해 소리쳤다.
“여봐라! 너희들 중에서 이 자를 죽이지 않고 생포해 나에게 넘겨주는 자에겐 큰 상을 내리겠다!”
그녀의 말에 영웅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특히 큰 상이란 말에 오크 장군들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형제, 들었나?”
“들었다. 크크, 큰 상이라니… 호승심이 생기는군!”
“게다가 저 잘생긴 거인 녀석, 안 그래도 재수 없는데 혼쭐을 내줄 수 있는 기회로군!”
우르크와 가로쉬는 공중을 걷는 신묘한 보법을 이용해 하늘 위의 오리온에게 달려들었다.
오리온은 벌떡 일어나 오크들을 향해 철퇴를 휘둘렀다.
휘릭-
철퇴에 달린 사냥개들은 수컷인 오크들을 보자 아프로디테를 대할 때와는 180도 다른 모습으로 돌변해 맹렬하게 그들을 공격해 왔다.
“으르릉!”
사냥개들의 날카로운 이빨이 오크 장군들의 팔뚝을 사정없이 물어뜯었다.
“크으윽…….”
여태껏 그 어떤 부상에도 꿈쩍하지 않던 그들이었지만 이번엔 달랐다.
사냥개들의 이빨이 깊게 파고들수록 오크들의 표정은 괴로움에 찌그러졌다.
가로쉬와 우르크는 있는 힘껏 자신들의 배틀 엑스를 휘둘렀다. 하지만 사냥개들의 이빨 악력은 만만치 않았다.
살점이 뜯겨 나가고 근육의 힘줄이 끊어지는 것 같았다.
팔에 힘이 빠져나가고 오크들의 손에서 배틀 엑스가 떨어져 나갔다.
저 아래 전쟁터에서 상대했던 정예군 거인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아프로디테 여신이 이런 오리온의 공격을 쉽게 막아 낸 걸 보면 그녀는 역시 판테온의 신이었다.
사냥개들은 이제 오크 장군들의 가슴과 목덜미를 사정없이 물어뜯었다.
“크아아악!”
“으으으!”
고통스러운 비명이 오크들의 입에서 튀어나왔고, 오리온은 입가에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외쳤다.
“죽어라, 이 오크들아!”
그때였다.
휘리릭-
사냥개들의 머리에 가느다랗고 하얀 실이 칭칭 감기기 시작했다.
“컹컹?”
사냥개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실은 계속 칭칭 감기더니 어느새 사냥개들의 머리를 붕대 뭉치처럼 커다랗게 감아 버렸다.
오리온의 표정이 굳어졌고, 두 오크는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실이 뿜어져 나온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대규가 서 있었다.
그의 양손에선 아라크네의 거미줄이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