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
134화 오리온 (1)
매혹적인 목소리였지만 나름 한 부대를 거느리는 판테온의 신답게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그러자 가로쉬가 대답했다.
“우리 쪽의 최정예군 영웅들은 저와 우르크를 포함해서 총 30명입니다. 아테나 여신 부대와 여신님의 부대 사정은 어떻습니까?”
그러자 케이른이 끼어들어 대답했다.
“우리 쪽은 총 21명이다.”
아프로디테 여신도 대답했다.
“우리 쪽은 나를 포함해서 총 13명이다.”
그럼 총 64명. 적은 수는 아니다.
우선 아군엔 신 1명에 대장군 급 영웅 4명이 있다. 가로쉬와 우르크, 그리고 케이른과 대규.
심지어 대규는 최고의 영웅 칭호를 받을 만큼 그 실력이 검증된 상태다.
아프로디테 여신은 미소를 지으며 가로쉬에게 물었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구나. 그럼 적군의 병력은 어떻지?”
“최정예 거인들 50명으로 이뤄진 부대가 형제를 지키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쫄따구 병사들도 수백 명이 있지만… 뭐, 그들은 우리의 상대가 되지 않지요.”
50명 대 64명이면 아군 쪽이 완전 압승이다.
하지만 우르크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50명을 총괄하는 중간 보스 녀석이 하나 있습니다.”
중간 보스라면 포르피리온을 상대할 때 봤던 티그리스 듀오 같은 존재인 것 같았다.
“그게 누구지?”
“바로 거인 사냥꾼, 오리온입니다.”
그러자 아프로디테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그녀는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호오, 그 미남 사냥꾼 말인가?”
“그렇습니다. 정확히는 ‘거인’ 미남 사냥꾼이죠. 녀석의 실력에 대해선 여신님께서도 잘 아실 겁니다.”
우르크는 유독 ‘거인’이란 말에 힘을 줘서 말했다.
하지만 아프로디테 여신은 몹시 상기된 얼굴을 한 채 눈동자를 빛내고 있었다.
대규는 오리온이란 자의 정체가 궁금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여태까지 거인족이라면 다들 흉측하게 생긴 괴물들이었다. 외눈박이거나 팔들이 여러 개 달렸거나 혹은 피부 거죽이 붉고 두껍거나 했다.
‘그런데 미남이라고?’
심지어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가 저토록 관심을 보이는 걸 보니 대규는 오리온의 생김새가 상당히 궁금해졌다.
아프로디테 여신은 영웅들에게 이렇게 명령했다.
“그럼 오리온은 내가 맡으마. 대신 나머지 거인 정예군과 기타 병사들은 그대들이 맡아서 싸우도록 하라.”
그녀의 얼굴은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보다 아레스 신은 잘 싸우고 있는 걸까?’
얼마나 걱정됐으면 신들의 왕 제우스가 전언을 보내 이렇게 지원군을 모았다.
물론 아직 별다른 전언이나 소식이 없는 거로 봐선 큰 위기가 닥친 것 같진 않았다.
그때 가로쉬가 여신에게 말했다.
“그럼 빨리 출발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저희들은 아레스 신이 걱정됩니다. 아레스 신의 전투 실력은 저희도 인정하지만, 신의 성격이 워낙 불같으셔서 그 비열한 알로아다이 형제가 자존심을 긁기라도 하면…….”
“당연히 녀석들에게 또 당해 버리겠지. 아레스는 그 단순한 성격이 매력이긴 하지만 가끔은 너무 좀 그래.”
여신은 왕좌의 해골들을 손끝으로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빨리 가도록 하지. 거인 미남 사냥꾼을 잡으러 말이야. 호호.”
그녀는 왕좌에서 일어나 기다란 손가락을 허공에 휘둘렀다.
백옥같이 하얀 손가락들은 아주 아름다웠다.
곧 그녀의 손가락들을 따라 포탈이 열렸다.
여신과 그녀의 수하 영웅들이 먼저 포탈로 들어갔다. 케이른은 포탈로 들어가는 실비아의 뒷모습을 여전히 좇고 있었다. 그 뒤를 이어 우르크와 가로쉬가 들어가려 하는데 케이른이 소리쳤다.
“잠깐! 우리가 먼저 들어간다!”
말을 마친 케이른은 실비아를 쫓아 후다닥 포탈로 들어가 버렸다.
싸울 때 보면 정말 훌륭한 실력을 지닌 영웅인데, 여자 문제만 얽히면 저렇게 정신 못 차리고 빙구처럼 되어 버리는 케이른을 보며 대규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곧 나머지 영웅들도 들어갔고 이제 대규와 지영만 남았다.
지영이 들어가려고 하자 오크 대장군 가로쉬가 길을 비켜 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먼저 들어가시오. 레이디 퍼스트니까.”
목소리가 다정하다 못해 좀 느끼한 것 같았다.
‘저 자식, 갑자기 왜 저래?’
천막 안에 들어오기 전에 지영이 고블린을 해치웠을 때도 경의를 표한답시고 손등에 입을 맞추질 않나.
‘설마 지영 씨를 좋아하나? 웩.’
솔직히 좋아한다고 해도 자신이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대규 역시 지영을 따라 포탈 안으로 들어섰다.
펠리온 산은 산맥들이 뾰족뾰족하게 끝없이 솟아 있는 장소였다.
하늘은 주홍빛이었고, 후덥지근한 공기가 산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중 가장 커다란 산 위에는 거대한 암석이 세워져 있었다.
아레스 신은 산 아래쪽에서 적마(赤馬)를 탄 채 서 있었다.
그의 모습은 몹시 용맹스러웠다. 강철로 만들어진 투구는 그의 얼굴 반을 가리고 있었는데 투구에는 빨간 깃이 빳빳하게 세워져 있었다.
또한 그의 몸에는 피처럼 검붉은 갑옷이 입혀져 있었는데, 갑옷의 어깨 부분에는 지휘사령부 천막의 왕좌처럼 그가 쓰러뜨린 적장들의 해골들이 좌르륵 달려 있었다.
아레스 신은 등에 달린 거대한 검집에서 자신의 대검을 꺼내 들었다.
스륵-
고오오-
칼날의 너비만 1미터인 대검이었다.
그런데 이 검의 외관은 몹시 특이했다.
칼날의 경우 일반적인 롱 소드처럼 매끄럽게 일자가 아니었다. 검신을 따라 굵은 가시들처럼 뾰족하게 날들이 자라나 있었다.
게다가 더욱 위협적인 건 칼날의 끝부분이었다.
칼날의 끝은 보통 칼처럼 뾰족한 대신 황금 사자의 머리가 박혀 있었다. 사자의 눈은 붉은빛으로 빛나고 있었고, 주둥이는 커다랗게 벌리고 있었다. 주둥이 속 뾰족한 이빨들 사이에선 연신 붉은 안개가 뿜어져 나왔다.
그르르르…….
사자의 주둥이에선 연신 위협적인 울음소리가 뿜어져 나왔다.
이 특이하게 생긴 칼은 신화 등급의 무기 ‘레오 아레스’였다.
레오 아레스란 아레스의 사자란 뜻으로, 이 무기 역시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신들의 무기 중 하나였다.
“키에엑!”
뒤쪽에서 들려오는 괴상한 울음소리에 아레스는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에서 거인 병사 수십 명이 달려오고 있었다.
알로아다이 형제, 그러니까 오토스와 에피알테스 녀석들의 부하 병사들이었다.
물론 아레스 신은 바로 형제들이 살고 있는 산 위의 암석으로 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는 대신 거인 병사들을 향해 말을 몰았다.
보통의 경우 신들은 저런 졸병 병사들을 일일이 상대하지 않는다. 신들은 곧장 기간테스를 상대하러 가는 게 관례였다.
하지만 아레스는 달랐다.
투구 속 그의 눈동자가 광기로 번뜩였다.
그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번졌다.
“하찮은 거인 녀석들! 갈기갈기 찢어 죽여 주마!”
그는 수십 명의 거인 병사를 향해 사자 머리가 박힌 대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검끝의 사자 머리가 요란하게 포효하기 시작했다.
으르렁!
그 순간 거인 병사들은 얼어붙은 듯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아레스는 적들이 겁에 질려 움직이지 못하는 이 순간이 좋았다.
그들의 눈동자에 깃들어 있는 두려움과 공포를 바라보는 게 좋았다.
그리고 자신의 검이 그들의 피로 물들어가는 모습이 좋았다.
바로 지금처럼.
휘릭-
우두둑!
휘둘러진 검끝에 달린 사자 머리가 겁에 질린 거인 병사들을 처참하게 잡아먹기 시작했다.
병사들의 뜨뜻미지근한 피가 아레스의 얼굴에 사정없이 튀었다.
하지만 그는 기분 좋은 듯 얼굴에 튄 핏방울들을 혀로 잔인하게 핥았다.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전쟁의 광기가 차올랐다.
이 광기가 완전히 차오른 상태에서 알로아다이 형제들을 상대하고 싶었다.
‘그래야 일전에 나에게 굴욕적인 짓을 한 대가를 처절하게 치를 수 있지!’
아레스는 최대한 알로아다이 형제 녀석들을 처참하고 잔인하게 죽이고 싶었다.
이제 거인 병사들은 처참한 비명을 지르며 죽어 버렸다.
“키에에엑!”
“그으으…….”
쓰러진 거인 병사들의 시체가 순식간에 산을 이뤘다.
“이 맛에 싸운다니까.”
아레스는 씨익 웃으며 대검을 등의 검집에 찔러 넣었다.
기분이 아주 상쾌했다.
준비 운동은 이 정도면 충분했다.
아레스는 알로아다이 형제의 거처인, 산 위에 우뚝 솟은 암석을 향해 소리쳤다.
“야비한 거인 새끼들아! 이 아레스가 해치워 주마!”
하지만 암석은 조용했다.
분명 녀석들은 또 비겁한 수를 쓰려 할 것이다. 하지만 필요 없다. 다 쳐부숴 주겠다.
자신의 대검으로 녀석들의 사지를 찢어 죽여 놓을 것이다.
“흥, 안 나온다 이거지? 그럼 나오게 해 주마.”
아레스는 자신이 타고 있는 적마의 말고삐를 거세게 잡아당겼다.
“히이잉!”
말이 세차게 발을 구르며 산 쪽으로 달려갔다.
이대로 가면 산과 충돌할 것이다. 하지만 산과 충돌하기 직전 아레스는 말 위에서 발을 디뎌 높게 점프했다.
타탓.
독수리가 비상하는 것 같은 엄청난 점프력이었다.
그는 산 위에 있는 암석보다 훨씬 높게 점프했다.
그의 발아래 암석의 꼭대기 부분이 보였다.
아레스는 자신의 대검을 뽑아 높게 쳐든 뒤 암석의 꼭대기 부분을 향해 검을 내리꽂았다.
“흐아압!”
“으르렁!”
검끝의 사자가 포효했고, 하늘에서 거대한 벼락이 떨어졌다.
우르릉! 쾅!
떨어진 벼락은 아레스의 대검에 흡수됐다. 곧 벼락을 품은 칼날이 암석의 꼭대기에 닿았고 암석의 상층부는 순식간에 둘로 쪼개져 버렸다.
쿠궁!
쩌쩌적-
암석의 상층부에 기다랗게 균열이 갔다.
“네 녀석들이 안 나오면 내가 들어가 주마!”
아레스의 눈은 광기로 번뜩이고 있었다. 그는 알로아다이 형제들이 있을 암석의 안쪽, 즉 균열의 틈 속으로 날아들어 갔다.
그때 낮은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크크크… 여전히 싸우기 좋아하는 단순무식한 녀석이구나.”
목소리는 균열의 틈 안쪽에서 들려오고 있었고, 그것을 들은 아레스의 표정은 사정없이 구겨졌다.
이 목소리는 분명 알로아다이 형제 중 형인 거인 오토스의 목소리였다.
흥분한 아레스는 목에 핏대를 세워 가며 커다랗게 소리쳤다.
“네 이놈! 나와라! 당장 사지를 찢어 죽여 줄 테니.”
그러자 오토스의 목소리는 비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네 녀석이 나를 찾아와라! 물론 사지가 찢겨 죽는 건 바로 아레스 네 녀석이 될 것이다. 하하하!’
“이 건방진 새끼… 후회하게 만들어 주마!”
아레스는 이성을 잃어버렸다.
머릿속에선 빨리 오토스를 만나 그를 죽이고 싶단 것 말고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오토스의 목소리는 암석의 안쪽에서 분명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레스는 녀석을 세상에서 가장 처참하고 잔인하게 죽여 버리겠다는 일념 하나로 있는 힘껏 암석의 안쪽을 향해 날아갔다.
턱!
암석 안쪽을 향해 한참을 날아들어 가던 아레스는 몸을 멈췄다.
앞쪽에 거대한 벽이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날 수가 없었다.
“뭐야?”
그는 당황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사방은 어느새 막혀 있었다.
“빌어먹을…….”
그는 입으로 욕지기를 내뱉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익숙한 풍경이었다.
이곳은 예전에 청동 항아리에 갇혔을 때 봤던 풍경과 똑같았다.
“빌어먹을!”
아레스는 항아리의 벽면을 쾅쾅 쳐대며 난폭하게 소리 질렀다.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드는 성급한 성격 탓에 또다시 항아리에 갇혀 버렸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잘못이라곤 생각하지 않고 여전히 알로아다이 형제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이 비겁한 자식들! 이러고도 너희가 무사할 줄 아느냐!”
그러자 항아리 내부 전체에서 오토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크하하하! 또 속다니! 정말 멍청한 신 녀석이구나. 전투에 비겁함이 어디 있느냐? 이기면 장땡이지, 하하하!”
“네 이놈! 대체 어디 있느냐?”
아레스는 분에 못 이겨 자신의 대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오토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저 멀리 콩알만 한 빛이 보였다.
청동 항아리의 뚜껑이 살짝 열린 것이었다.
거대한 눈동자가 아래쪽에 있는 아레스를 굽어보며 말했다.
“난 여기 있다, 아레스 신이여.”
“건방진 녀석!”
아레스 신은 오토스의 눈동자를 향해 자신의 대검을 힘껏 던졌다.
검끝에 달린 사자 머리가 울음소리를 내며 빠르게 눈동자를 향해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