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
125화 제우스의 보상
하데스의 말에 제우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하라고 했다.
하데스는 검은 망토와 토가를 펄럭이며 팔을 치켜들었다.
파바밧!
그 순간 케이른과 아프로디테 휘하 여자 영웅이 신전 바닥에 등장했다.
그런데 저건 대체 무슨 광경이람!
그들은 눈을 감고 서로 부둥켜안은 채 열렬하게 입을 맞추고 있었다.
심지어 여자 영웅의 미스릴 비키니 갑옷(?)은 벗겨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영웅들은 눈을 크게 뜨고 그들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시끄럽게 싸우고 있던 두 오크 역시 입을 다물고 그들을 바라보기 바빴다.
아테나 여신과 몇몇 신들은 민망하다는 듯 고개를 돌렸지만, 아프로디테 신과 디오니소스 신은 흥미롭다는 듯 그들을 쳐다보았다.
케이른은 여자 영웅의 몸을 더듬으며 말했다.
“이곳 동굴 호수는 어둡고 캄캄하니까 아무도 우리가 여기 있는지 모를… 으앗,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황급이 떨어지는 케이른과 여자 영웅.
대규는 혀를 끌끌 차며 생각했다.
‘하라는 임무는 완수 안 하고 여자 영웅이랑 눈이나 맞다니…….’
당황해하는 케이른에게 아프로디테 여신이 웃으며 말했다.
“호호, 꽉 막힌 아테나 밑에 저런 사랑꾼 영웅이 있을 줄이야. 꽤나 감동적인 광경이로구나.”
그 말에 아테나 여신은 똥물을 한 바가지 뒤집어쓴 듯한 표정을 지은 뒤 몸을 부들부들 떨며 소리쳤다.
“케이른 네 이놈!”
“여, 여신님… 이건…….”
케이른은 당황하며 말발굽으로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다른 신들은 그 모습을 보며 킥킥대기 시작했다.
그대 제우스 신이 손뼉을 짝짝 치며 말했다.
“자, 다들 주목해라! 이제 임무는 끝났고 최고의 영웅에게 보상을 내리도록 하겠다.”
제우스 신은 대규를 손끝으로 직접 가리켰다.
“너, 이리로 오너라.”
대규는 천천히 제우스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지만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눈도 못 마주 칠 정도로 그 위엄이며 포스가 엄청났다.
“저승에서 가져온 세 개의 재료를 꺼내보거라.”
조심스럽게 보관함에서 재료들을 꺼냈다.
플레게톤의 불과 스틱스의 물이 든 유리병 두 개, 그리고 지옥 광석 인페리 페룸 한 덩이를 공손하게 들어 신들의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헤파이스토스여, 이리 와서 살펴보게.”
제우스가 명령하자 곱추인 헤파이스토스 신이 나와 유리병들과 인페리 페룸을 이곳저곳 살펴본 뒤 말했다.
“제대로 가져온 것 같습니다.”
“그럼 약속대로 이 자에게 갑옷을 지어주도록 하라.”
제우스가 손을 까딱하자 허공에 종이 한 조각이 생성됐다.
무기 제조 허가증이었다.
종이에는 인장이 박혀있었는데 우렁찬 벼락이 그려진 거로 보아 제우스 신의 인장인 것 같았다.
헤파이스토스는 재료들과 허가증을 챙긴 뒤 대규를 보며 말했다.
“갑옷이 완성되는 데는 넉넉잡아 사흘이 걸린다. 사흘 뒤에 판테온에 있는 내 대장간으로 오면 된다.”
“판테온 상업구역에 있는 헤파이스토스의 대장간 말입니까?”
“그렇다. 잠깐…….”
헤파이스토스의 눈동자가 갑자기 가늘어졌다.
“왜 그러십니까?”
그는 대규의 허리춤에 있는 불카누스의 사슬검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 검, 몰랐는데 지금 보니 파베르 녀석의 솜씨군.”
파베르는 판테온의 대장간에서 이 검을 만들어줬던 염소 인간으로 그곳의 수석 대장장이였다.
헤파이스토스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사이 안 본 새에 파베르 녀석의 실력이 많이 늘었군. 그럼 오래간만에 나도 실력 발휘를 해야겠는걸!”
헤파이스토스의 눈동자는 이제 열정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는 대규가 가져온 재료들을 계속 번갈아 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하하! 무구를 만드는 게 대체 얼마 만인지… 지금이라도 당장 무두질을 하고 싶어서 손가락이 간질간질 하군. 게다가 이 인페리 페룸… 아주 최상의 상태야. 플레게톤의 불로 내 망치를 달궈 무두질하면 얼마나 강력해질지 생각만 해도 참…….”
빨리 망치를 쥐고 싶어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는 손을 달달 떨기 시작했다.
여전히 눈을 반짝이며 홀로 열심히 뭐라고 중얼거렸다. 더 이상 대규나 다른 신들의 존재는 의식하지 않는 듯했다.
마침내 헤파이스토스는 제우스를 바라보며 참을 수 없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
“제우스 신이시여. 지금 당장 대장간에 가봐도 되겠습니까?”
“하여튼 헤파이스토스, 자네의 무기제작에 대한 열정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알겠네.”
“그럼 전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헤파이스토스 신은 사라져버렸다.
그나저나 어떤 갑옷이 그의 손에서 탄생할지 궁금했다.
신화 등급 갑옷이라니. 벌써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럼 이제 나의 징표를 내릴 때로군.”
제우스 신이 위엄에 찬 목소리로 대규에게 말했다.
징표!
제우스 신이 경탄할 만큼 위대한 일을 벌인 자에게 수여하는 일종의 표식.
이 징표를 세 개 모으면 신의 육체를 얻을 수 있는 시련에 도전할 자격이 주어진다고 했다.
대규는 이제 그 중 첫 번째 징표를 얻게 된 것이다.
제우스 신이 허공에서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운명의 천과 실, 바늘이 나왔다.
그 천에는 대규의 이름이 수놓아져 있는 상태였다. 일전에 판테온의 시련을 무사히 통과한 뒤 아이룸나 신전의 사제였던 운명의 세여신이 수놓은 것이었다.
제우스는 바늘에 실을 꿴 뒤 천을 들고 가볍게 손끝으로 툭 쳤다.
그러자 바늘이 저절로 춤을 추듯 움직이며 수를 놓기 시작했다.
얼마 후 대규의 이름 옆에는 작은 벼락이 수놓아져 있었다. 벼락에선 황금빛이 은은하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다 됐다. 여기 그대가 얻은 징표다.”
제우스는 벼락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대의 징표는 판테온 기록의 신전에 영원히 기록이 됐다. 그리고 이제 판테온에서 그대는 누구보다도 최고의 영웅으로 불릴 것이다.”
그때 눈앞에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제우스가 수여한 징표가 판테온 기록의 신전 당신의 영역에 무사히 기록됐습니다.]
[당신에게 최고의 영웅 칭호가 수여됐습니다.]
“감사합니다.”
대규는 인사를 했지만, 궁금증이 하나 들었다.
‘이번에야 이 저승 시합으로 징표를 얻어냈지만, 다음엔 무슨 일을, 어떤 공적을 세워야 징표를 얻어낼 수 있을까?’
두 개를 더 모아서 신의 육체를 얻는 시련에 도전하고 싶다는 마음이 어렴풋이 들었기 때문이다.
“…신들의 왕이시여.”
대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나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그러자 주변의 신들이 모두 깜짝 놀란 얼굴로 대규를 바라보았다. 여태껏 영웅이 신들의 왕 제우스에게 뭔가를 물어본 적은 거의 없었다.
제우스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대규를 바라보며 말했다.
“뭔가? 말해보거라.”
“당신이 수여하시는 징표는 대체 어떻게 해야 더 얻을 수 있는 겁니까?”
“하하, 그건 나를 경탄시킬 만한 일을 하면 된다. 오늘 벌어진 저승 시합 같은 일은 사실 젊은 신들의 다툼으로 인해 급작스럽게 벌어진 일이지만… 공식적으로도 나의 징표를 얻을 수 있는 미션들이 몇 개 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대규는 저도 모르게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러자 제우스는 호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하! 당돌한 영웅이로구나. 뭐, 말해줘도 상관없겠지.”
그는 대규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번 기간토마키아가 끝나면 판테온 전체 신들의 소속 부대들을 대상으로 가장 큰 공적을 세운 영웅들을 뽑는다. 그리고 그 영웅들에게 징표가 수여되지. 각자 세운 공적의 양에 따라 받을 수 있는 징표의 개수가 달라진다.”
그 말은 기간토마키아가 끝날 때까진 다른 징표를 모을 수 없단 말인가?
‘하지만 오늘처럼 즉흥적으로 징표를 얻어낼 일이 생길 수도 있지.’
중요한 건 기간토마키아에서 최고의 공적을 세워야 한다는 것.
“알겠습니다.”
대규는 공손하게 말하며 물러났다. 그러자 제우스가 말했다.
“근데 그대는 정말 특이한 영웅이로구나. 정령 혹은 신의 피가 섞인 반신 혼혈도 아닌 순수한 인간 출신이 이렇게 최고의 영웅 칭호를 수여받는 건 정말 오랜만에 본다.”
그는 아테나 여신을 돌아보며 이렇게 덧붙였다.
“내 딸아, 너는 아주 특별한 영웅을 거느리고 있구나.”
그러자 여신은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대답했다.
“칭찬 감사합니다, 신들의 아버지이시여.”
제우스는 이제 좌중을 둘러보며 호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남은 만찬을 즐기도록 하자. 영웅들이여, 신들의 다툼 덕분에 모두 저승 세계에서 고생이 많았다. 남은 시간 동안 마음껏 먹고 마시도록 하라.”
제우스가 말을 마치자마자 영웅들은 테이블에 있는 나머지 음식들을 먹기 시작했다.
대규 역시 영웅들의 테이블로 돌아왔다.
모든 영웅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부분 질투 어린 시선과 부러움이 뒤섞인 시선이었다.
대규는 그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그런데 자기가 앉아있던 의자에 누군가가 먼저 앉아있었다. 바로 좀 전에 케이른과 진한 입맞춤을 나누고 있었던 아프로디테 휘하의 여자 영웅이었다.
그녀 옆에 앉은 케이른은 그녀에게 연신 느끼한 멘트를 해대고 있었다.
“…처음 이곳 신전에 올 때, 그러니까 절벽에서 비아락테아를 건너올 때부터 나는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호호호, 케이른 우리 쟈기 말솜씨도 참…….”
“솔직히 나는 자기가 아프로디테 여신보다 훨씬 예쁜 것 같아. 그대의 눈동자에 건배~”
케이른은 말을 마친 뒤 앞에 있는 술잔을 들고 느끼한 표정으로 건배를 청했다. 마치 버터 수십 개를 품은 것 같은 눈빛이었다.
“아잉~”
여자 영웅 역시 잔을 들며 교태 어린 콧소리를 냈다.
고고한 영혼을 지닌 켄타로우스 영웅 나리의 모습은 대체 어딜 가신 것인지.
대규는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탁 치며 말했다.
“제 자리입니다. 비켜주시죠?”
“아, 대규 왔나?”
케이른이 갑자기 목소리를 바꿔서 말했다. 좀 전의 느끼한 말투와 달리 몹시 차가운 목소리다.
“호호, 그럼 전 이만 실례할게요.”
매력적인 미소를 지은 뒤 여자 영웅은 자신의 본래 자리로 돌아갔다.
대규는 그제야 자신의 의자에 앉았다. 케이른은 저 멀리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 푹 빠졌군.
대규는 자신의 잔을 들며 케이른에게 물었다.
“그런데 물욕의 지옥에선 대체 둘이서 뭘 한 겁니까?”
지도창에서 움직이지 않았던 하얀 점 두 개를 떠올리며 케이른에게 묻자 그는 얼굴을 붉히며 당황한 듯 외쳤다.
“뭐라고?! 네가 대체 그걸 어떻게…….”
아차, 공략집 지도창에 대해서 케이른은 모르고 있지.
그는 주변을 둘러본 뒤 대규에게 조용히 하란 제스처를 취하고 이렇게 속삭였다.
“조용히, 조용히 해라! 애들은 몰라도 된다!”
그의 얼굴은 이제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좀 전에 아프로디테 여신이 응큼하게 웃었던 걸 생각하면 대충 둘이 뭘 했을지 짐작은 갔다.
“좋으셨습니까?”
대규가 묻자 케이른은 헛기침을 하면서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더이상의 내용은 노코멘트 하겠다. 나는 고고한 켄타로우스 족의 영웅이다. 아테나 여신을 실망시키는 짓은 절대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왜 신들의 테이블에 있는 아테나 여신의 눈치를 계속 보는 건데?'
그러자 케이른을 바라보고 있던 대규 옆 어인 파스키스가 킥킥대며 말했다.
“아주 기분이 좋았겠지. 800년 만에 생긴 여자친구일 텐데.”
파스키스는 케이른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하지만 조심하라구, 케이른. 아프로디테 여신 휘하 영웅들은 그 여신의 성격을 쏙 빼닮아서 여우 같은 구석이 있는 여자들이라구.”
물론 케이른의 귀엔 그런 얘기가 전혀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는 이제 넋 나간 표정으로 저 멀리 앉아있는 그녀와 눈짓을 교환하기 바빴다.
그나저나 800년 만에 생긴 여자친구라면 대체 케이른의 나이는 몇인 거야.
어쨌든 대규는 기분이 좋았다.
징표에 갑옷까지 얻었다. 빨리 사흘 뒤에 완성될 갑옷이 궁금했다.
지옥의 금속으로 만들어진 신화 등급 갑옷이라니! 그것도 헤파이스토스 신이 직접 만든 갑옷이다.
얼마 후 만찬의 음식들은 다 비워졌고 공식적인 파티는 슬슬 마무리되고 있었다.
제우스 신이 영웅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아주 즐거웠다. 다음 전투에서도 그대들이 열심히 싸워서 저 사악한 거인족 무리를 모조리 무찌를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