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
123화 인페리 페룸 (2)
키메라 역시 달려오는 대규를 알아보고는 그를 향해 전력 질주해왔다.
“키에엑!”
괴성을 내지르며 사자 머리가 주둥이를 크게 벌렸다. 날카로운 이빨들 사이, 목젖 틈에서 검붉은 구슬 같은 것이 보였다.
검은 화염을 발사하려는 것이다.
퍼엉!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녀석의 주둥이에서 검은 불길이 터져 나왔다.
대규는 재빨리 사슬검을 들어 불길을 막아보려 했다. 닥튈로이의 반지도 마력저항 효과로 몸 전체에 투명막을 형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온몸이 녹아내릴 것처럼 뜨거웠다. 투명막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흑린갑의 비늘들이 빳빳하게 서면서 반응할 정도였다.
‘빌어먹을!’
심지어 검은 불길은 반지가 형성한 투명막을 뚫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정말로 피부가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생명력의 3분의 1이 단번에 팍 줄어들었다.
‘일단 도망치자!’
대규는 헤르메스의 장화를 이용해 녀석과 최대한 거리를 두며 달아났다.
펄럭, 펄럭!
하지만 키메라 역시 날개를 펄럭이며 무서운 기세로 대규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녀석이 주둥이를 다시 벌렸고 또다시 목젖에서 검붉은 구슬이 보였다.
솔직히 저 화염 공격의 위력이 이정도일 줄 몰랐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공략집으로 영상을 봤다 해도 실제로 적의 공격을 겪는 것은 천지 차이였다.
‘그래도 공략집이 있었으니 망정이지. 생판 모르고 덤벼들었다간 더 큰 충격을 받고 전의를 상실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녀석을 어떻게 쓰러뜨려야 할까.
‘저 불길의 위력이 조금만 약해도 해볼 만할 텐데! 크윽…….’
그때 목에 걸린 라의 목걸이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머리 속을 퍼뜩 스치는 생각 하나.
분명 마신들이 보유하고 있는 스킬 중 상대방의 모든 스탯과 능력치를 감소시킬 수 있는 스킬이 있었다.
‘파라오의 저주!’
그걸 한 번 써보자.
시간이 없었다. 녀석의 주둥이에서 다시 검은 화염이 뿜어져 나왔다.
대규는 녀석의 화염 공격 사정거리를 최대한 벗어나길 바라며 전속력으로 도망쳤다.
펑!
이번에 발사된 검은 화염은 대규의 발끝 주변 방어막에만 살짝 닿았다.
‘휴. 아슬아슬했다.’
그래도 발가락들이 다 떨어져 나갈 만큼 괴로웠다.
라의 목걸이를 바라봤다. 황금빛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고 곧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능력을 빌려올 마신과 그의 스킬을 선택하십시오.]
키메라 녀석은 다시 한 번 주둥이를 벌리고 있었다.
“태양신 라의 파라오의 저주! 빨리, 빨리!”
[태양신 라가 흔쾌히 파라오의 저주 스킬을 빌려줍니다. 상태창의 보유 스킬란에서 스킬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마신의 능력을 빌려올 기회는 이제 1회 남았습니다.]
스킬을 확인했다.
[파라오의 저주(횟수 제한 0/1)-이 저주에 걸린 상대방은 1시간 동안 온갖 능력과 스탯이 50% 감소하게 된다. 마나 소모 150.]
빠르게 키메라를 향해 스킬을 시전했다.
곧 녀석의 머리 위로 황금빛 가루 같은 것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당황한 녀석은 주둥이의 화염을 거두고 머리 위의 황금 가루를 앞발로 가격했다.
‘저게 스킬인가?’
파라오의 저주 스킬은 체험판을 사용해보지 않았다. 설명만 봐도 그 효과가 너무 명확했기 때문에 굳이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규도 이 스킬의 시전 광경은 처음 본다.
녀석의 앞발은 허망하게 공중을 휘두를 뿐 황금 가루는 여전히 녀석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루는 이제 서서히 기분 나쁜 검은 빛으로 변해 키메라의 온몸을 감쌌다.
“키에에엑!!”
녀석의 사자 머리와 숫염소 머리가 동시에 비명을 질러대며 몸을 꿈틀거렸다.
꼭 전기에 감전돼 발작이라도 일으키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으으… 내가 시전했으니 망정이지 절대로 당하고 싶진 않은 스킬이군.’
얼마 후 검은 가루는 사라졌고 키메라 역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정신이 든 키메라는 이제 더욱 맹렬하게 대규를 쫓아왔다.
그런데 확실히 아까보다 스피드가 줄었다.
‘스탯이 50% 감소한 효과인가?’
아까보다 녀석과 자신의 거리 차이는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키에엑!”
녀석이 열받은 표정으로 주둥이를 벌려 다시 검은 화염을 쏘려고 했다.
펑!
쏘아진 불길이 대규의 몸 주변의 투명막을 감쌌다.
확실히 약해졌다. 아깐 온몸이 녹아버릴 정도였는데 지금은 그래도 버틸 만했다.
‘그래도 사슬검의 화염 방어와 반지의 마력저항 효과가 있으니까 이 정도인 거겠지.’
생명력도 확인해봤다. 확실히 아까보다 입는 데미지의 양도 줄었다.
‘그래, 이 정도면 해볼 만하다!’
녀석이 다시 불길을 쏴댔고 대규는 그걸 사슬검으로 쳐냈다.
퍼버벙!
사슬검의 칼날에서 타오르는 시뻘건 불카누스의 화염과 키메라의 검은 화염이 맞닿은 순간 큰 폭발음이 났다.
얼마 후 검은 화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럼 본격적으로 공격 개시다.
타탓.
녀석의 머리 위쪽으로 높게 날아갔다.
목표는 녀석의 두 날개. 날개를 먼저 공격해 움직임을 봉쇄할 심산이었다.
“레툼 익투스!”
수십 개의 검광이 키메라를 향해 날아갔다.
키메라는 그 커다란 몸뚱이를 요리조리 움직이며 검광들을 피했다. 하지만 진짜 일격의 기운이 녀석의 날개를 베어버렸다.
서걱-
“끼에엑!”
공격이 명중하자 살로메의 보석이 바로 녀석의 생명력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이제 날개에 부상을 입은 녀석은 대규에게 쉽사리 덤벼들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좋았어. 이젠 공중전이 아니라 지상전이다.
“그럼 이제 해치워 주마!”
녀석들의 세 개의 머리를 모조리 베어야 쓰러뜨릴 수 있다.
하지만 공략집에 따르면 그 머리들은 몹시 단단하다고 했다.
‘아무리 단단하다 해도 근육과 뼈로 이뤄진 구조물일 터.’
스킬을 계속해서 시전하면 어느 순간 베어지겠지.
대규는 허공 위로 날아올라 사슬검을 높게 쳐들며 다시 레툼 익투스를 외쳤다.
화염구를 품은 검광들과 함께 일격의 기운은 세 개의 머리를 정확하게 베어버렸다.
하지만 녀석들은 아주 작은 상처만 입었을 뿐이다.
몇 번이고 스킬을 시전해 녀석들의 목을 공격해봤다. 하지만 작은 상처만 낼 수 있을 뿐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제야 겨우 녀석들의 몸에서 피가 조금씩 흘러나왔다.
‘빌어먹을. 완전 노가다잖아.’
게다가 키메라는 힘을 잃었다 해도 여전히 공격해댔다.
이 상태라면 쓰러뜨리는 데 적어도 한 시간은 더 걸릴 것 같았다.
‘뭐, 그래도 노가다라도 해서 잡으면 그게 어디야.’
다시 스킬을 시전하려 하는데 위쪽에서 커다란 굉음이 들렸다.
우르릉! 쾅쾅!
동굴의 천장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동굴의 위층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저 굉음,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설마…….’
대규의 표정이 굳어졌다.
재빨리 지도창을 불러내 확인했다.
‘설마가 맞았다.’
하얀 두 개의 점, 그러니까 케이른과 아프로디테 휘하 여자 영웅이 빠른 속도로 위층 동굴을 돌파해오고 있었다.
좀 전의 굉음은 아무래도 케이른이 시전한 뇌전스킬인 것 같았다.
‘귀찮게 됐군.’
이대로라면 얼마 후 그들은 당장 이곳으로 들어올 것이다.
물론 셋이서 싸운다면 키메라를 더욱 빨리 잡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러긴 싫었다.
'여태까지 고생해서 키메라의 힘을 다 빼놨는데!'
게다가 최고의 영웅 칭호와 갑옷, 징표는 한 사람에게만 준다고 했다.
솔직히 저들이 이곳에 도착하기 전 키메라를 해치우고 인페리 페룸을 챙겨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저 녀석의 머리들이 떨어지려면 아직 멀었다.
‘혹시 그 녀석이라면……?’
대규는 라의 목걸이로 부를 수 있는 한 존재를 떠올렸다.
무시무시한 위력으로 상대방을 순식간에 잡아먹어 버리는 괴물 뱀 아포피스.
그 단단한 거죽을 지녔던 거인 기가스 팔라스의 목도 단번에 잡아 뜯어 버릴 정도로 엄청난 악력을 자랑하는 괴물뱀이다.
그전이라면 이미 하루에 한 번 능력을 빌려올 수 있는 기회를 소진해 불가능 하겠지만 목걸이를 업데이트한 지금은 아니다.
‘목걸이에 아이가이온의 왕관을 박아넣길 잘했다.’
물론 기가스 팔라스보단 이 키메라의 목이 훨씬 단단할 것이다. 아무리 파라오의 저주로 50% 스탯을 감소시켰다 해도 키메라는 기가스 팔라스보다 훨씬 상위 종의 몬스터다.
하지만 아포피스 녀석이 물어뜯으면 저 단단한 머리들도 지금보다 훨씬 너덜너덜해지긴 하겠지. 그럼 지금보단 더욱 빨리 녀석을 쓰러뜨릴 수 있다.
‘망설일 거 없어. 지금 당장 부르자.’
어차피 키메라를 쓰러뜨리면 더 이상 쓰러뜨릴 몬스터도 없으니 라의 목걸이를 쓸 일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에도 케이른과 아프로디테의 여자 영웅은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는 중이다.
현재 자신의 권위 스탯은 23. 그럼 총 23초를 소환할 수 있다.
당장 목걸이를 쳐다봤다.
그러자 메시지창이 다시 떠올랐다.
[능력을 빌려올 마신과 그의 스킬을 선택하십시오.]
“라의 아포피스 소환!”
[태양신 라가 흔쾌히 아포피스 소환 스킬을 빌려줍니다. 상태창의 보유 스킬란에 가보면 아포피스 소환 스킬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마신의 능력을 빌려올 기회를 모조리 소진하셨습니다.]
망설일 거 없이 아포피스를 소환했다.
쿠구궁! 쾅!
굉음과 함께 동굴 안의 허공 틈이 길게 좌륵 갈라졌다.
그리고 그 틈에서 꿈틀거리며 나오기 시작하는 거대 괴물 뱀 아포피스!
녀석의 모습은 언제 봐도 장관이었다.
아포피스를 본 키메라 역시 살짝 당황한 것 같았다. 그 증거로 녀석의 몸에 난 털들이 정전기라도 일어난 것처럼 쭈뼛 서고 있었다.
‘그래, 좀 놀랄 거다. 나도 처음 봤을 때 그랬으니까.’
하지만 키메라는 저승 세계 지옥의 최대 관문 보스답게 아포피스를 향해 장렬하게 주둥이를 벌리고 검은 화염을 쏟아냈다.
펑!
검은 화염이 아포피스의 얼굴에 명중했다.
“크어어어!”
아포피스가 괴롭다는 듯 굉음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검은 화염을 맞은 얼굴 부위가 녹아내리고 있었다.
아포피스는 꽤나 열 받은 듯 주둥이를 크게 벌린 뒤 키메라의 세 머리들 덥썩 물어버렸다.
아포피스의 송곳니들이 키메라의 머리들 속으로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하지만 키메라의 머리들 역시 만만치 않았다.
아포피스의 무시무시한 악력에도 머리들은 절단나지 않았다.
‘대체 얼마나 단단하단 거야.’
하지만 곧 점점 피가 많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 때다.
대규는 그 틈을 타 키메라를 향해 달려갔다.
아포피스가 녀석의 머리들을 물고 있는 사이 자신도 스킬을 날려 공격하려는 심산이었다.
“레툼 익투스!”
번쩍-
화르륵-
수십개의 검광과 일격의 기운이 키메라의 머리들을 노리고 날아갔다.
서걱-!
녀석의 몸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곧 세 개의 머리들이 아래쪽으로 떨어졌다.
‘성공이다!’
풍덩!
떨어진 머리들은 호수의 검푸른 물속으로 떨어졌다. 그때 마침 허공의 틈이 다시 갈라졌고 아포피스는 꾸물꾸물 거리며 그 틈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곧 눈앞에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키메라를 해치웠습니다.]
[대량의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마나를 80 흡수했습니다.]
[레벨이 1단계 상승했습니다.]
온몸에서 하얀빛이 일어났다. 레벨업을 한 것이다.
덕분에 온몸이 가벼워졌다. 좀 전까진 키메라의 화염 때문에 온몸이 화상이라도 입은 듯 몹시 따가웠는데 그 느낌도 사라졌다.
보관함을 보니 블랙 등급 젬스톤이 2개 들어 있었다. 본래 쓰러뜨리고 받은 것과 미다스의 손 효과로 추가로 얻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레벨업과 블랙 등급 젬스톤에 감탄할 때가 아니었다. 빨리 인페리 페룸을 채집해서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그런데 인페리 페룸은 대체 어딨는 거야?’
아무리 둘러봐도 금속 비슷한 건 보이지 않았다. 단지 광활한 호수만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때 호숫물이 거세게 물결치기 시작했다.
우우웅.
호수 한가운데에 작은 섬 하나가 서서히 돋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