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
116화. 저승의 강 (1)
대규는 더욱 빠르게 수직 낙하해서 날아갔다.
드디어 도착한 바닥은 보라색의 빛나는 광석들이 카펫처럼 쫘르륵 박혀 있었다.
“우와아…….”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이곳이 하데스의 저승 세계인가?
저승 세계라고 해서 되게 음침하고 어두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눈앞의 풍경은 아주 신비로웠다.
‘그것보다 어디로 가야 하지?’
대규는 공략집의 지도창을 켰다. 광석들 사이로 가느다란 길이 나 있는 게 보였다. 길 끝에서는 노란 점이 반짝이고 있었다.
노란 점을 손끝으로 누르자 설명이 떠올랐다.
<저승의 입구로 가는 네 개의 강이 시작되는 출발점입니다.>
<네 개의 강을 건너야 저승의 입구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강둑에 도달해 뱃사공 카론을 만나 그의 배를 타고 네 개의 강을 건너야 합니다.>
‘그렇다는 건 이곳은 아직 저승이 아니란 뜻인가.’
대규는 재빨리 광석 사이에 난 길을 뛰어갔다. 저 멀리 거대한 강과 가느다란 둑이 보였다. 뱃사공 카론을 찾았다.
저 멀리 배 한 척과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이 보였다.
노인에게 다가가자 공략집이 떴다.
-차원의 틈 공략집-
정령 이름: 카론(Charon)
특징: 죽음의 배를 모는 뱃사공으로 죽은 자들의 영혼을 저승으로 안내한다. 그가 모는 배는 보호 마법이 걸려 있어 마력이 깃든 지옥의 네 개 강을 무사히 건널 수 있다. 뱃삯을 지불해야 카론은 배를 몰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아테나 여신이 준 황금동전은 이 카론의 뱃삯인 것 같았다.
신화 책에도 저승의 뱃사공 카론에게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내용을 읽은 적이 있었다.
대규는 카론에게 황금동전을 건네며 말했다.
“저를 저승으로 안내해 주십시오.”
그러자 카론이 동전을 받아 든 뒤 대규를 유심히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는 망자가 아니군. 그래, 하데스 신에게 방금 전갈을 받았지. 임무를 수행하러 온 영웅인가 보구만.”
“그렇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 저승으로 가겠다는 건 정말 오랜만이야.”
하지만 카론은 배를 움직이지 않았다.
“왜 안 움직이십니까?”
대규가 묻자 그가 버럭 소리쳤다.
“이 배를 봐라. 적어도 10인승이야. 그런데 너 혼자 태우고 가라고? 다른 영웅들을 기다렸다가 더 태우고 갈 거다! 나도 몇 번씩 중노동하긴 싫다구.”
그럼 내가 제일 먼저 저승에 들어갈 수 없게 되잖아.
얼마 후, 저 멀리서 오크 두 명이 요란하게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오크들은 배에 탄 대규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뭐야, 이 자식! 넌 언제 온 거냐?”
“흥, 상관없다. 저따위 비리비리한 녀석 따윈 이 몸들께서 제껴 주지.”
그러자 카론은 오크들을 째려보며 한 소리 했다.
“쫑알쫑알 말 많은 오크 녀석들아, 통행료나 빨리 내라.”
“칫, 돈 밝히는 영감탱이 같으니라구.”
오크들 역시 대규가 내밀었던 것과 똑같이 생긴 황금 동전을 내밀었다. 아무래도 그들 역시 아레스 신이 뱃삯을 챙겨 준 것 같았다.
그들이 배에 올라타자 배가 살짝 기우뚱했다.
“10인승짜리 배지만, 네 녀석들의 덩치가 너무 커서 정원이 초과돼 버렸다. 어쩔 수 없군. 강을 건너도록 하지.”
말을 마친 카론은 커다란 장대로 강물을 젓기 시작했다.
첫 번째 강에 들어서자 메시지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저승으로 가는 길목의 첫 번째 강인 비통의 강 아케론(Acheron)에 진입했습니다.]
저승의 강이라 뭐가 좀 다를 줄 알았는데, 비교적 평범해 보이는 강이었다.
오크들은 저희끼리 뭐가 신났는지 연신 히히덕거렸다. 그러다 그중 한 명이 대규에게 말을 걸었다.
“이봐, 나는 판테온 최고의 신이자 유일한 전쟁의 신이신 아레스 신 밑의 대장군 가로쉬라고 한다. 이쪽은 나와 같은 대장군 우르크라고 하고.”
‘유일한’ 전쟁의 신이란 표현이 상당히 거슬렸다. 아테나 여신도 전쟁의 신이다.
대규는 딱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테나 여신 휘하의 세미데우스 김대규다.”
그러자 그들이 크게 비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크하하! 전쟁의 신을 표방하는 그 여신 말이군!”
“표방하는 게 아니라 진짜 전쟁의 신이시다.”
대규가 대꾸하자 그들은 콧방귀를 뀌며 쏘아붙였다.
“웃기는군! 무릇 전쟁의 신이라면 피를 사랑하고 전쟁의 광기에 몰두해야 하거늘! 너희 여신은 그러기는커녕 지략이다, 전술이다, 하며 겁쟁이같이 머리나 굴리기 바쁘지.”
그런 오크들을 보며 대규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식하면 몸이 고생한다지.”
그러자 그 말을 들은 오크 가로쉬가 콧김을 씩씩 위협적으로 뿜으며 외쳤다.
“뭐? 이 자식! 방금 뭐라고 했냐! 흥, 누가 최고의 영웅 칭호를 받나 두고 보자. 그 칭호는 아레스 신님 휘하 영웅인 우리가 받게 될 것이다!”
“최고 영웅 칭호는 가장 지옥을 빨리 통과하는 단 한 명에게만 주어진다고 했다, 이 멍청이들아.”
그 말에 가로쉬는 아둔한 표정을 지으며 홀로 중얼거렸다.
“어어… 그랬나? 안 되겠다. 그럼 우르크, 네가 나에게 양보해라.”
그러자 우르크가 입을 삐죽이며 대꾸했다.
“싫다! 네가 양보해라. 솔직히 내가 너보다 힘도 더 세다.”
“쪼잔한 자식. 팔씨름 한 번 이긴 것 갖다가…….”
그들의 말싸움을 듣다 못한 뱃사공 카론이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조용히 해라, 이 오크 녀석들아!”
카론은 노를 젓던 장대로 오크들의 머리를 텅, 텅 때렸다.
“이 늙은이가!”
오크들이 배틀 엑스를 꺼내 휘두르자 카론은 재빨리 그 도끼들을 피한 뒤 다시 장대를 휘둘러 오크들의 머리를 다시 한 번 가격했다.
“가만히 있지 않으면 너희들을 이 아케론 강물에 빠뜨려 버릴 테다!”
그제야 오크들은 바로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 대규는 바로 태도가 뒤바뀐 오크들의 모습을 보자 의아스런 마음이 들었다.
‘왜 저러지? 수영을 못하나.’
그것보다 좀 전부터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강물 속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처음에는 물결 소리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흐흑…….
흐흐흑…….
꼭 누군가가 흐느끼는 소리 같았다.
강물 속을 바라본 대규는 깜짝 놀랐다.
‘저게 뭐람?’
허연 좀비 같은 시체들이 강물 속에서 팔을 휘두르며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흐느낌은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카론이 그 시체들을 보며 말했다.
“비통에 젖은 망자들이다. 보호 마법이 걸려 있는 이 배가 아니었으면 너희들은 벌써 공격당했을 것이다. 살아 있는 존재는 망자의 맛있는 먹이니까.”
헤르메스의 장화로 이 강을 건너려 했으면 꽤 고생했겠다.
얼마 후, 거대한 아치형의 다리가 보였다. 다리를 지나자 망자들의 흐느끼는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두 번째 강에 들어선 것이다.
[저승으로 가는 길목의 두 번째 강인 시름의 강 코퀴토스(Cocytos)에 진입했습니다.]
이 강의 강물은 아주 맑고 투명했다. 그런데 강물 속엔 암석이나 물고기 하나 보이지 않았다.
‘망자들이나 몬스터 같은 건 없는 건가?’
그때 공략집이 떠올랐다.
<시름의 강 코퀴토스는 강을 건너는 자의 생전 과거를 보여 줍니다. 과거를 본 자들은 시름에 젖게 됩니다.>
‘과거를 보여 준다고?’
대규는 투명한 강물을 바라보았다.
그때 투명했던 물길 속에서 이상한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도 모르게 배에서 몸을 쭉 빼고 물길 속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 할머니와 둘이 지냈던 모습이 보였다.
할머니와 시골집에서 둘이 행복하게 살아왔던 모습들…….
‘할머니!’
눈시울이 붉어졌다. 강물 속의 할머니는 밥을 떠서 호호, 불어 준 뒤 어린 대규에게 먹여 주고 있었다. 배탈이 났을 때 열심히 배도 만져 주셨던 모습도 보였다.
저도 모르는 사이, 대규는 상체 전체를 배 밖으로 쭉 빼고 있었다.
그때 공락집의 창이 떠올랐다.
<과거를 보여 주는 강물의 현혹 마법이 작동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 닥튈로이의 반지가 빛나기 시작했다. 유혹이나 저주 계열의 마법으로부터 지켜 주는 능력이 발동한 것이다.
어느새 강물 속에서 할머니의 모습은 사라져 버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거의 강물 속으로 다이빙할 듯 상체를 배 바깥쪽으로 쭉 내민 상태였다.
겨우 몸을 추스르고 있는데 카론이 킬킬거리기 시작했다.
“흐흐흐, 이 배 자체에는 마법이 걸려 있어서 괜찮지만, 저렇게 강물 속의 모습을 보려 배 바깥쪽으로 몸을 빼면 현혹 마법에 걸려 버리지.”
옆을 보니 오크 정령 두 명의 모습은 아주 가관이었다.
“으흐흑… 엄마, 엄마!”
“흑흑…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그렇게 잘난 척하면서 전쟁의 영웅 행세는 다 하던 녀석들이.’
심지어 그들은 눈시울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상태였다. 거의 다이빙하듯이 몸을 강물 쪽으로 밀어 넣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차고 있던 배틀 엑스가 빛나기 시작했다.
번쩍!
아무래도 저 무기는 마력 저항이 담긴 무기이거나 저주, 유혹 계열 마법을 물리치는 특수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도끼가 빛나자마자 오크들은 정신을 차렸다.
주변을 둘러보더니 킬킬거리는 카론을 발견하고는 바로 근엄한 척하며 태도를 바꿨다.
“흠흠!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과거 따위에 휘둘리지 않는 오크가 진정한 오크인 법! 과거는 과거일 뿐…….”
눈가에 맺혀 있는 눈물자국이나 좀 닦고 말해라.
‘저 자식들, 코미디언인가?’
오크들을 구경하는 사이 어느새 세 번째 강인 불길의 강 플레게톤(Phlegethon)에 진입했다는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그 창을 본 오크 정령들과 대규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플레게톤의 불!
그것은 제우스가 말했던 갑옷의 주재료 중 하나였다. 분명 이곳 강에서 얻어야 하는 것이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강은 시뻘건 불길들로 이뤄져 있었다.
정확히는 용암 같은 시뻘건 액체가 출렁이며 강을 이루고 있었다.
오크 중 한 명이 신에게 건네받은 유리병을 들고 팔을 배 밖으로 내밀었다.
“앗, 뜨거워!”
그 순간, 그의 팔 전체에 불이 붙어 버렸고, 그는 재빨리 배 안쪽으로 팔을 가져왔다. 그러자 배의 보호 마법 때문인지 그의 팔에 붙은 불은 꺼져 버렸다. 물론 화상의 흔적은 남았다.
대규의 눈앞에 공략집 설명창이 떴다.
<플레게톤의 불은 모든 걸 다 태워 버립니다. 배 밖으로 나가면 웬만한 생명체는 불타 죽어 버립니다.>
그래서 여신이 특수한 유리병을 줬던 거구나.
심지어 보호 마법이 걸려 있는 배에 타고 있지만 강으로부터 퍼져 나오는 열기는 어쩔 수 없었다. 열 사우나에 들어간 것처럼 매우 후끈거렸고, 땀이 뻘뻘 나기 시작했다.
카론은 묵묵히 노를 저어 강을 통과하고 있었다.
‘제기랄, 대체 어떻게 저 불을 유리병에 담아야 하지?’
그때 공략집이 떠올랐다.
<사슬검을 구성하고 있는 재료 불카누스의 입김은 플레게톤 강물의 불길을 이겨 낼 수 있습니다. 불카누스의 사슬검을 이용해 불길을 채취하십시오.>
‘이 사슬검은 화염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건가? 한번 해 보자.’
대규는 사슬검을 배 바깥쪽으로 휘둘렀다. 확실히 검에는 불이 붙지 않고 멀쩡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사슬검으로 불을 채취해 배 안으로 가져오면 배 안의 보호 마법이 발동해서 채취한 불길이 바로 꺼져 버렸다.
‘흐음, 그럼 유리병을 사슬검에 묶어서 채취해 보자.’
대규는 사슬검의 사슬 칼날로 병을 둘둘 감았다. 그리고 배 밖으로 검을 휘둘러 강 안에 넣었다.
‘성공이다.’
유리병 안에 플레게톤의 불길이 담겨져 있었다.
유리병엔 특수한 마법이 걸려 있는지 재 안으로 들어와도 병 안의 불길이 사그라지거나 하진 않았다.
‘좋았어!’
그런데 옆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우르크! 내가 희생해서 불길을 채취하겠다. 네가 살아남아라.”
“가로쉬, 그럴 순 없다.”
“하지만 방법이 없다! 너라도 살아남아서 아레스 신께 영광을 가져다줘라.”
말을 마친 후, 그들은 비장한 표정으로 서로를 껴안았다. 그리고 가로쉬는 유리병을 들고 배 밖으로 뛰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