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
99화. 불카누스의 입김
“그게 정말입니까?”
대규가 놀란 목소리로 묻자 여신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다. 그대같이 뛰어난 영웅과 함께 싸울 생각을 하니 벌써 기대되는구나. 그럼 다음 소환될 때까지 잘 쉬고 있거라.”
아테나 여신과 함께 전투에 참가한다니.
“알겠습니다.”
대규는 고개 숙여 이렇게 말한 뒤 여신의 신전을 나왔다.
산양 병사와 황금 갑주를 입은 여자 정령이 그를 신전 바깥까지 안내했다.
이제 허가증도 얻었겠다, 헤파이스토스의 대장간으로 돌아가 무기를 제작할 차례였다.
대장간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몹시 가벼웠다.
* * *
상업 구역의 대장간에 도착한 대규는 수석 대장장이인 파베르를 향해 말했다.
“여기 가져왔습니다.”
“뭐요?”
대답 대신 여신이 내준 허가증을 턱 내밀었다.
파베르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내민 허가증을 바라보더니 놀란 눈빛으로 이렇게 말했다.
“이건 분명 아테나 여신의 인장이 맞군. 알겠소. 당장 무기 제작에 들어가도록 하지. 이곳에 무기들과 허가증을 올려놓으시오.”
파베르는 거대한 모루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 모루는 대규가 지니고 있는 헤파이스토스의 모루처럼 새까맸다. 대신 모루 위는 몹시 반질거렸고, 크기와 면적 또한 다섯 배 정도 컸다.
대규는 모루 위에 체인 블레이드와 카리브디스의 이빨, 그리고 여신의 허가증을 올려놓았다.
그러자 허가증에 찍혀 있던 인장이 사르르 녹으며 카리브디스의 이빨과 체인 블레이드에 스며들었다.
파베르가 커다란 집게를 가져오며 말했다.
“무기는 여기서 조금만 기다리면 완성될 거요. 참, 그런데 무기 제작 비용을 지급하셔야지.”
“예?”
“모른 척하지 마시오. 설마 공짜로 무기를 제작하려는 건 아니죠? 우리도 먹고살아야 할 것 아니요.”
그건 그렇군.
대규는 파베르를 보며 물었다.
“비용은 지불하겠습니다. 얼마입니까?”
파베르는 모루 위에 올려놓은 이빨로 체인 블레이드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전설 등급의 아이템 중에서도 최상인 카리브디스의 이빨과의 무기 조합이라… 게다가 결과물은 신화 등급의 무기고… 그럼 블랙 등급 젬스톤 1개 정도면 적당하겠군.”
‘블랙 등급 젬스톤 1개!’
대규는 그가 일전의 상점 주인처럼 사기 치는 게 아닌가 싶어 공략집으로 제대로 된 무기 제조 가격을 알아봤다. 하지만 공략집에도 이 정도 무기 제작엔 블랙 등급 젬스톤 1개가 적정 가격이라고 나왔다.
하지만 아무래 그래도 너무 비싼 것 같아 젬스톤을 꺼내길 망설이자 파베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바가지는 아니니까 걱정 마쇼. 이래 봬도 우린 대장간의 신 헤파이스토스 님의 긍지를 물려받은 정직한 대장장이들이라고. 싫으면 다른 곳으로 알아보시든지.”
대규는 군말 없이 블랙 등급 젬스톤 1개를 비용으로 지불했다.
‘확실히 신화 등급 무기 제작이라 그런지, 다르구나. 게다가 대장장이들이 지니고 있는 뛰어난 제작 기술에 대한 대가도 비용에 포함돼 있겠지. 하지만 그만한 가치를 할 거야.’
게다가 다음번 소환부턴 여신과 함께 본진으로 간다. 그곳에서 나오는 적들은 방어전을 치러 냈던 동부 전선에 비해 훨씬 강력할 것이고, 그들을 상대하려면 좋은 무기가 필요하다.
파베르는 대규가 건넨 블랙 젬스톤을 받아 들고 무기 제작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대규는 대장간 벽에 걸려 있는 거대한 천 조각을 바라보았다.
일전에 공략집이 알려 줬던, 헤파이스토스 신의 고대 무기 제작술이 적혀 있는 천이었다.
그 모습을 본 파베르가 물었다.
“대장장이 기술, 그러니까 야금술에 혹시 흥미가 있소?”
“네?”
“저건 헤파이스토스 신께서 우리 대장장이 제자들에게만 전수하는 신비한 고대 기술이오. 여기 와서 대장장이가 아닌데도 저걸 관심 있게 바라보는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라서 묻는 겁니다.”
“아니, 꼭 그런 건 아닙니다. 대장장이 기술은 잘 알지도 못하고 저와는 거리가 멀어서…….”
심지어 게임을 하면서도 대장장이 직업은 단 한 번도 선택해 본 적이 없는 대규였다.
그러자 파베르는 대규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했는지 언성을 높여 이렇게 말했다.
“이보시오, 대장장이를 무시하지 말라구! 우리는 나름 판테온의 세계에서 잘나가는 전문 기술직이라오. 이곳에서 야금술은 알아주는 고급 기술이고 여자 신들과 정령들이 바라는 1순위 신랑감의 직종이요. 게다가 우리는 하나같이 몸짱이기도 하다구!”
실제로 오픈 대장간인 이곳 대장간 주변엔 여자 정령들이나 반신반인들이 아이돌 팬클럽처럼 모여서 대장장이들의 모습을 넋 나간 듯 구경하고 있었다.
대장장이들은 그런 그녀들의 모습을 의식하며 더욱 근육을 울룩불룩 노출하며 요란하게 망치를 깡깡, 두들기고 있었다.
‘혹시 오픈 대장간인 이유가 이런 팬 서비스 차원인가?’
아무래도 인간 세상에서의 대장장이와는 좀 다른 것 같았다.
파베르는 슬슬 무기 제작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대규는 이런 생각을 했다.
‘그런데 야금술을 배워 놓으면 혹시 나 혼자서도 무기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지금 현재 갖고 있는 헤파이스토스의 모루는 저절로 무기 제작을 해 주긴 하지만 신화 등급 이상의 무기 제조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야금술을 배워 스스로가 무기를 제작할 수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뭐, 당장 급한 일도 아니니까 이건 나중에 생각하자.’
파베르는 들고 있던 집게로 카리브디스의 이빨을 집어 달궈진 용광로에 넣었다.
거기에 다른 물질들을 첨가했다. 언뜻 보니 작은 불꽃들로 이뤄진 가루 같았다. 가루들은 허공에서 불꽃놀이 폭약처럼 파파팟, 소리를 내며 튀었다.
그 불꽃 가루를 바라보자 공략집이 떠올랐다.
<불카누스의 입김>
<불의 신 불카누스의 입김으로 무기 제작 시 첨가하면 무기의 화염 공격력을 강화시켜 준다. 카리브디스의 이빨을 다른 검에 조합, 장착시키기 위해서 꼭 필요한 재료.>
그런데 처음 보는 메시지창이 그 뒤에 연달아 떠올랐다.
<불카누스의 입김으로 무기를 제작하는 자세한 제조법 및 조합법을 아시려면 야금술(초급)을 익혀야 합니다.>
아무래도 재료를 단순히 그냥 섞는다고 무기가 다 제작되는 건 아닌 것 같다.
그것보다 야금술도 익힐 수 있는 스킬의 종류 중 하나였다니.
부글부글.
메시지창에 정신이 팔려 있는데 귀에 질퍽한 액체가 끓어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용광로 속에서 불카누스의 입김과 카리브디스의 이빨이 순식간에 녹아 끓고 있었다. 파베르는 용광로 앞의 손잡이를 돌려 용융(熔融)된 카리브디스의 이빨을 받았다. 녹아 버린 카리브디스의 이빨은 황금빛이었다.
이후 파베르는 수많은 검틀 중 하나를 가져와 모루 위에 올려놓고 그 안에 체인 블레이드를 넣었다. 검틀은 체인 블레이드와 그 크기나 모양이 똑같았다. 그리고 체인 블레이드가 들어간 검틀 안에 용융된 황금빛 카리브디스의 이빨을 천천히 부었다.
쉬이익-
연기가 피어오르면서 체인 블레이드 위에 부어진 액체는 순식간에 선지처럼 굳어 버렸다.
파베르는 달궈진 대장장이 망치로 검신 위에 부어진 카리브디스의 이빨을 세차게 두들겼다.
깡깡깡-!
망치를 두들길 때마다 그의 팔근육이 탄력 있게 흔들렸고 대장간 주변에서 구경하고 있던 여자 정령들은 탄성을 내질렀다.
“꺄악, 나왔다! 파베르 오빠의 망치질!”
“우윳빛깔 파베르!”
저게 어딜 봐서 우윳빛깔이야? 아, 커피 우유를 말하는 걸지도.
얼마나 두들겼을까.
체인 블레이드의 검신 위에서 굳어진 황금빛 카리브디스의 이빨은 이제 블레이드의 검신 안으로 서서히 스며들어 갔다.
체인 블레이드는 이제 황금빛으로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망치질이 끝나자 파베르는 체인 블레이드를 들고 옆에 있는 물통에 담갔다.
쉬익-
뜨거운 검이 물 속에서 빠르게 식었다.
파베르는 주변의 환호를 즐기는 듯, 담금질을 몇 번 더 했다.
얼마 후 파베르는 검을 들고 대규에게 건네며 말했다.
“휴, 다 됐소. 한번 들어 보시오.”
대규는 검을 받아 들자마자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터뜨렸다.
체인 블레이드의 외관은 그전과 똑같았다. 검신의 색은 검은색 그대로지만, 황금빛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것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전보다 각 체인 칼날들이 좀 더 견고해진 것 같았다.
그때 아이템 설명창이 떠올랐다.
[불카누스의 사슬 검(신화)]
[불의 신 불카누스의 입김이 스며들어 화염 공격력이 50% 강화됨. 사슬 검날마다 카리브디스의 이빨로 강화되어 물리 공격력이 50% 추가 상승하고 적의 물리 방어 및 화염 속성 마력 저항력을 20% 무시한다. 검의 주인은 검의 화염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대규는 검을 든 채 대장간의 비어 있는 공간을 향해 레툼 익투스를 시전해 봤다.
파밧!
화르륵-
불꽃이 일렁거리며 검광들이 검신에서 뿜어져 나왔다. 꼭 영화나 만화 애니메이션에서 보는 특수 효과 같았다.
그러자 파베르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이봐요! 지금 뭐 하는 거요! 대장간 다 태워 먹을 일 있소? 여기서 이러지 말고 저기 대장간 뒤로 돌아가면 무기를 시험해 볼 수 있는 훈련장이 있으니까 거기서 하쇼.”
“죄송합니다.”
대규는 황급히 스킬을 거둔 뒤, 대장간 뒤편의 훈련장으로 갔다.
그곳에서 칼을 체인화시켜 자유롭게 휘둘러 봤다.
휘리릭!
화르륵-
체인 칼날들이 화염을 뿜어내며 사방을 화염 막으로 뒤덮기 시작했다. 멀리서 보면 꼭 화염룡이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장난 아닌데.’
이번엔 스킬을 시전해 보기로 했다.
“레툼 익투스!”
그러자 살기를 띤 수십 개의 검광이 생성됐다. 하지만 여태까진 평범한 검광들이었는데, 지금은 그 검광들 끝에서 작은 파이어볼, 즉 화염구가 쏘아져 날아갔다.
아마 불에 취약한 몬스터라면 저 화염구를 한 방만 맞아도 즉사할 것이다.
‘이게 바로 신화 등급 무기의 클래스인가…….’
신들을 볼 때마다 떠올랐던 공략집의 내용이 떠올랐다.
신화 등급 이상의 무기를 사용해야 신들을 심연의 결계에 거둘 수 있다고 했던 말.
막상 무기를 다뤄 보니 왜 그런지 알 것 같았다.
불카누스의 사슬 검은 여태껏 휘둘렀던 체인 블레이드와 질이 달랐다. 똑같은 영웅이지만 인간의 육체와 세미데우스의 육체가 다른 것처럼.
“마음에 듭니까?”
어느새 훈련장으로 따라온 파베르가 대규에게 말했다.
“아주 맘에 듭니다!”
대규가 기쁘게 말하자 파베르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래 봬도 그놈 제작하는 데 공 좀 들였소. 카리브디스의 이빨은 영 다루기 까다로운 재질이라서요. 그래도 무기가 잘 나와서 마음에 드는군.”
“감사합니다.”
“감사할 거 없소. 비용을 받고 제작해 준 거니까. 하지만 좋은 무기를 만들면 대장장이로서 내 마음도 좋아집니다. 내 생전에 카리브디스의 이빨로 무기를 만들 날이 올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소. 당신 덕분에 나도 귀한 경험을 했습니다.”
파베르는 대장간 쪽으로 발길을 돌리며 이렇게 말했다.
“다음에도 좋은 무기나 방어구를 제작할 일 있으시면 주저 말고 찾아오시오. 그런데 아테나 여신이 허가증을 내주다니… 당신은 여신에게 꽤나 이쁨받는 영웅인가 보구만. 이래 봬도 나 역시 여신과 안면이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대규가 묻자 파베르는 자랑스럽게 말을 이었다.
“여신의 갑주 어깨에 달려 있는 그 술 같은 방패 한 쌍 있잖소. 그거 내가 만든 거거든. 그럼 수고하쇼.”
파베르가 사라진 뒤 대규는 검의 성능을 몇 번 더 시험해 본 뒤, 현실의 오피스텔로 돌아왔다.
많은 일이 있었지만 시간은 하나도 흐르지 않아서 정말 꿈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스파이더맨의 웹 슈터 뺨치는 거미줄 발사 전술 장갑과 불카누스의 체인 블레이드를 보니 이게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게 실감 났다.
‘게다가 아테나 여신의 새로운 성격도 알았고…….’
이젠 현실에 충실할 때였다.
당장 내일은 공장을 지을 부지를 알아봐야 했다.
‘또 바쁜 하루가 시작되겠구나.’
대규는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