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
98화. 아테나와 아라크네
아라크네는 자신을 차갑게 쏘아보는 여신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테나 여신님… 제발 저주를 풀어 주세요.”
울먹이는 그녀의 얼굴은 상당히 불쌍해 보였다. 하지만 아테나 여신은 그녀의 거대한 거미 몸뚱이를 경멸하듯 내려다보며 내뱉었다.
“감히 그런 말을 하다니. 아주 뻔뻔하구나. 네가 나에게… 아니 판테온의 신들에게 한 짓이 기억나지 않느냐? 흥, 그동안 행실을 반성하긴 했느냐?”
“…….”
아라크네는 말이 없었다. 여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은 굳어졌고 입은 앙다물고 있었다.
“말이 없는 걸 보니 반성은커녕 분노만 품고 있나 보군.”
“…여신님은 정말 너무하십니다.”
어느새 아라크네의 목소리엔 독기가 차 있었다.
“여신님께서 저와의 베 짜기 경합에서 질 것 같으니까 절 거미로 만드신 거잖아요! 감히 인간이 신보다 뛰어난 기술을 갖고 있는 게 건방지다고! 인간인 제가 여신님보다 베를 더 잘 짜는 게 그토록 큰 잘못입니까? 여신님은 뛰어난 남자 인간 영웅은 칭송하시면서 왜 그리 여자 인간에겐 가혹하십니까!”
그녀는 흥분한 목소리로 말을 계속 이었다.
“그리고 제가 베에 무늬로 짜 넣었던 것들은 실제로 신들께서…….”
“무엄하도다!”
아테나 여신은 아라크네의 말을 자르며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외쳤다.
여신의 하늘빛 머리는 공중에 마구 휘날리고 있었다. 여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분노에 찬 목소리로 산양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여봐라, 당장 이 괴물을 포박하라.”
척, 척, 척.
산양 병사들이 일렬로 들어와 단단한 밧줄로 아라크네의 거대한 몸뚱이를 휘감았다.
여신은 아라크네를 쏘아봤다. 여신의 눈동자 속에는 분노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것 같았다.
“지금 당장 이곳에서 이 건방진 계집애의 몸뚱이에서 마비 독주머니와 거미줄 주머니를 제거하고 모스텔룸(Mostellum)으로 만드는 형에 처해라. 그리고 지하 감옥에 영원히 가둬 버려라.”
그리고 아라크네에게 차가운 목소리로 이렇게 덧붙였다.
“너 같은 계집은 죽는 것도 사치다. 너는 죽는 것보다도 못한 상태에서 영원히 고통받게 될 것이다.”
“그, 그런…….”
아라크네의 얼굴에 공포의 빛이 떠올랐지만 여신은 두 팔을 들어 그녀를 향해 휘둘렀다.
스르륵.
여신의 손끝에서 검붉은 빛이 흘러나오며 아라크네의 얼굴로 향했다.
“꺄아악!”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신전에 울려 퍼졌다. 얼마 후, 그나마 인간의 얼굴로 남아 있던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끄르르…….”
그녀는 이제 완벽하게 거미로 변해 버렸다. 얼굴이 있던 자리엔 거미의 송곳니가 툭 튀어나와 있었고, 그 사이론 역겨운 거품이 부르르 일고 있었다. 아름다웠던 눈동자 역시 흉측하게 변해 버렸다.
산양 병사들은 칼을 들고 다가와 아라크네의 몸에서 거미줄 주머니와 마비 독주머니를 칼로 도려냈다.
“키이익!”
흉칙한 울음소리를 내며 몸을 부들부들 떠는 거대 거미의 모습을 보자 대규는 왠지 기분이 불편해졌다.
대체 아테나 여신과 아라크네 사이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방금 아라크네가 한 말을 들어 보면 아테나 여신과 그녀는 베 짜기 경합을 벌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는 분명 여신이 질 것 같으니까 자신을 거미로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정말일까?’
대규는 여신을 바라보았다.
여신은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으며 괴롭게 울부짖는 거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규가 알기로 전쟁터에서 봐 왔던 아테나 여신은 인간이나 정령을 가리지 않고 공평한 처사를 했었다. 왠지 자신이 모르는 이야기가 더 있을 것 같았다.
‘그것보다 모스텔룸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형벌은 대체 뭘까?’
하지만 곧 산양 병사들이 그 의문을 해소해 줬다.
병사들은 거미의 몸에서 마비 독주머니와 거미줄 주머니를 채취한 뒤 여신이 앉아 있는 왕좌 앞에 공손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각자 칼을 꺼내 들어 아라크네의 다리들을 모조리 절단해 버렸다.
서걱, 서걱, 서걱-
“키이이익! 키에에엑!”
다리가 모조리 절단된 아라크네의 몸뚱이는 거대한 오뚜기의 형상처럼 돼 버렸다. 불룩한 배는 천장을 향해 있었고, 절단된 다리 부위에선 쿰쿰한 진액들이 흘러나와 웅덩이를 이뤘다.
병사들은 이제 아라크네의 눈, 즉 거미의 눈을 파내기 시작했다.
아라크네는 몸을 움찔거리며 괴상한 울음소리를 냈지만 병사들은 멈추지 않았다.
그것을 지켜본 대규는 역겨워져서 저도 모르게 배를 부여잡았다.
그러자 여신이 그에게 말했다.
“영웅이여, 그대도 똑똑히 봐 두거라.”
하는 수 없이 대규는 아라크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테나 여신은 얼굴에 미동도 없이 차가운 표정으로 형벌을 받는 아라크네를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대체 저 둘 사이엔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대규는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정령을 힐끔 바라보았다. 신전 안으로 그를 안내했던 여자 정령이었다.
여자 정령 역시 산양 병사들이 형벌을 가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가끔 병사들을 도울 뿐이었다.
대규는 정령에게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 아라크네와 여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정령은 여신의 눈치를 흘끔 살폈다. 여신이 형벌에 집중하고 있다는 걸 확인한 뒤 대규에게 말했다.
“아테나 여신님은 전쟁의 여신 말고도 베를 짜는 베틀의 여신으로도 판테온에서 널리 알려져 있어요. 그런데 저 아라크네란 여자는 역시 인간들 중에서는 베를 잘 짜기로 유명했죠. 처음에 여신님은 저 여자를 매우 아꼈어요. 하지만 저 여자는 자신의 실력에 취해 날이 갈수록 오만해졌죠.”
정령은 얕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산양 병사들은 이제 아라크네의 이빨을 커다란 집게로 뽑고 있었다. 몸뚱이만 남은 거미는 발악하듯 울음소리를 내질렀다.
“결국 여신님은 노파로 변신해 저 여자에게 충고를 해 주러 갔어요. 그런 오만한 태도는 좋지 않으니 조금만 더 겸손해지라고요. 하지만 저 여자는 콧방귀를 끼면서 노파로 변한 여신님께 늙은이 주제에 훈계질하지 말라고 대들었대요. 심지어 당장 아테나 여신을 불러오라고 큰소리까지 쳤다고 하더군요.”
결국 열이 끝까지 받은 여신은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냈고, 그 자리에서 둘은 베 짜기 시합을 벌이게 됐다.
물론 그들의 실력은 막상막하여서 쉽게 결판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아라크네가 천 위에 짠 무늬 때문에 벌어졌다.
정령의 말에 따르면, 아라크네가 짠 천 위엔 판테온 신들의 아버지인 제우스 신을 농락하는 무늬들이 새겨져 있었다고 했다. 아테나 여신은 아라크네가 일부러 자신을 농락하고 신들을 조롱하기 위해 그런 무늬를 짰다고 생각하며 몹시 분노했다.
결국 여신은 아라크네의 베틀을 때려 부수고, 그녀가 짠 천을 찢어 버린 뒤 저주를 걸었다. 그리고 반성하란 의미에서 휴브리스의 동굴에 가둬 버렸다.
“여신님은 그녀의 몸에 자신의 손끝 하나 닿는 것도 치를 떨며 싫어하세요. 하지만 저 거미의 마비 독주머니와 거미줄 주머니는 몹시 유용해요. 그래서 여신님은 아마 당신을 시켜 그녀를 생포해 오게 한 것일 거예요.”
“그랬군요.”
이야기를 마친 정령은 대규를 바라보며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미데우스 영웅이여, 당신도 명심해 둘 것이 하나 있어요.”
“예?”
“신의 권위에 대드는 자, 신을 이기려고 하는 자에게는 죽음보다 더한 형벌이 기다리고 있어요. 그대가 뛰어난 영웅이라 해도 항상 이곳 판테온의 세계에선 오만을 경계하고 겸손해져야 해요. 특히나 우리 아테나 여신님은 판테온의 신들 중에서도 오만한 자를 가장 싫어하시거든요.”
대규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마침 아라크네에게 가혹한 형벌을 가하던 산양 병사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와 여신에게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다 됐습니다.”
몸통만 남은 아라크네는 거품을 흘리며 실신한 채였다.
“수고했다. 이제 저걸 감옥에 처넣어라.”
“옛!”
여신의 명령에 칼같이 대답한 병사들은 만신창이의 몸뚱이만 남은 아라크네를 데리고 사라졌다.
병사들과 아라크네가 사라졌지만 대규의 몸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방금 봤던 형벌의 광경들이 머릿속에서 가시지 않았다.
조용히 고개를 들어 아테나 여신을 바라보았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저 가혹한 형벌을 명령하고 그것을 지켜봤던 여신이 새삼 두려워졌다.
물론 아테나 여신은 아폴론처럼 인간을 신이나 정령보다 은근히 무시하거나 하진 않았다. 특히나 실력이 뛰어난 영웅이면 인간이라 하더라도 가리지 않고 주요 보직에 임명하거나 등용했다.
하지만 여자 정령의 말대로 그녀는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에겐 칼같이 냉정한 것 같았다. 방금 전 가혹한 형벌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실행하는 걸로 보아 그녀는 분명 무서운 구석이 있었다.
‘자만하지 말아야겠어.’
세미데우스가 된 직후, 잠깐이지만 이대로라면 신의 영역까지 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대규였다.
하지만 방금 봤던 아테나 여신의 모습을 보니 그런 생각이 쑥 들어가 버렸다.
지금이야 뛰어난 실력으로 여신의 호감을 얻고 있지만 모르고 실수했다가 호된 꼴을 당할지도 몰랐다.
이제 여신은 표정을 풀고 대규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쨌든 그대는 나의 미션을 훌륭히 완수했다. 심지어 생각보다 저 괴물 계집을 빨리 잡아 왔다.”
여신이 그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약속한 대로 허가증을 내리도록 하마.”
팟.
그녀가 말을 마치자마자 공중에 작은 종잇조각이 생겼다.
종잇조각에는 황금빛의 꼬부랑글씨와 창과 방패가 그려진 붉은 인장이 찍혀 있었다. 아무래도 아테나 여신을 상징하는 인장인 것 같았다.
대규가 허가증을 받아 들자 여신은 그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가 추가로 내릴 선물이 하나 더 있다.”
“아니, 괜찮습니다.”
“사양하지 말거라. 이건 그대가 판테온의 시련을 무사히 통과해 세미데우스가 된 것에 대한 축하 선물이기도 하다. 나는 그대가 속해 있는 군대의 상관이니 이 정도는 해야겠지.”
여신은 산양 병사가 왕좌 아래에 내려놓은 아라크네의 거미줄 주머니를 집어 들었다.
대규가 그 주머니를 보자 아이템 설명창이 떠올랐다.
[아라크네의 거미줄 주머니]
[끈끈하고 단단한 거미줄을 생성하는 주머니. 주머니로부터 반경 10미터까지 끈끈한 거미줄을 쏠 수 있다.]
여신이 대규에게 말했다.
“그대가 손에 끼고 있는, 일전에 내가 보상으로 준 그 전술 장갑을 잠깐 이리 가져오거라.”
여신이 장갑으로 뭘 할지 궁금했지만, 대규는 군말 없이 장갑을 벗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여신은 왼손엔 은빛 미스릴 전술 장갑을 들었고 오른손엔 거미줄 주머니를 들었다.
순식간에 장갑과 거미줄 주머니는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허공에서 서로 합쳐지며 빛을 뿜었다.
파밧!
빛이 사라지자 거미줄 주머니는 오간 데 없었고, 오직 전술 장갑만 남았다.
하지만 장갑은 그전에 비해 묘하게 달라졌다. 손목 부분에 그물 모양의 격자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가져가도록 해라.”
대규는 앞으로 나가 장갑을 받아왔다. 그때 새로운 설명창이 떴다.
[거미줄 주머니를 장착한 전술 장갑]
[거미줄을 전방 10미터까지 뿜어낼 수 있는 장갑. 단순히 거미줄을 직선으로 뿜어내는 것 외에도 출력을 조절해 원하는 형태로 발사가 가능하다. 사용자의 의지에 따라 다양하게 이용할 수 있다.]
거미줄이 나가는 장갑이라니.
‘이거 완전 스파이더맨 아닌가?’
이런 무기는 예상하지 못했다.
게다가 단순지 직선으로 뿜는 게 아니라 사용자의 의지에 따라 다양하게 뿜어낼 수 있는 것 같았다.
아라크네의 거미줄 스킬처럼 상대를 포위할 수도 있고 상대의 발목에 쏴서 단순히 움직임을 봉쇄할 수도 있다.
“정말 감사합니다!”
대규가 기쁘게 장갑을 받자 여신은 온화한 미소를 띠며 이렇게 말했다.
“아니다. 기쁘게 받는다니, 나도 기분이 좋구나.”
여신은 상기된 얼굴로 대규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강철 같은 자신감에 차 있으면서도 산들바람처럼 부드러운 얼굴.
좀 전에 가혹할 정도로 차가운 표정을 지었던 것과 정반대였다.
“참, 그대에게 할 말이 한 가지 더 있다.”
“무엇입니까?”
“다음번 기간토마키아 전투에 소환될 땐 동부 전선으로 갈 필요가 없다. 대신 그대는 앞으로 내가 지휘하는 본진으로 소환될 것이다. 그대는 이제 나와 함께 적과 싸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