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
97화. 아라크네 (3)
거미줄의 마비 독이 온몸에 서서히 퍼지기 시작했다.
대규의 눈앞에는 하얗게 드리워진 거미줄의 장막뿐, 이제 더는 아라크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체인 블레이드를 들려고 했지만 거미줄은 순식간에 팔의 근육을 옥죄어왔다. 숨도 막혀 왔다.
‘빌어먹을…….’
거미줄이 지니고 있다는 마비 독 때문인지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온몸에 힘이 빠져나갔다.
흐려지는 머리의 의식 속에서 생각했다.
‘보관함을 불러내서 해독제를 꺼낼 수만 있다면…….’
아주 오래전, 차원의 틈의 히든 미션에서 오르트로스를 해치우고 만들어 놨던 마비 독 해독제가 아직 보관함의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
그걸 꺼내서 먹기만 하면 마비 독을 물리칠 수 있는데 지금은 기습적으로 거미줄에 당해 온몸의 힘이 빠져 버렸다.
‘이렇게 어이없게 당해 버리다니…….’
정신을 서서히 잃어가고 있는데 공략집이 떴다.
<현재 마비 독에 중독된 상태입니다. 보관함에서 마비 독 해독제를 복용하시겠습니까? Yes/No>
처음 보는 메시지창이었다.
선택하면 뭐가 달라지는 거지?
알 수 없지만 대규는 일단 Yes를 선택했다.
그러자 갑자기 자신의 입속으로 끈덕진 액체가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그건 분명 오르트로스의 독으로 제작한 마비 독 해독제였다.
‘공략집이 해독제도 대신 먹여 준다고?’
카리브디스의 뱃속에 들어갔을 때 봤던 버블 막 스킬 이후 처음 보는 능력이었다. 이것도 과연 업데이트의 효과인 걸까?
대규는 열심히 해독제를 들이마셨다.
꿀꺽꿀꺽.
곧 마비됐던 몸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체인 블레이드를 쥔 손에 힘도 들어갔다.
물론 거미줄이 몸을 옥죄고 있어 블레이드를 휘두르긴 힘들지만 스킬을 써서 검광을 불러낼 순 있다.
“레툼 익투스!”
대규는 거미줄 안에서 일격의 기운 레툼 익투스를 시전했다. 그러자 들고 있던 체인 블레이드에서 수많은 검광이 뿜어져 나왔다.
그중 일격의 기운은 정확히 거미줄 고치를 세로로 길게 베어 버렸다.
화르륵!
블레이드에 깃든 화염의 힘이 몸을 감싸고 있는 거미줄을 단번에 태워 버렸다.
불에 붙은 거미줄은 힘없이 갈라진 뒤 사라져 버렸다.
물론 대규 자신은 닥튈로이의 반지 등 아이템이 지닌 마법 저항력 덕분에 뜨거운 화염에도 멀쩡했다.
거미줄을 벗어나자 눈앞에 거대 거미로 변신한 아라크네가 보였다.
“끄으윽… 흐윽…….”
거미 대가리에 붙은 그녀의 얼굴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벌어진 입술 틈에서는 고통에 찬 신음과 흐느낌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그 모습을 보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여태까진 저렇게 서글퍼 보이는 몬스터가 없었다. 몬스터들은 항상 대규를 죽이기 위해 미친 듯이 달려들었고, 자신은 녀석들을 해치우기만 했다.
하지만 저렇게 괴롭게 울고 있는 그녀를 보니 동정심이 들어 공격하기 꺼려졌다. 일종의 죄책감이랄까.
‘정신 차리자! 그녀는 몬스터야.’
그나마 다행인 건 해치울 필요 없이 생포만 하면 된다.
타타탓.
그사이 아라크네는 8개의 다리로 동굴 내벽을 기어 올라갔다. 거대한 몸뚱이를 지닌 것에 비해 스피드는 제법 빨랐다.
동굴이 어두워서 그녀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다.
타타탓.
열심히 그녀의 다리가 움직이는 소리만 들렸다.
어느새 아라크네는 대규의 머리 바로 위 동굴 천장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녀는 가만히 몸을 웅크린 후, 대규의 정수리를 향해 거미줄을 다시 토해 냈다.
스르륵.
하지만 전투 감각으로 거미줄의 소리를 귀신같이 감지한 대규는 바로 옆으로 몸을 돌려 점프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거미줄을 피했다.
타탓!
방금까지 자신이 서 있던 자리에 거대한 거미줄들이 겹겹이 붙어 있었다.
동굴이 어두워서 아라크네의 위치를 알기 힘들었기에 대규는 공략집의 지도창을 띄웠다. 지도창에는 그녀의 움직이는 경로가 붉은 점으로 표시되고 있었다.
비산의 결계나 레툼 익투스를 써서 공격해 볼까 했지만 이내 관뒀다.
그녀를 생포해야 한다. 혹시나 강력한 공격을 했다가 그녀가 죽어 버리면 말짱 허사다.
‘절대 급소는 노리지 말고 움직임을 봉쇄해야 한다!’
대규는 동굴 벽을 딛고 점프해 8개의 다리 중 하나를 노렸다.
털이 숭숭 난 뒷다리 중 하나를 향해 체인 블레이드를 휘둘렀다.
서걱-
검신에서 불꽃이 튀었고 아라크네의 비명이 들렸다.
“꺄아아악!”
검에서 튄 불꽃 때문에 동굴의 어둠 속에서 한순간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괴로워하는 소녀의 얼굴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제기랄…….’
목표한 대로 다리 하나를 베어 움직임을 봉쇄했지만 그 얼굴을 보니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라크네는 다리를 절뚝거리며 다시 동굴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녀가 기어간 자리엔 찐득한 초록빛의 진액이 핏방울처럼 묻어 있었다.
스르륵.
다시 대규를 향해 발사되는 거미줄.
하지만 몸을 돌려 가뿐히 피하고 날아오르듯 점프해 이번엔 그녀의 앞쪽 다리 중 하나를 베려고 했다.
휘리릭-
거대한 몸뚱이에 어울리지 않는 빠른 스피드로 아라크네는 그 공격을 피해 버렸다.
“으흐흑… 제발 그만…….”
공격을 피해 어둠 속으로 사라진 그녀는 서럽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제길, 만만치 않군.’
그 순간 사방에서 거미줄이 뿜어져 나왔고 대규는 재빨리 몸을 돌려 간발의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거미줄을 피했다.
다리를 몽땅 베어 버려서 움직임을 봉쇄하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는 흐느끼는 소리가 강해질수록 거미줄 공격은 점점 거세졌다.
대규 역시 될 수 있으면 빨리 그녀를 생포해 이 임무를 완수하고 싶었다. 그리고 빨리 허가증을 받아 무기를 제조하러 대장간에 가고 싶기도 했다.
‘무슨 방법이 없나?’
그때 동굴 바닥에 퍼져 있는 끈끈한 거미줄이 눈에 들어왔다.
좀 전에 아라크네가 동굴 천장에 붙어 대규를 공격할 때 스킬로 내뱉었던 거미줄이었다.
‘저 스킬을 이용하면 녀석을 빨리 생포할 수 있지 않을까?’
거미줄은 마비 독을 지니고 있으니 아라크네 역시 저 거미줄에 갇혀 버리면 전신 마비가 된 상태로 완벽하게 포위될 것이다.
대규는 미리 챙겨 둔 스킬 복제 알약으로 저 거미줄 공격의 스킬을 복제해 아라크네를 거미줄에 가두기로 했다. 그 뒤에 거미줄을 통째로 인피니투스에 넣어 버리면 임무는 완벽하게 수행된다.
대규는 스킬 복제 알약이 든 유리병을 꺼내 그중에서 하나를 입에 털어 넣었다.
“윽!”
쓸개를 통째로 넣은 것처럼 입안에 쓴맛이 돌았다. 눈물이 핑 돌 지경이었다.
알약을 삼키자 명치 부분에서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곧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스킬 복제 알약의 효과가 발동되기 시작합니다. 전투 상태인 거대 거미 아라크네의 스킬 ‘거미줄’을 복제하기 시작합니다.]
[복제된 스킬은 전투 중 1회 사용 가능합니다. 대신 스킬에 필요한 마나량이 충분하지 않으면 복제가 불가능합니다.]
좀 전에 차원의 틈 공략집에 떠오른 정보로 거미줄 스킬의 소모 마나량이 50이란 건 확인했다.
[스킬이 성공적으로 복제됐습니다. 보유 스킬란에 가서 확인하십시오.]
보유 스킬란에 가니 맨 밑에 거미줄 공격 스킬이 생겨나 있었다.
[거미줄(0/1): 마비 독이 있는 거미줄을 입으로 내뱉어 상대방을 감싸 안아 포위해 마비시킨다. 마나 소모량 50.]
라의 목걸이로 마신들에게 스킬을 빌려 왔을 때처럼 스킬명 옆에 (0/1)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무래도 한 번만 사용할 수 있는 일회용이란 뜻인 것 같았다.
‘이제 아라크네를 향해 이 스킬을 시전하면 된다.’
지도창을 켜 놨지만 그걸 보지 않아도 그녀의 위치를 알 수 있었다.
캄캄했지만 동굴의 한구석에서 그녀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흐흑… 제발 절 죽이지 마세요… 흐흑…….”
대규는 그녀가 있는 쪽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난, 널 죽이지 않아. 아테나 여신에게 널 생포해 오란 명령만 받았을 뿐이다.”
“헉!”
그러자 그녀는 숨을 발작적으로 들이켰다.
가까이 다가가자 어둠 속에서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얼굴엔 두려움과 공포가 떠올라 있었다. 거미로 변신하기 직전보다 훨씬 무서워하는 것 같았다.
“시, 싫어요…….”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동굴 천장 쪽으로 도망갔다.
하지만 지도창에 그녀의 위치는 정확하게 표시되고 있었다. 그녀는 오른쪽 동굴 내벽에서 45도 상단에 있었다.
대규는 오른쪽으로 돌아 고개를 위로 든 뒤 거미줄 스킬을 시전했다.
양쪽 쇄골 사이가 갑자기 뜨거워졌고 날카로운 고통이 차올랐다.
‘이거 제대로 시전한 거 맞아?’
곧 속이 울렁거리면서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웨엑…….”
역겨운 구토 소리와 함께 입에서 한가득 거미줄이 뿜어져 나왔다.
거미줄은 정확히 대규가 노린 곳, 오른쪽 벽 상단을 향해 날아갔다.
스르륵.
“꺄아악!”
쿵!
굉음이 들렸고, 거대한 거미줄 덩어리가 동굴 바닥에 떨어졌다.
성공이다.
거미줄 겉에는 끈적끈적해 보이는 진액이 묻어 있었다.
‘윽! 저게 내 목에서 나왔단 말이야?’
대규는 반사적으로 자신의 목을 움켜쥐었다.
아직도 토할 것같이 속이 울렁거렸다. 목구멍은 뜨끈뜨끈했고, 역겨운 쉰내가 풍겨져 나왔다.
빨리 양치를 하고 싶었다.
절대 다시 복제하고 싶지 않은 스킬이야… 우욱!’
거미줄 덩어리가 움찔움찔 떨리다가 멈췄다. 마비 독이 작용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대규는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거미줄 덩어리를 바라보았다.
‘그것보다 대체 아테나 여신과 이 아라크네란 여자 사이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분명 공략집에선 여신의 노여움에 의해 저주로 거미가 됐다고 했다. 게다가 좀 전에 여신의 이름을 듣자 몹시 공포에 질리는 걸로 봐선 분명 둘 사이에 뭔가가 있다.
‘일단은 여신에게 그녀를 데려가자. 그래야 무기 제조 허가증을 받을 수 있으니.’
이들 사이의 일이 궁금하긴 했지만 자신이 직접 파헤칠 일은 아니었다.
그는 아라크네가 들어 있는 거미줄 덩어리를 인피니투스 안에 넣었다.
동굴을 빠져나오자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아테나 여신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성했습니다. 여신의 신전으로 돌아가면 보상으로 무기 제조 허가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테나 여신의 신전으로 향하는 포탈이 열립니다.]
우우웅.
메시지창의 내용대로 곧 포탈이 열렸다.
대규는 그 안으로 들어갔다.
* * *
포탈을 나오니 아테나 여신의 왕좌 앞이었다.
여신은 대규의 모습을 보고 반색하며 입을 열었다.
“벌써 왔는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아라크네는 어디 있느냐?”
대규는 보관함에서 인피니투스를 꺼냈다. 여신은 그 가방이 헤르메스 신의 것이란 걸 알아봤다.
‘신발 말고 저 가방까지 갖고 있다니…….’
점점 더 대규에게 호기심이 일었다.
대규는 여신 앞에서 가방을 열었다.
찰칵.
그 안에서 거대한 거미줄 덩어리를 꺼내 여신 앞에 공손히 내려놓았다.
“이건?”
“이 안에 거대 거미 아라크네가 있습니다.”
“그럼 거미줄을 갈라 꺼내 보아라.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다.”
“알겠습니다.”
대규는 체인 블레이드를 꺼내 거미줄을 갈랐다.
검신에서 은은하게 일렁이는 화염 덕분에 별 힘을 주지 않아도 거미줄은 쉽게 갈라졌다.
그 틈 사이로 거대 거미 아라크네의 몸이 보였다.
아무래도 마비 독 때문에 마비돼서 정신을 잃고 기절한 것 같았다.
아라크네를 본 여신은 아주 기쁜 표정을 지으며 대규를 칭찬했다.
“훌륭하도다! 그대는 정말 훌륭해! 역시 뛰어난 영웅이다.”
여신은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아라크네를 향해 팔을 가볍게 휘둘렀다.
그러자 그녀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여신은 아라크네의 얼굴을 쏘아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야 정신이 드느냐, 이 거만하고 흉측한 괴물아?”
여신의 얼굴을 바라본 대규는 놀랐다.
차가운 목소리에 버금갈 정도로 차가운 눈빛과 표정.
여태껏 봐 왔던 여신의 모습 중 가장 무서운 모습이었다. 엄습해 오는 두려움에 저도 모르게 고개가 숙어질 정도였다.
“허억… 아테나 여신님…….”
아라크네는 떨리는 목소리로 아테나 여신을 향해 입을 열었다.